모로들은 침략자의 지배를 거부하며 자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스페인 식민정부는 그들을 '해적'이라고 불렀다. 19세기 말 필리핀의 통치자가 바뀌었다. 새로운 식민정부를 구성한 미군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라 불렀다.
필리핀 정부가 독립한 뒤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마르코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2005년에는 모로민족해방전선과 필리핀 정부군 사이에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필리핀 주둔 미군은 인도주의적 활동을 위해서만 모로 거주지역에 주둔할 뿐, 군사작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현지 주민들, 그리고 필리핀의 인권 활동가들은 이런 주장을 반박했다. 미군이 필리핀 정부군을 도와 전투에 참가한 정황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지난달 말, '경계를 넘어' 활동가 지은 씨가 모로들이 사는 필리핀 술루(Sulu) 군도를 방문했다. 2005년의 대대적인 유혈사태는 끝났지만, 아직도 산발적인 총성이 울리는 지역이다. 다음은 지은 씨가 보낸 술루군도에 관한 기록이다. <편집자>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섬이지만, 관광객들은 다들 피해간다는 필리핀 술루(Sulu) 군도.
그동안 마닐라에서 민다나오 섬의 다바오를 거치며 만났던 필리핀 활동가들 대부분은 내가 술루로 가고 싶다고 하면 일단 고개부터 내저었다. 어느 누구도 안전을 책임져 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낯선 외국인이 혼자서 술루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정신 나간 행동인 양 반응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술루로 들어가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사람들을 설득했고, 결국 갈 수 있는 기회가 조금씩 열렸다. 무엇보다도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함께 동반한 2명의 현지 활동가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만약 그들이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술루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9시간 동안 배로 이동해야 하고, 가는 곳마다 군인들의 감시와 통제가 포진해 있는 곳.
해적에서 테러리스트가 된 모로
예로부터 민다나오섬과 술루군도 일대는 다양한 부족민들이 주로 이슬람의 영향력 아래 그들 고유의 사회・정치적 기반을 형성하며 살아 왔다. 따라서 필리핀 무슬림인 '모로'들에게는 본래 '국가'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스페인의 침략을 필두로 미국과 일본의 점령, 필리핀 정부의 지배정책을 거치며 모로랜드(필리핀 무슬림들이 살던 땅)는 필리핀으로 강제 통합되었다. 선조들의 땅을 억지로 빼앗긴 모로들은 당연히 이에 반발했고, 이에 대한 대가로 엄청난 핍박과 수탈, 학살을 겪어야 했다. 1970년대 들어 독재자 마르코스 정권의 한층 강도 높은 무력정책은 결국 이들을 '성명에서 총으로'라는 말이 보여주듯 무장투쟁으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모로들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들의 '분리주의 운동'이란 부당한 역사적 과정을 바로잡고 억압당한 권리와 자유를 되찾는 것이다. 그러나 점령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나오면서 그들의 이런 행동들은 국가를 위협하는 범죄로 취급받았다. 대표적으로 스페인인들은 모로들을 '해적'으로 명명하며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해적전쟁'이라고 정당화했다. 그 후 오늘날에는 미국과 필리핀 정부가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간주한다.
미군과 필리핀 군대는 테러리스트 그룹을 제거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2001년 민다나오, 술루 지역에서 바실란(Basilan)을 시작으로 모로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테러전'을 일으켰다.
기득권층과 정부에 의해 왜곡된 생각에 젖어있는 필리핀의 많은 사람들은 남부의 모로들은 해적이나 테러리스트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모로가 몰려 있는 술루 군도는 마치 잠재적 범죄자들이 우글거리는 위험지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7만5000명의 난민을 낳은 대대적인 공습
민다나오섬과 술루군도 일대에서는 최근 테러와의 전쟁으로 인한 정부군의 공격으로, 모로민족해방전선(MNLF),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이 필리핀 정부와 맺은 평화협정의 의미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사람들은 내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날그날 일상을 버텨 나가고 있을 뿐이다.
2005년 술루지역에서만 전면전이라고 할 수 있는 커다란 전쟁이 두 번이나 발발했다. 그 해 2월, 정부군에 의해 모로민족해방전선에 속한 사람의 가족 3명이 학살되는 만행이 벌어졌는데 살해된 사람들 중에는 임신 6개월 된 여성과 13살짜리 아이도 포함돼 있었다.
이 끔찍한 소식은 곧 모로민족해방전선과 정부군 간의 치열한 교전으로 이어졌다. 당시 정부군은 며칠 동안 술루 섬 일대 도시들을 향해 사정없이 폭격을 퍼부었고, 18개의 주요 도시들 중 9개 이상을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불과 며칠 만에 7만5000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당시 목격자들은 미군이 직접 비행기를 몰며 전투에 참가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미군은 그동안 인도주의적 활동을 위해 술루에 주둔해 왔고 그 외에는 필리핀 군부대의 기술적 조언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정부 측의 주장이 완전한 거짓말로 들통났다.
이어 같은해 11월 11일, 휴전상태 9개월을 넘기지 못 하고 미군과 정부군은 군사공격을 재개했다. 이번에도 여느 때처럼 아부 사야프를 공격한다고 하면서 주로 모로민족해방전선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지역인 인다난(Indanan)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그 결과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난민으로 전락했고, 무고한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테러리스트 혐의를 받아 수용소로 끌려가는 참사가 벌어졌다.
결국 내가 술루로 들어가기 불과 얼마 전, 필리핀 정부는 '과격무장단체'인 아부 사야프(Abu Sayaf) 지도자 한 명이 정부군과의 치열한 교전 끝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야 할 진실은 아부 사야프의 지도자가 정말로 정부군의 손에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아니다. 그보다는 정부군과 미군의 군사공격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다쳐야 했으며,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집과 마을로부터 쫓겨나야 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쫓겨난 모로들 "과일과 채소가 풍부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군사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인다난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처참했다. 군사공격을 피해 도망치듯 빠져나온 사람들은 새로운 지역에서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한 가정에서는 어린 아이가 고열로 신음하고 있는데도 돈이 없어서 병원엘 데려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온 가족이 둘러앉아 이마 위에 찬수건을 올려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외지에서 손님이 왔다고 먹을거리를 내오며 인정을 베풀 정도로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인다난 지역 주민인 아이놀 씨는 "원래 내가 살던 곳은 농사 짓기가 훨씬 나은 땅이어서 과일이든 채소든 언제나 먹을거리가 풍부해서 살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가끔 너무 먹을 게 없으면 군정찰기가 여전히 하늘을 가르고 있는 예전의 살던 곳으로 가서 먹을거리를 몰래 구해 온다고 했다. 아이놀 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것만이 자신에겐 평화라고 말했다.
필리핀 정부군과 미군의 군사공격에 의해 죽고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이놀 씨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삶의 희망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단지 폭격으로 마을이 초토화되어 고향을 등지지 않게 되기를, 본의 아니게 군사적 충돌에 휘말려 분쟁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평화롭게 농사 지으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이다.
나는 어제처럼 오늘도, 그리고 오늘처럼 내일도 매일같이 마음 속 깊이 꿈꿀 것이다. 모로들이 평화와 인권을 찾게 되기를. 그 꿈이 지금도 온갖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활동하고 있는 필리핀의 인권단체 활동가들과 불의에 저항하는 필리핀 민중들의 힘으로 언젠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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