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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살해…필리핀 민주주의의 현주소"

[르포] "아로요 집권 이후 현재까지 832명 살해"

필리핀에서는 2001년부터 최근까지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암살되거나 의문의 죽임을 당했고, 2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납치된 이후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진보정당의 활동가, 인권운동가, 종교인, 학생, 노동자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살해되고 있다.

이들 희생자 숫자가 증가한 것은 아로요 정부가 미국 부시 정부의 '테러와 전쟁'에 동참하고 나선 이후부터다. 아로요 정부는 자국 내 공산당 세력인 NPA(New People's Army) 등을 테러 세력으로 간주, 이들과 전쟁을 선포했다. 이 과정에서 테러세력을 색출한다는 명목 하에 필리핀 내에서 진보적인 운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을 암살하거나 납치했다고 한다.

필리핀 정부가 꾸린 진상조사위원회인 멜로위원회의 조사보고서도 이같은 '정치적 살해'에 필리핀 정부군이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게다가 필리핀에서의 정치적 살해는 지역 토호 세력과 군부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는 등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범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필리핀 정부에 정치적 살해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고 있지만, 필리핀 현지 활동가들은 오는 5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목적에 따른 살해가 더욱 증가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프레시안>은 필리핀의 정치적 살해의 발생 배경과 실태 등을 다룬 기고문 2편을 연재한다. 국내 인권사회단체들은 23일 필리핀의 '비사법적 살해'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편집자>


1-2월에 걸쳐 약 한 달 가량 필리핀에서 머무르는 동안, 필리핀 국내 여론의 초점은 온통 5월 총선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특히 2004년 총선에서 아로요 대통령의 부정선거 조작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이번 선거에서도 또 다른 부정 사태가 나타날 것에 대비해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게다가 정치적 살해를 비롯한 갖가지 폭력행위들이 뚜렷이 증가하는 양상이다.

5월 총선을 앞두고 바얀무나(BAYANMUNA), 아낙빠위스(ANAKPAWIS), 가브리엘라(GABRIELA) 등 진보정당이 최대 3명까지만 가능한 정당명부제의 후보자를 선출하는 자리에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10명 가까이, 때로는 그 이상으로 후보자를 선출하는 모습은 필리핀의 정치적 살해의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 지난달 22일 마닐라 멘디올라 거리에서 열린 멘디올라 학살 추모 집회. 이날 집회 참석자들은 현재 필리핀에 만연한 정치적 살해의 근절을 촉구하면서 거리 행진을 벌였다.ⓒ지은

필리핀의 진보정당들은 정당명부제 도입으로 지난 선거에서 국회의원들은 배출한 가운데, 정치적 입지를 점점 굳혀감에 따라 이번 선거에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비례해 군부와 아로요 정권의 정치적 탄압과 폭력도 극심해지고 있다. 이미 상당수의 정치 지도자와 활동가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졌다. 따라서 지난 1,2월에 치러진 진보정당들의 당 대회는 예상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단호한 의지, 환호가 뒤섞인 대단히 복잡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정치적 살해, 필리핀 정부군도 연관

그렇다면 오늘날 필리핀 사회 내에서의 정치적 살해 혹은 비사법적 살해 실태는 얼마나 심각할까? 아로요 정권 취임 이후 이러한 종류의 살인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2001년 101명, 2005년 189명, 2006년 209명으로 급격히 증가해 왔으며, 실종자 수는 2001년 7명에서 2005년 56명, 2006년 93명으로 기록됐다. 2007년 현재까지 살해된 희생자 수는 총 832명으로, 평균 일주일에 3명꼴로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로요 정권은 1986년 군사독재정권이었던 마르코스가 물러난 이후 최악의 정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얼마 전 정부 산하의 진상조사위원회인 멜로위원회에서 출간한 보고서는 정부 편향적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발생한 죽음이 필리핀 정부군과 연관이 있음을 부분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또 가장 최근에는 유엔 특별조사관으로 파견된 필립 알스톤(Philip Alston) 씨가 10일간 여러 지역들을 돌며 피해자들이나 유가족들과의 면담을 진행했는데, 그는 지난 21일 기자회견을 통해 "지금까지 발생한 활동가들과 언론인들 위주의 비사법적 살해가 필리핀 군인들과 경찰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설득력 있는 근거들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필리핀군 측은 이런 결과들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21일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민다나오 지역의 원주민들의 피해상황을 조사했던 다른 한 명의 유엔 조사관 로돌포 슈타벤하겐(Rodolfo Stavenhagen) 씨는 "현재 벌어지는 정치적 살해 또는 비사법적 살해가 매우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아로요 정권은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필리핀의 복잡한 정치 갈등과 무력분쟁 상황을 충분히 감안해 나온 유엔의 지적이 이 정도라면 종래 정치적 살인 배후에서 사실상 아로요 정권이 얼마나 막강하게 개입해 왔는지를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다.

정치적 살해는 필리핀 군사화의 결과

그동안 아로요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필리핀의 군사화에 매달려 왔다. 대표적으로 '오플란 반따이 라야'(Oplan bantay laya), 즉 자유수호작전이라는 국가안보체제 수립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는 필리핀 군부의 힘을 비대하게 만들었고, 피플파워(민중혁명)를 바탕으로 성장해 온 필리핀 민주주의를 빠르게 잠식했다.

아로요 정권의 군사정책은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분석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직접적 전쟁 수행이다. 아로요 대통령은 '발리까딴(Balikatan)'이라 불리는, 미군과의 합동 군사작전을 광범위하게 전개하도록 허용했고, 동시에 남부 민다나오를 중심으로 실제 군사공격을 감행해 왔다. 그는 민다나오에서 이슬람 분리주의를 주장하는 모로민족해방전선(MNLF),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 세력들과 맺은 평화협정을 이행하기 보다는 테러리스트로 분류된 아부사야프그룹(ASG) 혹은 무장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한다는 미묘한 논리를 내세워 무고한 무슬림들을 대량 희생자로 만들었다.

또 아로요 정권은 배후에서의 비사법적 살해와 체포, 법제 시스템 강화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간접적 전쟁도 수행해 왔다. 그는 2006년 2월 피플파워 20주년 기념일 즈음 점점 고조되는 위기의식을 이기지 못하고 포고령 1017호를 내려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당시 그는 좌파 지도자들과 저널리스트, 학생 등 10여 명을 국가전복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체포하기도 했다. 체포된 사람들 중 한 명인 아낙빠위스의 크리스핀 벨트란 하원의원은 건강악화로 병원으로 옮겨진 채 아직까지 감금상태에 있다. 이런 조치들은 크리스핀 벨트란 의원을 아로요 대통령의 피해자이자 불의에 맞서는 정치인이라는 상징적 존재로 만들었다.

결국 아로요 정권의 무력적 통치 방식은 대량 인권침해를 유발하면서 필리핀 사회를 날이 갈수록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최근에는 국회의 반테러법 제정이 큰 논란이 되고 있다. 이 법이 효력을 발휘하게 될 때에는 현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국가 폭력, 정치적 탄압과 인권 침해 등이 심각해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 멘디올라 학살 추모 집회에서 한 참석자가 농민들에 대한 살해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지은

"싸움을 안 해도 죽음과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

필리핀에서는 매년 1월22일 대통령궁이 위치한 멘디올라 거리에서는 1987년 아키노 정권 시절 이곳에서 시위 도중 총에 맞아 죽은 13명 농민의 넋을 기리는 행진이 벌어진다. 올해도 변함없이 마닐라 각지에서는 물론이고 타 지역에서까지 많은 활동가들이 몰려와 행진을 했다. 이들은 멘디올라 학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동시에, 현재 벌어지는 정치적 살해를 강력히 규탄했다.

집회 참가자들 대다수가 피해자들이기도 했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온 몸에 난 총상의 흔적을 보이며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이도 있었고, 가족이나 친척 중에 사망자가 존재하는 유가족들도 많았다. 또 중견 활동가들 대부분이 정치적 살해 위협으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상태였다. 이들이 당하는 정신적.육체적 고통이 얼마나 클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유가족과 잠재적 피해자들은 대부분이 국내 난민으로 전락하는 또 다른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날 마닐라뿐만 아니라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지역에서도 멘디올라 학살 추모 집회가 열렸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한 활동가가 총격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는 인근 사무실로 급히 피신해 살아남을 수 있었으나 여전히 도주 상태에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젊은 인권활동가에게 나는 작금의 상황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수시로 벌어지는 참극 앞에서 그들의 심정이 어떤지 알고 싶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싸움을 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우리를 충분히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싸움을 그만둔다고 해서 안전해지거나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현재로서는 싸움을 지속하든 않든 간에 죽음과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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