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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에서의 정치적 살해, 어떻게 막을까"

[인권오름]800명 이상의 활동가·언론인 살해 당해

지난주 필리핀에서 일어나고 있는 '활동가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해'를 조사해 온 멜로위원회는 조사 결과 보고서 작성을 마치고 활동을 마무리했다. 멜로위원회는 2006년 8월, 필리핀의 살해 문제에 대한 국내외의 압박에 아로요 정부가 설치한 진상조사위원회다. (☞관련 기사 보기 : '테러와의 전쟁'이 만드는 '또 다른 테러')

그러나 국가가 세운 기관들이 종종 그렇듯, 멜로위원회도 무늬만 '독립'적이었고 진상 조사에 대한 의지는 처음부터 희박했다.

정부의 진상조사위원회, 멜로위원회 조사 결과
▲ "필리핀에서의 정치적 살해를 중단하라!"
<출처:www.stopthekillings.org>

조사 결과, 멜로위원회는 활동가와 언론인에 대한 살해(정치적 살해 political killing, 또는 적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비사법적 살해 extrajudicial killing)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이 필리핀의 정규군에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위원회는 몇몇 살해 사건이 필리핀 공산당 계열인 신인민군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멜로위원회 조사위원이었던 뿌에블로 주교는 필리핀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필리핀 정규군의 장성들이 조사를 받았으나, 대부분 어떠한 설명이나 자체 조사를 거부한 채 살인에 대한 관련성을 부정하기만 했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필리핀 군대는 조사 기간 동안 멜로위원회의 조사가 정부의 잘못을 덮기 위한 것이라며 조사에 대한 협조를 거절했다.

한편 멜로위원회 위원장과 필리핀 일간지 <인콰이러(Philippine Daily Inquirer Newspaper)>의 인터뷰에 따르면, 위원회가 조사에 활용한 자료는 정치 살해를 조사하기 위해 구성된 특수 경찰부대의 자료였다.

그런데 이 특수 경찰부대는 그동안 살해된 활동가들의 경우에는 공산주의자 그룹 사이의 내부 갈등 때문에 벌어진 사건으로, 살해된 언론인들의 경우에는 직업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개인적인 분파의 시기심 때문이라고 밝혀 활동가와 언론인 단체의 비난을 받아 왔다. 물론 경찰이 집계한 사망자 수는 활동가와 언론인들이 주장하는 수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었다.

사실 필리핀 사람들은 멜로위원회의 진상 조사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살해 위협에 놓인 대상인 필리핀 활동가들의 글과 구호에서 멜로위원회에 대한 언급이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멜로위원회가 "국내외 압력에 의해" 아로요 대통령이 설치했다고는 하지만, 실제 그것은 압력 때문이 아니라 아로요 대통령의 정치적 수완이었고 "압력을 가했다"는 이들(필리핀 국민들, 활동가들,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국내외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얻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5개월의 조사 끝에 하나도 남은 게 없는 멜로위원회의 소동을 보며 남은 것은 결국 필리핀 활동가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한숨뿐이다.

통제되지 않는 정치적 살해
▲ 2004년 하시엔다 루이시따에서 살해된 희생자들의 2주년 추모식에서 희생자인 아버지의 사진을 들고 있는 아이<출처: www.arkibongbayan.org>

필리핀에서는 일주일도 거르지 않고 누군가의 살해 혹은 납치 소식이 들려오고 발생 빈도수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사람들에게 필리핀의 상황을 이야기 할 때, 작년까지만 해도 필리핀에서 정치적 살해로 인한 사망자가 700여 명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800명이 넘었다고 이야기한다.

살해가 일어나는 지역도 이전에는 주로 눈에 잘 띄지 않는 농촌 지역과 산간 지역이었으나 작년부터는 수도 마닐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말 그대로 '필리핀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또한 가해의 책임에 대해서 군은 정부에 책임을 돌리고 정부는 군에 책임을 돌리지만, 사실 군과 정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살해는 지역별로, 무계획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일어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미 이 문제는 아로요 정부의 통제 능력 밖에서 지역의 토호 세력과 군부들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필리핀에서 오래 활동한 한 활동가는 "중앙 통치에 의해 계획적으로 발생했던 과거 마르코스 정권 시절의 정치적 살해와는 다르게 지금의 정치적 살해는 통제 불가능한 살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아로요 정권은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면서 필리핀 사회에서 누구라도 테러범으로 자의적으로 지목하고 해를 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쉽게 남을 해치고 자신의 가해를 정당화할 수 있다.

필리핀에서의 정치적 살해를 막기 위해

국내에서도 필리핀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살해에 반대하고 필리핀 정부에 문제를 해결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연대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몇몇 단체의 활동가들과 국내에 있는 필리핀 이주노동자 단체인 카사마코 활동가들, 그리고 때마침 한국을 찾았던 필리핀 활동가들이 모여 필리핀의 상황에 대한 첫 기자회견을 연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지금 나는 필리핀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살해에 반대하는 연대활동을 진행하고 있지만, 필리핀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한계'를 종종 절감한다. "어떻게 하면 필리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법적인 살해를 멈출 수 있을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머릿속에 떠올리며 고민해보지만, 가끔은 내가 필리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필리핀에서 태어났다면 우리도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지?"라는 동료의 말에 무거운 마음과 비겁한 안도감이 동시에 찾아든다.
▲ 2006년 9월 23일, 9.23 반전행동에서 진행된 캠페인
<출처: 경계를넘어 홈페이지(www.ifis.or.kr)>

멀리 떨어져 있긴 하지만, 난 필리핀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지 모르는 불법적인 살해 사건에 항의하는 일을 그만 두지 않을 것이다.

정당성 없는 권력만을 믿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에 대해, 민주주의의 근본도 모르는 국가에 대해, '테러와의 전쟁' 운운하며 정작 테러를 자행하는 권력자들에 대해 분노를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나와 필리핀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말도 다르고 좋아하는 음식도 다르지만, 불의에 저항하는 분노는 똑같다고 믿는다. 분노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연대가 언젠가는 이 정치적 살해를 멈출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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