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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여성이 모두 성매매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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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여성이 모두 성매매자라고요?"

탈북자 만명 시대의 그림자 그리고 희망 (上)

탈북자 윤영희 씨(가명)는 최근 '여성 탈북자의 누드 사진을 판매하는 사이트'에 관한 보도를 접하고 마음이 착잡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엄마, 성매매가 뭐야"라고 물어왔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북한을 떠나 중국을 떠도는 어린 여성들을 다룬 방송을 본 아들의 질문이었다. 탈북자들의 인권 실태를 알리기 위한 보도였지만 주로 부각된 것은 '성매매', '꽃제비' 등의 단어였다. 윤 씨는 "방송을 본 아들의 주눅든 표정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탈북자 만 명 시대, 지워야 할 '꽃제비'이미지"

윤 씨의 걱정은 무리가 아니다. '구걸하며 중국 대륙을 떠도는 꽃제비', '노예처럼 팔려다니며 성매매를 강요당하는 여성' 등으로 굳어진 탈북자의 이미지가 한국에 뿌리내린 그들의 삶에 질곡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윤 씨는 "(아들에게) 차라리 가난을 물려주더라도 '탈북자 이미지'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윤 씨는 "요즘 들어 탈북자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씩이나마 바뀌고 있다"며 밝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윤 씨가 소개한 사례는 개그맨 박성호 씨의 결혼식이다. 지난 17일 결혼한 박 씨가 주례를 부탁한 인물이 탈북자였던 것.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중앙TV에서 기자와 작가를 지낸 장해성(1996년 탈북, 현 국가안보통일정책연구소 연구위원) 씨가 주례를 섰다.

이제까지 탈북자가 대중 앞에 선 것은 주로 '헐벗고 굶주린 북한'의 참상을 증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증언자가 아닌 결혼을 축복하는 주례자로 대중 앞에 나서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탈북자들의 위상 변화를 알리는 청신호로 받아들일 만했다.

사실 이런 변화는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탈북자의 수가 이미 무시할 수 없는 규모에 달했기 때문이다. 통일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기준으로 국내 탈북자의 수가 9100명을 넘어섰다. '탈북자 만 명 시대'가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다.

탈북자는 3등시민…"초라한 체격, 벽에 키를 재보던 그 아이는 지금?"
▲ 탈북자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은 영화 '국경의 남쪽'의 한 장면. ⓒ프레시안

하지만 결혼식 주례를 선 장해성 씨의 경우만으로 국내 탈북자들의 처지에 대해 속단하는 것은 무리다. 대부분은 무관심과 냉대 속에 방치돼 있다. 탈북자 윤 씨는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1등 시민, 외국인 노동자는 2등 시민, 탈북자는 3등 시민"이라고 이야기했다. "북한만 아니면 다 천국"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국에 왔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

올해 탈북자들 사이에서 조용한 화제가 된 영화가 있다. 지난 5월 개봉한 영화 '국경의 남쪽'이 그것. 이 영화의 조감독 김철용 씨가 탈북자 출신이라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이 영화는 탈북자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 속의 주인공 선호(차승원 분)는 할아버지가 한국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과 함께 북한을 떠난다. 하지만 선호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차가운 냉대뿐이다. 무조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다. 탈북자들이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대목으로 꼽는 것은 선호가 교회에 나가 간증을 하고 돈을 받는 장면이다. 많은 탈북자들이 경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2003년 사고로 사망한 탈북 청소년 김철수(가명) 군도 이런 경험이 있다. 2001년 한국에 들어온 김 군은 롯데월드와 63빌딩이 무척 놀라왔다. 하지만 경탄은 잠시. 그가 살아 온 곳은 대체로 비슷하게 가난한 사회였다. 누구나 자존심이 강했다. 그런데 한국은 달랐다. 일부만 가난했고 그들은 종종 비굴해져야 했다. 김 군 역시 교회에 나가 북에서 못 먹고 못 입던 이야기, 살려주셔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해야 했다. 흰 봉투에 담긴 돈을 받을 때마다 비참해졌다.

이런 김 군을 더욱 참담하게 만든 것은 학교였다. 한국의 교육청은 19살인 그를 초등학교 교실에 집어넣었다. 입국 직후 적응 교육을 받던 하나원에서 실시한 학력평가 결과가 초등학교 6학년 수준이라고 나왔기 때문. 학교생활은 끔찍했다. 아직 사춘기도 지나지 않은 같은 반 아이들이 김 군보다 더 키도 크고 몸집도 튼실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학교 밖을 주로 떠돌았다. 학교에서 외톨이로 지내던 김 군을 받아준 것은 폭주족들이었다. 밤마다 오토바이를 몰고 밖으로 나가던 김 군은 2003년 1월 벽에 오토바이를 들이 받고 죽었다. 경찰은 "자살 같은 사고"라고 이야기했다. 김 군의 방에서는 한국에서의 외로운 생활에 대한 불만을 담은 낙서가 가득한 공책이 나왔다.

그리고 벽에는 키를 재는 눈금이 그려져 있었다. 김 군의 이야기를 기자에게 전한 탈북자 최 모 씨는 "김 군이 6살이나 어린 아이들보다 작은 자신의 키를 재보며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고 되물었다.

대학에 입학은 했지만….

탈북자 최 씨는 현재 고려대에 재학 중이다. 최 씨는 한국에 들어와서 중학교에 편입했다. 김 군과 달리 최 씨는 한국의 학교생활에 큰 무리 없이 적응했다. 북한에서도 우등생이었던 까닭에 한국 학교에서의 수업도 그다지 어렵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최 씨는 학창 시절 내내 탈북자라는 사실이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하며 지냈다.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들이 "최 씨의 아버지가 북한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왔다더라"며 수군거리는 것을 들은 뒤부터였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아주 친한 친구가 아니면 탈북자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릴 때 태국에서 자랐다고만 이야기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북한을 떠난 뒤 동남아를 거쳐서 한국에 들어왔으니까.

대학에서는 탈북자라는 이야기를 하기가 더 조심스럽다. 탈북자 특례입학으로 남들보다 편하게 명문대학에 입학했다는 시선이 불편해서다. '탈북자'라고 하면 괜히 정치적인 논쟁을 걸어올지 모른다는 부담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최 씨는 길에서 탈북자를 마주치면 모르는 척 지나간다. 최 씨는 "'척'보면 서로가 탈북자라는 것을 알아본다. 하지만 인사를 하는 경우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 한국에 들어오는데 성공한 탈북자들의 기념 촬영. 어떤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프레시안

하지만 큰 무리 없이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 최 씨는 탈북자 출신 대학생 중 드문 경우에 속한다. 지난해 대학에 입학한 탈북자는 총 430명이다. 그러나 이중 상당수가 한 해 만에 휴학하거나 자퇴했다. 실제로 2000년 이후 연세대에 입학한 43명 중 2명이 자퇴, 15명이 제적됐다. 휴학생도 10명에 이르러 재학생은 16명에 불과하다. 한국외대는 2002년 이후 입학한 52명 중 26명, 서강대는 2003년 이후 입학한 21명 중 8명이 제적, 자퇴, 휴학 등으로 학교를 떠났다.

이들이 학교를 떠난 일차적인 원인은 경제적 어려움이다. 탈북자 특별전형으로 입학할 경우 정부가 등록금은 전액 면제된다. 하지만 그 밖의 생활비와 책값을 감당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부분 기초생활수급대상자인 그들은 매달 30만 원 가량의 생활비를 지원받지만 아파트 임대비 10~15만 원과 관리비 5만 원을 내고 나면 식비도 부족하다. 게다가 한국 현실에 어둡고 아는 사람도 드물어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수업을 따라가는 것 역시 버겁기만 하다. 최 씨는 "한국 학생들의 상식 중 대부분이 탈북자들에게는 상식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문화적 배경과 교육 과정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또 북한 식량난이 본격화된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심각한 수업 결손 때문이기도 하다. 탈북자들은 한국의 특수목적고교와 유사한 제1고등중학교나 외국어학원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교에서 최근 10여 년 동안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게다가 북한을 떠나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수년간 유랑하는 과정에서의 학업 공백도 심각하다. 이런 수업 결손과 학업 공백에서 빚어진 학력 격차는 계속 탈북자들의 발목을 잡는다.

한국 대학생들의 자유분방한 문화를 접하며 겪는 문화적 충격을 극복하는 것도 부담이다. 2002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해 올해 졸업한 김철용 씨는 "여대생들이 남학생 앞에서 담배를 피는 모습이 처음에는 큰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강의시간에 떠들거나 자유롭게 질문을 하는 모습 역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어려움을 뚫고 간신히 졸업을 해도 문제는 남는다. 심각한 취업난이 그것. 대학생 최 씨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학생들도 취직을 못 하는데…"라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차라리 과거처럼 시험 성적만으로 취직이 되면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취업에서 자기소개서와 면접이 중요해진 게 영 불안하다는 것이다. 당장 자기소개서에 탈북자라는 말을 써야 할지부터가 고민이다.

정착금 뜯어가는 브로커는 줄었지만…여전히 비좁은 취업문

물론 이런 취업난은 대학생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들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호소하는 문제다. 공식적으로는 실업이 없는 사회에서 지내다 실업에 대한 불안이 일상화된 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정부는 현재 탈북자를 채용한 기업에 대해 급여의 50%까지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탈북자를 고용하는 기업은 드물다. 지난 12일 통일부와 노동부 공동 주최로 첫 탈북자 취업박람회가 열렸다. 하지만 당시 참가기업은 40곳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모두 중소기업. 대부분 탈북자를 채용할 경우 받게 될 정부 지원금 때문에 참가했다.

그래서 탈북자들은 소규모 장사나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는 경우가 많다. 2005년 1월부터 통일부는 새터민(탈북자) 정책을 '보호' 중심에서 '자립·자활' 중심의 정착지원으로 바꿨다. 자립의지를 갖춘 탈북자들에게 장기직업훈련, 자격증 취득, 장기취업 등을 지원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탈북자 수의 급증에 따른 재정 부담에서 비롯된 측면이 더 크다. 과거에는 1인당 최고 3600만 원의 자립지원금이 지급됐다. 하지만 2005년 이후 최고 1540만 원으로 줄었다.

자립지원금 외에 탈북자들은 입국 당시 1인 2000만 원, 2인 2900만 원, 3인 3300만 원, 4인 3700만 원씩의 기본 정착금을 받는다. 그리고 매달 10~15만 원의 임대료를 내는 영구임대아파트를 배정받는다. 탈북자들은 서울 노원구, 강서구, 양천구 등에 사는 경우가 많다. 이들 지역에 영구임대아파트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본 정착금 역시 2005년 이후 1000만 원 가량 줄었다. 과거에는 정착금을 노린 사기가 흔했다. 정착금을 분할 지급하지 않고 일괄 지급했기 때문이다. 탈북 브로커의 갈취도 심각했다. 2004년 조사에 따르면 탈북자의 83%가 브로커를 통해 들어왔고, 1인당 평균 400만 원 가량을 브로커에게 지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브로커가 임대아파트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탈북자가 나타나면 폭력을 휘두르며 돈을 뜯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흔히 '기획 탈북'이라 불린 과정이 대개 이런 식이었다. 브로커가 정착금의 일부를 받기로 하고 탈북을 돕는 것. 하지만 정착금 지원방식이 바뀌면서 이런 경우는 많이 줄었다.

마음을 터놓을 상대가 없다…그나마 기댈 곳은 교회뿐

탈북자들이 겪는 또 다른 어려움은 외로움이다. 2005년 〈시사저널〉조사에 따르면 탈북자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남한 사람은 평균 한 명을 조금 넘는 정도다. (2003년 이전 입국자는 1.38명, 2004년 이후 입국자는 1.24명, 2005년 입국자는 1.42명)

그렇다고 해서 탈북자들 간의 유대가 끈끈한 것도 아니다. 취재 중 만난 탈북자들은 대부분 다른 탈북자와 어울리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이야기했다. "탈북자 중 북한의 정보원이 섞여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혹시나 자신의 근황이 북한에 알려질 경우 남아 있는 가족과 친인척들이 불이익을 겪을까 두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탈북자 신분을 숨기고 조선족 행세를 하는 경우도 많다.
▲ 차를 타고 이동하는 탈북자 가족. 탈북자에 대한 보도가 종종 그들의 인권을 배려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프레시안

탈북자 천모 씨는 "사기 한번 당하고, 회사 한번 사직하고, 사업하다 한번 부도맞고, 사고 한번 당하고, 연인과 한번 헤어지고, 알코올 중독에 한번 빠지는" 여섯 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남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다는 농담이 탈북자 사회에서 회자된다고 전했다. 사기, 실연, 알코올 중독 등의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심한 외로움과 인간관계의 단절이다. 평소 외롭게 지낸 탓에 한번 가까워지면 무턱대고 정을 주다 상처를 입는다는 것.

그나마 탈북자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는 것은 종교다. 돈을 받기 위해 교회에서 마음에 없는 신앙 간증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상당수는 진심으로 신앙 생활을 한다. 연세대 의대 전우택 교수(정신의학)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조사 대상 탈북자의 64%가 매주 1회 이상의 종교 활동에 참가했다. 다른 연구에 따르면 탈북자의 종교 활동 참여율이 80%를 넘게 나타난 경우도 있다.

전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탈북자들이 가장 많이 믿는 종교는 개신교다. 한국에 들어오는 과정에서 개신교 단체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개신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탈북자에 대한 선교활동을 더 적극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탈북자들의 종교 활동에 대한 참가율은 한국 체류 기간에 비례해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 교수의 조사에 응한 탈북자 149명 가운데 개신교인의 수는 2001년 98명에서 2005년 91명으로 줄었다.

이는 많은 탈북자들에게 종교가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돕는 민간기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민사회의 노력이 절실…"통일시대를 준비해 나가는 과정"

이런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시민사회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탈북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종교인들의 박애심에 기댄 봉사 활동이나 정부의 정책적 지원만으로 해결하기 힘든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 대해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정병호 교수는 지난 5월 출간한 〈웰컴 투 코리아, 북조선 사람들의 남한살이〉라는 책에서 "서로 다른 근대화를 경험한 데서 오는 문화적 간극"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탈북자 문제를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런 문화적 간극을 좁히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정치권이 아닌 시민사회의 노력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탈북자 문제를 다룬 인류학, 심리학, 교육학, 의학, 경제학 분야의 논문을 모아 펴낸 이 책에서 정 교수는 "이런 사회문화적 차이와 역사적 배경을 무시한 채 탈북자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반공주의가 시들해진 이후 미국이 탈북자 인권 문제를 정치적 이슈로 만들었다. 그러나 동정심에 호소할 따름인 미국의 접근 방식은 자국 문화 중심주의에 따른 일방적인 주장을 낳기 쉬우며 그것은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충북대 심리학과 정진경 교수 등 다른 저자들의 생각도 비슷하다. 이들은 "북한이탈 주민의 남한 생활은 앞으로 남북한 사람들이 섞여 살게 되었을 때 서로 얼마나 잘 적응할 수 있을지를 예측하게 해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이자, 소규모 예비실험"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탈북자들이 겪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는 것은 통일 이후 남북한 사람들이 평화롭게 섞여 살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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