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엄혹하던 시절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이들이 모두 '민주투사'였던 것만은 아니다. 외항선원 신 씨, 농사꾼 송 씨, 옆집 포목점 차 사장 등 '데모'와는 전혀 관계없던 우리의 이웃들도 단지 6.25때 헤어져 얼굴도 못 본 아버지가 현재 북한 간부라는 이유로, 일본에 사는 형을 만나 용돈을 받았다는 이유로 수사·정보기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간첩'으로 둔갑돼 수십 년씩 옥살이를 했다.
이들은 잡혀 들어갈 때만 '간첩단 적발'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대서특필됐을 뿐 감옥에 있는 동안은 물론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법률적 진상규명 기회는커녕 사회적 관심도 받지 못한 채 과거의 아픈 기억을 오로지 개인이 지고서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어렵사리 용기를 내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도 재심 결정의 문턱을 넘기는 여전히 어렵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부끄러운 사법부의 과거사를 청산하겠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 실행안은 보이지 않는다.
14~15일 서울 올림픽파크텔에서 한국인권재단의 주최로 열린 '국가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와 피해자 권리구제 2차 워크숍'에서는 이러한 우리 '이웃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함께, 법원 재심을 통해 이들에 대한 사법적 진상규명 및 피해보상을 이루는 방안에 관한 논의가 이뤄졌다.
■ "일제시대보다 더 잔인", "판·검사, 경찰 인간으로 안봐": 1981년 '진도간첩단사건'에 연루돼 안기부에 끌려가 60여 일 넘게 모진 고문을 당했던 허현(71) 씨. 6.25 때 죽은 줄 알고 제사를 지내던 처남이 북한 공작원이고 일가가 처남으로부터 포섭을 당했다는 혐의였다. 허 씨는 안기부 남산분실에 끌려가 당했던 고문을 떠올리며 "하도 고문을 당하다보니 '내가 정말 간첩이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일제시대보다 더 잔인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처남의 가족은 물론 형제자매의 가족까지 모두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처조카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돼 28년간 옥살이를 했다.
1937년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귀국해 부산에서 선원을 하던 신귀영(70) 씨. 70년대 수출선을 타고 일본에 갔다가 헤어진 지 25년만에 형을 만났다. 이 일로 귀국 직후 정보과 형사로부터 수사도 받았으나 별 혐의 없이 풀려났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80년, 느닷없이 끌려가 '조총련 간부와 접선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받았고, 결국 '간첩'이 됐다. 신 씨는 "검사 앞에 가서 고문으로 작성한 진술을 거부하면 다시 형사들이 끌고가 고문을 했고, 1심 법정에서 한 진술도 나중에 기록을 보니 다 조작돼 있고, 내 최후진술은 사라졌다"며 "대한민국 검사, 판사, 경찰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98년 석방된 신 씨는 법원에 2차례나 재심청구를 했으나 대법원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역시 1944년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되자 귀국했던 차풍길 씨.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46년 다시 도일했다.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온 차 씨는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가 75~79년 사이에 세 번 일본에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이 무렵 사업을 시작해 동두천에서 양복점을 하다가 서울 쌍문동에서 포목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82년 안기부에 끌려갔다. 일본에서 조총련에 포섭돼 대남 공작원이 됐다는 혐의였다. 안기부에서 66일 동안 불법 감금된 채 고문을 당했다.
차 씨는 "안기부에서 고문당하는 동안 조사관이 신문을 보여줬다. 사북탄광 노사분규 기사를 보여주며 '아느냐?'고 물어 '신문에서 봤다'고 답하면 '노사관계 동향 파악'으로, 수출100억불 달성 기사 보여주며 '아느냐?'고 물어 '안다'고 답하면 '경제동향 파악'으로, '팀스피릿 훈련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 '2사단 앞에서 장사해서 본 적이 있다'고 답하면 '군사기밀 탐지'로 몰아 그렇게 나를 간첩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차 씨는 "고문당하다 검사를 만나 혐의를 부인하면, 검사가 '역시 빨갱이는 틀리구나'라며 얘기를 듣기는커녕 다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니들 가족 다 없애버린다'는 협박을 들었다"며 "혐의라도 있으면 분통이라도 터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5년 대우자동차에 근무하던 이준호(58) 씨. 그의 아버지와 숙부는 6.25 때 행방불명 됐다. 1972년 이 씨가 대학에 다니던 때 휴교령으로 강화도 고향에 잠시 머물 당시 숙부가 들러 30분 동안 머물다 갔다. 그러나 이것이 빌미가 돼 13년이 지난 뒤 옥인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뒤 7년간 옥살이를 했고, 석방된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검사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가슴 속의 증오심을 종교적 믿음으로 극복하고 살고 있다는 이 씨는 검사에게 불려가서 "호주머니에 두 개의 저울을 가지지 말라"는 성경 구절을 이야기 했다고 한다. 국가로부터 배신당한 이 씨는 자식들을 외국으로 유학 보낸 뒤 "돌아오지 말라"고 했다.
구미간첩단 사건에 연루됐던 강용주(45) 씨는 "'국가 권력'에 의한 고문·조작 피해자라고 불러선 안 된다"고 말했다. 강 씨는 "유신과 전두환 살인정권을 어떻게 국가라고 부르나, '파시스트 권력'에 의한 피해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 무심한 사회, 냉담한 법원: 이준호 씨는 최근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을 만나고서 "'이런 날도 오는가' 싶어 집사람과 엄청 울었다"고 한다. 그는 법적으로 '간첩 전과자'가 돼 당국의 감시 속에 살아야 했고,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 당했다. 결국 자식들을 '간첩의 자식'으로 키우지 않기 위해 유학을 보냈다. 억울함에도 숨죽여 살던 그는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 기회를 얻게 됐다.
진실화해위에서 진상규명이 되더라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돼 옥살이까지 한 이들에게는 사법적 명예회복 및 권리구제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법원은 이들에게 냉담하다.
신귀영 씨는 1995년 부산에서 인권활동을 하던 문재인 변호사를 만나 법원에 재심 청구를 했다. 부산지법과 부산고법에서 잇따라 재심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대법원에서는 "고문에 의해 허위 진술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재심 사유를 엄격하게 해석해 원심의 재심 결정을 뒤집었다. 신 씨는 그 이후 새로운 증거를 보강해 다시 재심청구를 해 1심에서 재심이 받아들여졌지만 2, 3심에서 다시 재심이 거절됐다.
다만 1954년 귀순한 뒤 83년 간첩혐의로 끌려가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함주명 씨의 경우 99년 이근안 씨로부터 고문 사실을 인정 받은 뒤 재심을 청구해 2003년 재심 결정을 받았고, 2005년 무죄 확정 판결을 이끌어 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도 재심이 결정돼 재심 심리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표면에 드러난 사건은 전체 고문조작 사건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 따르면 1951년부터 1987년까지 214건의 간첩사건이 있었고, 이 중 91건은 전두환 정권 시절에 일어난 일들이다. 송호창 변호사는 "재심 청구 대기 중인 사건이 100여 건에 이른다"고 말했다.
■ 법원 문턱 넘기 왜 이렇게 어렵나: 형사소송법은 재심사유를 증거가 위변조나 허위사실일 때, 판결의 증거가 된 재판이 확정재판에 의해 변경된 때,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됐을 때 등으로 제한하고 있다(형사소송법 420조). 과거 간첩사건 대부분은 증거를 자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불법체포·감금과 고문에 따른 허위 자백임을 밝히는 것이 재심 결정을 받아들이는 데에 관건이다.
함주명 씨의 경우 고문 경찰관이었던 이근안 씨가 혐의를 인정했기 때문에 재심과 무죄 확정 판결이 가능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간첩사건 피해자는 '고문'을 입증하기 어려워 재심 결정을 받아내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법원은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해 증명된 때"(형소법 420조 7호)로 재심 사유를 엄격하게 해석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건이 공소시효를 넘겼거나, 검찰이 과거 고문 사실을 재수사하는 데에 소극적이어서 과거 고문경찰관이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을 맡고 있는 이유정 변호사는 "당시 고문에 가담했던 경찰관들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들 앞에서는 고문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막상 재심 법정에서는 증인으로 출석해 고문 사실을 시인하지 않고 있다"며 "30년 전 피의자와 증인의 진술을 반박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 "재심 특별재판부 만들어야": 그래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의문사위를 통해 고문 증거 등이 확보됐기 때문에 재심 결정을 받아내는 데 유리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피해자가 직접 자신을 고문했던 경찰관들을 만나 법정에서 진술해줄 것을 부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에 많은 간첩사건 고문 피해자들이 자신의 사건의 실상이 '국정원 진실위'나 '진실화해위'에서 밝혀지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효과적으로 고문 증거를 수집할 수 있고, 법원에 재심을 청구할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은 유명한 정치사건, 즉 '민주투사'들에게 주목하느라 이러한 '일반인 간첩' 사건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최근 진실화해위에 이같은 간첩사건들이 접수돼 조사 개시 결정을 받은 사실이 위안이라면 위안일 수 있지만 이마저도 관련 법은 '확정 판결을 받은 사건을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중요한 것은 국가 폭력의 공범이었던 법원이나 검찰은 아예 아무런 노력도 하고 있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검찰은 과거사 청산을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고 있지 않고, 과거사 청산을 약속했던 법원도 1년이 넘도록 아직 가시적인 실행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는 법원의 과거사 청산 방식은 재심에 의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법원은 아직까지 재심 결정에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고, 각 법원마다 기준 적용도 천차만별이어서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 이에 이유정 변호사는 "재심 특별재판부를 만들어 재심 사건에 일관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법원이 하나 잘못했으면 검찰은 열이다": 한인섭 서울대 교수(법학)는 "사법부가 언제까지 과거의 잘못 때문에 현재의 사법까지 매도당하는 현실을 그대로 둘 것인가"라며 과거사 청산 작업을 촉구했다. 한 교수는 특히 검찰의 태도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한 교수는 "법원의 잘못이 하나라면 검찰의 잘못은 열을 넘는다"며 "과거와의 아픈 대면과 치유의 노력에 검찰이 슬며시 비껴서는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이어 "법관들에 비해 검사들은 자신들의 과거 잘못을 반성한 적이 없다"며 "경찰도 남영동 대공분실을 인권기념관으로 새단장하고 있는데, 검찰은 말도 없고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한 교수는 "검찰은 직접적 인권침해를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지만, 검찰은 수사기관의 인권침해를 감시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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