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올인'을 문제 삼지만 오히려 노 대통령이 정치를 회피해서 문제라고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주장한다.
한국 정치의 '종속 변수'에 불과한 지역주의를 "대통령직을 걸고라도 타파해야 한다"며 근본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노 대통령이 우리 사회의 중심적인 갈등인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현실 인식은 잘못된 처방으로 이어지고 최악의 경우 재난적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고 최 교수는 현 '연정 정국'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권력구조가 아니라 정당이 문제"**
최 교수는 자신의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2년, 후마니타스)의 개정판을 내면서 원고지 160매 분량의 긴 개정판 후기를 덧붙여 최근 한국정치 상황에 대해 분석했다. 최근의 정치상황에 대해 언급을 삼가 온 그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문제제기인 셈이다.
최 교수가 보기에 현대 민주정치의 핵심은 '정당'이다. 그는 "민주정치란 정당을 중심적 메커니즘으로 해 사회의 갈등과 균열을 폭넓게 표출하고 대표하는 방법을 통해 다수의 힘을 동원하고,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정책적 대안을 실현하고, 그 실현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지지를 동원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적 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는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가 민중적일 수 있는 최소요건은 정당정부(party government)를 만드는 일"이라며 "노동당 정부, 보수당 정부, 민주당 정부, 공화당 정부, 사민당 정부라고 하듯 우리도 대통령 개인의 정부만이 아닌 정당의 정부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차원에서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정치 주체로서의 위상을 짓밟고, 스스로의 '개혁 정체성'을 부인하며, 지난 대선 결과 자신에게 위임된 책임을 방기하는,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은 '정치 회피'라고 할 수 있다. "특정의 정당과 후보가 선거경쟁에서 다수를 획득해 정부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투표자들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요구했던 이슈들을 보다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정책프로그램으로 만들고, 이를 집행하라는 위임(mandate)을 부여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지율 29%'의 노무현 정부가 처한 현재의 어려움은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크다. 지난 2004년 4.15 총선을 통해 의석 과반을 점하고도 선거를 통해 확인된 민의를 정책에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정국 안정을 꾀한다는 이유로 보수세력으로 외연을 넓히려고 애썼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은 지지 세력의 분열이었고, 4.30 재보선 등을 거쳐 노 대통령이 문제라고 지적한 '약체 정부'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 외부에서 작용한 '힘'은 크지 않았다.
***"사회경제적 갈등 회피하고자 '지역주의'를 핵심 의제로"**
최 교수는 "노 대통령 스스로가 정치의 경계를 좁히고 탈정치화를 앞장서 실천하면서 이를 민주적 개혁이라고 주장해 왔다"며 "3김정치를 극복한 탈권위적 리더십이나, 정치는 당에 맡기고 정책은 책임총리에게 맡기고 대통령은 국가 전체적 과제에 집중하겠다는 등의 논리나 당정분리, 원내정당화, 정책정당화 등 현 정부에 들어와 자주 사용되는 개념들은 정치 논리를 부정적으로 보는 반(反)정치의 정치관을 집약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역주의를 한국 정치의 중심적 갈등축으로 보는 것도 노 대통령의 '반 정치의 정치관'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정치를 이렇게 이해하고 정의하는 것은 현실정치를 아무런 합리적 대의 없이 지역감정이 난무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고, 적나의 당파적 이익이 충돌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정치개혁의 최대 과제는 곧 지역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를 타파하는 것이 되고, 지역주의에 책임이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정치가와 집단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추궁하게 된다. 그 결과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이해는 더욱 약화되고 여론의 호응을 동원하기 위한 공허한 제안들의 다툼이 이어지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런 지역주의의 폐해를 들어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이라는 국민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제안을 내놓았었다.
또 종속 변수인 지역주의를 중심갈등으로 보는 것은 앞서 지적한 노 대통령의 '정치 회피'의 원인이자 결과다. 사회경제적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다른 이슈를 전면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고, 또 엉뚱한 문제에 집착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문제에 집중하지 못한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경우 지역주의를 통해 정치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이념이나 이데올로기 수준에 가깝다"며 "오늘의 시점에서 지역문제가 정권의 운명을 걸고 추구해야 할 최우선의 과제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진 정치적 알리바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누가 지역주의자인가"**
노 대통령은 이처럼 한국 정치의 문제를 지역주의 문제로 환원시키면서도 정작 그 해결에 대해선 아주 단순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선거구제 개편이 그것이다. 그러나 최 교수는 "지역갈등의 극복을 정치개혁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선거제도를 바꿀 경우 기존 거대정당들은 규모의 이점을 나눠 갖게 되고, 보수독점적 양당체제는 강화되며, 오히려 약화되고 있는 지역갈등구조를 다시 불러들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지역주의 차원에서 노무현 정부가 핵심 정책으로 내세운 균형발전정책도 매우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지역주의 문제의 해결도 민주주의의 발전도, 한국의 정당체제가 갈등의 사회화 내지 전국화에 그 기반을 둘 때 가능하다. 지역개발정책이든, 혁신도시 건설이나 기업도시 건설, 지역균형발전정책이든 지금까지 추진됐던 정책들은 정당간에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내기보다, 지방자치정부와 지방이익들간의 새로운 경쟁과 갈등을 유발하는 데 기여했다. 다시 말해 갈등을 국지화시키는 효과를 가졌던 것이다.
이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정치적 차이와 갈등은 정당들의 계층적.이념적 지지기반의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정부여당의 정책이기 때문에 혹은 이에 반대하는 야당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측면이 크다. 예산을 통제할 수 있는 정부여당은 지역을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진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야당이 나중에 집권하더라도 유사한 지역개발정책을 추진하려 할 것이다.
결국 지역개발정책을 둘러싼 정치란 국가의 재정지출을 둘러싼 정당정치인, 기업, 지방자치정부, 이 정책으로 혜택을 보는 지역의 수혜자들 사이의 이익연합의 정치가 주 내용일 수밖에 없다. 정책수행의 파트너는 일차적으로 기업이며, 그것도 재벌대기업이다."
***"삼성공화국, 한국 민주주의 변형 보여주는 패러독스"**
이처럼 특정 정책에 있어 정책 수행의 일차적 파트너가 재벌이 되고 있는 현실은 '삼성공화국'이라는 상징적 말에서도 확인된다. 이 역시 '재벌 개혁 정책의 후퇴'로서 노 대통령의 '정치 회피'의 결과다.
최 교수는 "출범 초기 개혁적일 것으로 기대됐던 민주정부가 '슈퍼재벌'과 연대하는 모습만큼 한국민주주의의 변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패러독스는 없을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는 현 정부 정책 노선에 대해 "권위주의 국가주도형 발전모델, 즉 '박정희식 모델'의 연장선상에 신자유주의가 접합된 변형"이라고 평가했다.
최 교수는 그러면서 현 정부가 일방적인 신자유주의적 사회정책에 대해 '거부할 수 없는 전 세계적 흐름'으로 설명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이념과 논리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왔지만 나라마다 수용되는 형태와 내용은 크게 다르고 한 나라 안에서도 어떤 성격의 정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며 결국 현 정부의 정책적 의지와 지향점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민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
사실 개정판을 통해 확인되는 최 교수의 한국 정치에 대한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오히려 비관적이다.
"필자가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민주정부들이 이들 문제를 개혁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대해 비판과 실망을 말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주정부가 할 수 있는 가능의 영역이 넓게 열려 있으며 그 영역을 개척해 가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의 엄중함은 이러한 배면에 깔린 정조에 훨씬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민주화 이후 여러 가지 제약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지탱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우리사회가 이를 위한 잠재력과 자원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그 자원 자체가 고갈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결코 낙관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최 교수는 결국 문제 해결의 열쇠는 '민주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민주주의를 희구하고 투쟁했던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실망하고, 이를 비판하는 '소극적 시민'으로 머물 것이 아니라, 스스로 민주주의를 만드는 과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적극적 시민'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며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투쟁과 민주주의를 만드는 과업은 다른 성격의 문제라는 전제 위에서, 정부가 된 민주주의가 강한 사회적 기반을 가지면서 유능하게 작동할 수 있는 조건들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우리는 아직도 민주주의를 말해야 하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실질적인 내용을 갖고 발전할 수 있는 경로를 찾는 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며 "여전히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과제를 안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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