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다를 거 있나요, 이제까지 해오던 대로 하면 되죠."
지난 25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새 회장으로 선출된 최병모 변호사(53. 법무법인 덕수)의 첫 마디 대답이다. 익히 들어왔던 그의 겸손한 성품에 걸맞게 너무도 무덤덤하다.
하지만 신임 회장이 된 자신의 본분을 새삼 깨달은 듯 "중책을 맡아 어깨가 무겁다"는 교과서적인(?) 답변을 덧붙였다. 지난 29일 오후 서울 강남의 법무법인 덕수 사무실에서 최 변호사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 88년 5월, 70년대 이후 시국 공안사건 변론을 도맡아 오던 개혁성향 인권변호사들이 모여 설립한 민변은 그간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해왔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무너지고 YS, DJ 정권기를 거치면서 화제의 중심에서 한발 비껴선 듯 활동폭이 위축된 감도 없지 않다. 현재 회원은 3백51명으로 전체 변호사의 7% 가량이다.
그런데 99년 '옷로비 의혹사건' 특별검사로 활동하며 '로비가 없었다'는 검찰 수사 결과를 뒤집고 권력층의 사건 축소 은폐 사실을 밝혀낸 최병모 변호사가 민변 신임 회장에 취임했다. 민변의 향후 활동에 새삼 새로운 기대가 모아진다. 최 변호사 본인도 지난 86년 민변의 전신인 '정법회' 창립 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해 온 까닭에 민변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별로 달라질 건 없다"고 하지만 최 변호사는 김인회 변호사를 상근 사무차장으로 선임했다. 민변이 만들어진 이후 처음으로 상근 변호사가 생김에 따라 활동이 상당히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최 변호사는 또 "국가보안법, 국가정보원법 등 불합리한 법제도를 개혁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겠다"고 말했다.
***"비민주적 법제도 개혁에 집중"**
"지난 10년간 두 번의 민간정권을 거치면서 사회가 많이 민주화됐지만 사법제도의 비민주적 요소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이나 국정원법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지금 국정원이 공안사건에 대한 수사권과 국내정보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는데 미국 CIA도 이런 권한은 없습니다. 최근 최종길 교수 사건이나 수지김 사건이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에서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국정원에서 수사권과 정보관할권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또 형사소송법상에 재정신청제도도 부활돼야 합니다. 현행 제도하에서 검사는 수사·소추·형 집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재정신청제도는 검찰의 기소권 전횡을 통제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유신 전에는 모든 범죄에 대한 재정신청제도가 있었는데 유신 때 공무원 범죄만 제외하고 없앴습니다.
이런 비민주적 법률을 개정하기 위해 민변 내에 특별위원회나 소위원회를 만들 생각입니다."
민변은 설립 초기에는 시국사건 변론이 주업무였다. 90년대 중반부터 노동·여성·환경·국제연대 등 각 분야별로 소위원회를 만들어 연구작업 및 다른 사회단체와의 연대 활동을 벌였다. 작년에는 한미행정협정(SOFA) 개정, 미군기지 반환 문제, 미군범죄 등을 다루는 미군문제위원회도 만들었다. 최 변호사는 변호사들의 모임인 만큼 이제까지의 활동에 비민주적 법제도를 개혁하는 활동을 추가로 벌이겠다는 구상이다.
***"검찰 인사위원회·감시위원회 제도 도입해야"**
'옷로비 특검'을 맡아 권력형 비리 사건을 직접 담당했던 최 변호사는 최근 게이트 사건의 검찰 수사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최 변호사는 이명재 검찰에 대해서는 "섣불리 평가하기엔 이르다"면서 "검찰 수사를 지켜봐야 한다"고 말을 아꼈다.
그러나 검찰 수사의 공정성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선 근본적인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검찰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검찰권을 견제할 제도가 전무한 상태에서는 '권력의 시녀'라는 식의 수사 공정성을 둘러싼 시비가 불가피하다는 것.
최 변호사는 검찰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로 인사위원회와 인사청문회 제도의 도입을 주장했다.
"현재 대통령이 검찰총장이나 법무부 장관의 임명권을 갖고 있습니다. 인사권을 쥐고 있는 한 권력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독자적인 인사위원회에서 검찰총장이나 법무부 장관을 선출하고 대통령은 형식적인 임명권만 갖도록 해야 합니다. 또 검찰총장이나 법무부 장관에 대한 인사청문회도 실시해야 합니다."
최 변호사는 또 검찰권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 '검찰감시위원회'제도 도입을 주장했다.
"모든 권력은 감시하고 견제하지 않으면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검찰은 독재정권 하에서 파쇼화된 채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비단 정치권과의 유착에만 관련된 문제가 아닙니다. 일반 형사 사건의 경우에도 검찰의 일방적인 전횡을 견제할 제도가 없어 무고한 시민이 피해를 보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따라서 일반 시민과 법률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검찰감시위원회 제도 등 검찰권을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도입돼야 합니다."
최 변호사는 "권력형 비리를 근절하기 위해선 검찰이 제대로 서는 것만큼 언론도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 변호사는 "검찰과 언론이 제 기능을 한다면 특검은 대통령 본인의 비리에 한해서만 필요할 것"이라면서 "법무부 장관이나 검찰총장 부인 비리 정도는 언론이 제 기능을 하면 감시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양대 선거에서 중립 지킬 것"**
최 변호사는 지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결성된 '노무현을 지지하는 변호사 모임'(노변모) 공동대표였다. 그러나 민변 대표가 된 직후 노변모 대표를 그만뒀다. 최 변호사는 6.13 지방선거와 12월 대통령 선거와 관련, "중립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노변모 대표를 맡게된 건 노무현 후보가 지난 86년 민변 전신인 '정법회' 회원으로 함께 활동하는 등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변이 선거와 관련해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진 않겠지만 부정선거 방지나 투표참여운동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할 생각입니다."
전남 강진 출신인 최 변호사는 지난 74년 사시 16회에 합격한 후 청주·인천 지방법원 판사를 지내다 86년 변호사 개업을 했다. 청주지법 판사시절 그는 '증거인멸과 도주의 위험이 없는 자'에 대한 '직권보석'을 1년동안 무려 28건이나 내려 '보석의 왕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당시 그를 제외한 전국의 판사가 내린 직권보석 결정은 단 2건. 최 변호사의 법률가로서 소신과 품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화다.
변호사로 개업하고도 최 변호사는 '법조계의 먹이사슬'에 염증을 느껴 91년 서울을 떠나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도로 내려갔다. 본인의 말로는 "서울에 사는 게 복잡해 싫고, 스킨 스쿠버를 좋아해서 제주도로 갔다"고 하지만 의도적으로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를 선택한 것은 변호사로서는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지난 99년 최 변호사가 소속된 법무법인 덕수의 일손이 부족해 다시 서울로 복귀했고, 복귀하자마자 '옷로비 특검'을 맡았다.
최 변호사는 환경운동연합 창립 멤버이며 제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을 지냈고 지난해 한국여성단체연합의 '호주제 폐지 홍보대사'를 맡는 등 시민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해 왔다. 또 지난 18일 광주항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5.18 시민법정'의 재판장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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