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내 다양한 이익집단들의 활발한 정치참여 활동을 지켜본 필자로서는 우리나라 교총과 의협의 정치참여 선언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개인과 이익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해가 걸린 주요 정책이나 법안들을 지지 내지 반대하고 부단히 홍보하는 것이 필요하고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 또는 반대하는 것도 헌법에 보장된 주요 기본권의 행사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계기로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과 이익 집단들이 합법이건 불법이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떼를 쓰는 듯한 권리주장 행위를 지양하고 법과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적극적이고 지혜롭게 자신들의 권익 신장을 위한 정치참여 행위, 의사표시 행위를 하여 선진 사회의 성숙한 갈등 해소문화, 협상문화가 자리잡게 되기를 기대한다.
의협과 교총은 우리 사회가 새롭게 겪고 있는 격렬하고 중대한 갈등과 분쟁 상황의 주역들이다.
그들 각각이 자신의 권익 옹호 및 증진을 위해 전개해 나가는 여러 캠페인 과정에서 직접적,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여러 이익집단들(약사회, 환자 및 의료행위 대상으로서의 국민들, 학부모들, 사립학교들, 전교조 등)과 개혁을 추진하려는 정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관료 및 공무원 등과의 이해관계 및 첨예한 대립 가능성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우리 국민이 어떻게 여론을 형성해서 그 방향을 긍정적이고 지혜로운 윈-윈 타협안으로 가도록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인가.
그 결과에 따라 우리 사회는 심각한 혼란을 맞을 수도 있지만 갈등 분쟁을 계기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보다 나은 의료정책, 교육정책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긍정적 갈등해소와 분쟁해결에 따라 우리사회에 창조적 시너지가 작동할 수 있도록 하기위해 미국사회의 경험과 그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갈등해소에 대한 우리의 기대치를 낮추자**
1980년대 들어 미국에서 시작된 학문으로서의 협상학은 갈등해소(conflict resolution), 분규해소(dispute resolution)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실은 해소(resolution)가 아닌 타협(settlement)이란 개념을 실질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해소를 지향하되 현실적으로 타협만이라도 이루어 현재의 갈등 분규 상황을 안정시키고 이러한 노력을 계속해 작은 성공 즉 원만한 타협을 반복함으로써 질의 변화 즉 갈등의 해소까지도 가능케 해보자는 실용적 목적이 신생학문으로서의 협상학의 존재근거, 발전 근거를 이루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관계를 보자. 만약 갈등 해소를 목적으로 한다면 평화의 길은 현실적으로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기대치를 낮춰 갈등 타협을 목적으로 한다면 많은 가능성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우선 무기부터 내려놓자. 즉 휴전이나 정전부터 가능케 해보자. 이 정도는 아무리 철천지 원수지간이라 해도 평화에 대한 본능적 요구가 있는 한, 또 당시 충분히 전쟁의 피로감에 양측이 지쳐있었다면 천재적 협상 노력이 없다 해도 실현가능할 것이다.
그후 실용적이면서도 작은 목표를 가지고 부단히 타협을 이루어 내 작은 성공들이 연이어 일어난다면 확전의 가능성보다는 궁극적 평화관계 정립이라는 방향으로 큰 흐름이 확립될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다.
인간의 원초적 한계 때문에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지극히 어렵고 궁극적 평화, 갈등 해소는 이루지 못하여도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고 작은 성공, 즉 실용적 타협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 대규모 전투, 전쟁 등의 참화와 같은 최악의 시나리오는 최소한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혹 아는가? 이러한 작은 성공들의 분위기 속에서 두 민족간 인간적 이해와 공통의 이익 추구의 시너지가 촉발될 수 있다면 용서와 관용 속에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보다 항구적 평화로 이루어질지.
미국사회의 갈등구조 중 지난 20여년간 가장 심각한 것 중 하나는 낙태반대론자와 낙태찬성론자 간의 대립이다.
둘 다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신념에 바탕을 둔 강력한 그룹들이고 미국 사회를 반으로 쪼갤 만큼 지지세력도 크고 다양하다. 연방정부와 주정부에서의 각종 법안통과와 국회의원 선거, 판검사의 임명이나 선거, 주요 공직자 임명, 예산 배정 등 각종 사안에서 양측은 한치의 양보없이 일진일퇴하고 있다.
이들 간의 신념에 찬 갈등관계에서 해소란 상상도 할 수 없다. 종종 어떤 사안에서 한 그룹이 밀릴때는 그 그룹의 과격파 중 몇몇은 낙태시술소 습격, 방화, 살인같은 극렬 행위도 서슴지 않고 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적 상황 외에는, 양측 모두 게임의 룰에 따라 총력을 기울여 사안 사안에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고 이 노력이 실패해서 어떤 사안에서 졌다 하더라도 과격한 행위를 하지 않고 이를 승복하는 선진적 자세를 보여준다.
물론 그들은 곧바로 다른 합법적 절차에 따라 그날의 패배를 설욕 또는 만회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갈등해소에서 갈등 타협으로 기대치를 낮추었을 때 개인이나 이익 집단은 과격 행위를 자제할 것이고 우월적 오만도 삼갈 것이며 비로소 협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협상을 통한 상생의 구조를 부단히 추구할 인내와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계몽적 자기이익 추구를 인정해주자**
필자는 우리 신문이나 방송 매체에서 ‘집단이기주의’라는 표현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러한 표현은 국민들에게 이익집단들의 주장중 타당하고 합리적인 내용까지도 무조건 불신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이러한 대접을 받는 집단들이 과격한 행동이나 무리한 요구를 하게끔 만드는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다.
적당히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밑에 깔고 있는 ‘집단이기주의’라는 표현은 자제하였으면 한다.
그 대신 우리 모두가 성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상황에서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남을 비판할 때는 신이나 성자의 경지에까지 올라가 그 수준에서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막상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 되면 더 과격히 자기주장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각 구성원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합법적이고 합리적 테두리 안에서 충실히 추구하는 행위에 대해서 그 정당성을 인정해 주고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선진적 자기이익 추구라 표현할 수 있는 ‘계몽적 자기이익 추구’ 개념은 ‘갈등 당사자들이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행동하되 남을 도우려 하지도 말고 또 남이 목표를 달성하려는 노력에 방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갈등 당사자들은 상대방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서로 거래함으로써 쌍방이 보다 잘 될 수 있다는 인식이다.
이러한 틀에서 갈등구조 당사자는 자신의 이익을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충실히 추구하되 동시에 갈등 구조 상대방의 이익 추구권을 인정하고 방해하지 않으며 필요시 거래를 한다면 갈등구조 당사자들 모두 다 잘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상황인식의 전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선진적 이익추구란 개인주의만도 아니고 상호 협조주의만도 아닌, 두 자세의 적절한 혼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의협과 교총이 이번 정치참여 선언을 하면서 이러한 선진적 자기이익 추구를 실행에 옮긴다면 우리사회가 지난 3년간 겪어야 했던 극단적 대립이나 감정적 대응 및 이로 인해 빚어진 불필요한 고통, 불편, 경제적 손실을 예방할 수 있고 시행착오 과정을 거치면서도 점차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는 정치참여와 이익추구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투쟁적 자기기익 추구는 사회적 신뢰관계에 돌이키기 힘든 후유증을 남긴다**
선진적 자기이익 추구과정에서 이익집단은 협조적 우호적 접근법과 경쟁적 투쟁적 접근법을 택할 수 있는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할 때 다음을 유의해야 한다.
우호적 접근법에서 투쟁적 접근법으로 방향전환하기는 쉽다. 그러나 한번 투쟁적 접근법을 택해 강경한 언어나 구호, 과격한 조치 등을 하게 되면 ‘인간적 친밀감, 신뢰관계’에 치명적 상처를 주게돼 다시 우호적 접근법으로 환원하기는 무척 어렵다는 점이다.
따라서 투쟁적 접근법을 선택할 때는 보다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상대방에게 ‘주어진 쟁점의 특성상 경쟁적, 투쟁적 접근법을 써야만 할 상황임을 이해해 달라’는 설명과 요청을 하고 당사자간의 본질적 관계가 우호적 접근법에서 일탈하지 않을 것이란 점을 강조, 부각시켜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이익집단으로서 겁없이 투쟁적 접근을 선택하고 상대방의 인격을 모욕하고 상처를 주는 언행을 ‘이익추구’의 명분아래 주저없이 저질렀던 점을 심각히 재고해야 한다. 한번 훼손된 신뢰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는 ‘미끌어지기 쉬운 비탈길’을 힘들게 올라가야한다.
일방적 양보도 수차례 해야하고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상대방의 마음에 지금의 양보가 진심에서 나온 것임을 심어주어야 한다.
이렇게까지 노력하여 우호적 협상분위기를 회복하려하는 이유는 ‘좋은 업무관계’는 장기적으로 볼 때 투쟁적 접근법으로 얻어질 수 있는 이익보다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의협과 교총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집단들이며 이들의 성공적 정치참여는 우리사회의 선진화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의협과 교총은 이제 그들의 이익을 공개적으로 합법과 합리, 그리고 지혜의 테두리에서 추구해야 할 것며 국민의 신뢰와 존경속에서 더 많은 것을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고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이익집단, 즉 환자, 학부모, 국민들도 똑같이 법이 부여한 테두리에서 자기 이익을 방해받지 않고 추구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타협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에서 걸맞는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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