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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엉터리' 공부, 정신 차리고 뒤집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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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엉터리' 공부, 정신 차리고 뒤집어라!

[프레시안 books] <장석준의 적록서재>

<장석준의 적록서재>(장석준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는 서평집이다. 가뜩이나 서평이라는 글쓰기를 어렵게 여겨 피하고 싶어 하는 나로서는 서평집에 대한 서평을 써야 하는 더욱 어려운 과제를 안은 셈이다. 메타 이론이나 메타 비평은 들어보았어도 메타 서평이라니. 여기 실린 책들에 대해 장석준 진보신당 부대표가 서평을 해놓은 것에 내가 또 끼어들어서, 그 책에 대한 서평에 대한 서평을 한다는 것은 우선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 글은 다른 각도에서 장석준의 책이 갖는 의미를 평해보도록 하겠다. 한국의 진보 진영 혹은 좌파 진영의 지성사에서 이 책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1.
▲ <장석준의 적록서재>(장석준 지음, 뿌리와이파리 펴냄). ⓒ뿌리와이파리
해방과 분단 이후의 대한민국 지성사 연구는 절실히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과연 가능할까 하는 회의가 생길 때도 많다. 지성사를 서술하려면 시간적으로 연속된 지적 담론의 흐름이 있어야 하는데, 지난 반세기 동안 그런 것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이 의심은 특히 한국의 좌파 진영에 절실한 것이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좌파는 19세기 말, 최소한 1930년대가 되면 그 나라 고유의 현실적 맥락과 문제의식에 따라 고유의 담론틀과 문제 설정을 만들어 낸다. 한국의 진보 및 좌파 진영의 경우 아직까지도 한국적 토양에서 누구나 이해하고 받아들일만한 담론틀과 문제 설정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몇 십년간의 담론의 역사는 결국 이런저런 외국 좌파 이론의 수입 및 수용 과정이 대종을 이루는데, 여기에서 심각한, 거의 치부(恥部)라고 할 수밖에 없는 당혹스런 모습이 나타난다. 70년대 이후 수입된 이론과 담론을 시간적으로 나열해 볼 때, 도대체 무슨 맥락에서 무슨 이해를 가지고 무슨 목적에서 이런 이론과 담론들이 수입되고 또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지를 도저히 읽어낼 길이 없다는 것이다.

70년대 지식 담론에서는 장 폴 사르트르가 회자되었고 마르쿠제의 저작들이 번역되었다. 그런데 스탈린을 감싸고돌았던 극렬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사르트르의 면모는 간 데 없이 그저 '실존주의'의 허울을 쓰고 하이데거 심지어 마르탱 등과 같은 우파들과 뒤섞여 수입되었다. 좌파 프로이트 정신분석학과 산업 사회의 소외와 같은 논의는 없이 달랑 책만 번역된 마르쿠제는 한국 지식인들의 댄디즘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고,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을 역설한 "힐링" 전도사처럼 알려졌었다.

그러다가 8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이 되면 프란츠 파농에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마구 번역되어 들어왔지만, 아프리카 탈식민주의 지역의 실상에 대해서는 아무 소개가 없었고, 파시즘을 전후한 유럽의 정신적 위기에 대한 소개도 없었다. 그러다 80년대 중반이 되면 마르크스주의를 간접적으로 다룬 (마르크스, 엥겔스와 레닌 등의 "원전"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일본 책들이 무더기로 번역되었고, 서구의 2차 문헌들도 마구잡이로 번역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80년대 후반이 되면 "원전"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소련과 동독의 조악한 관제 철학 및 경제학 교과서들이 좌파 지식계를 완전히 평정해 버린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90년대의 상황은 더욱 혼란스럽다. 프랑스 현대 철학과 닿아 있는 탈구조주의에 가지가지 포스트주의 담론, 영미 세계에서 생겨난 각종 신좌파 문헌과 그밖에 쉽게 계보를 가리기 힘든 가지가지 이론과 담론들이 정신없이 쏟아져 나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각각의 책을 번역하고 소개한 사람들은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러한 역사는 도저히 내재적인 고민의 흐름이 있었다고 정당화하기 힘들다. 무엇보다도 이 흐름이 거의 완전히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라는 점이 그 근거이다. 사르트르도 마르쿠제도 기존의 정통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어떻게 현실에서 한계에 부닥치고 심지어 파산하였는지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그 주장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는 이들이다. 이는 2차 대전 이후 거의 모든 서구 좌파 담론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으로서, 이들의 저작은 그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힘겨운 분투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의 저작을 읽고 음미한 끝에 오히려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매혹되어 "원전"을 무슨 성경처럼 여기며 읽게 되었고 게다가 그 조악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공산당 관료들의 교과서에서 마침내 구원을 얻었다? 심지어 일부는 그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경우인 북한 공산당의 김일성 주체사상에서 "사상의 확신"을 얻었다? 사르트르와 마르쿠제로 시작된 지적인 편력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거쳐 "혁명적 수령관"에서 해답을 찾았다? 이를 놓고 지성사를 서술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독한 코미디이든가 지독한 부조리극이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니, 희비극 부조리극이라는 희대의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

이 드라마의 성격이 무엇이건, 90년대가 되어 소련이 무너지자 극장 자체가 붕괴되고 말았다.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이 드라마를 상연하던 한국 좌파들은 드디어 90년대의 포스트주의 담론이라는 세계 지성사의 흐름의 동시대성으로 "백 투 더 퓨처" 해버리게 되었고, "세계정신"의 광명 속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혼란은 지금까지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야속한 홍채(紅彩)는 도무지 말을 듣지 않으며 좁아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20년째 눈을 비비며 그 광명 속에서 헤매고 있으며, 걸리는 대로 이것저것 읽고 말하고 소비하고 있다.

2.
교과서 같은 소리이기는 하지만, 외국의 이론 및 담론을 수입할 때에는 몇 가지 작업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그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중심 저작을 번역할 것. 둘째, 그 문제의식이 나오게 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질 것. 셋째, 그 흐름이 어떠한 지적인 또 실천적인 전통에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지성사의 연구, 최소한 알찬 2차 서적이 함께 나올 것. 넷째, 그것이 한국적 현실과 어떤 맥락에서 접목되는지에 대한 비평이 이루어질 것. 만약 이러한 기본적인 지적 성실성만 어느 정도 지켜졌었더라도, 지구화로 접어드는 90년대의 세계 한복판에서 동독 소련 교과서를 수입하는 창피한 사태는 피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러한 기본적 매뉴얼이 준수되지 않았을까?

혹자는 냉전과 반공주의로 인한 한국 사회의 지적 불구성에 탓을 돌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좌파 지식인들의 내부에서 찾고자 한다. 이는 책 몇 권을 업고서 세상에 대해 자신의 지적 도덕적 우위를 선포하고자 하는 옛날 시대 지식인들의 못된 버릇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확실한 "이름" 그것도 세계 어디에서나 알아주는 유명한 "빅 네임"을 가진 이론가 사상가가 하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권위에 빌어서 세상 전체에 대해, 모든 문제에 대해 그야말로 가열찬 비판을 행한다.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하는 이들은 무식한 자들로 치부하면 되고,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들은 지적으로 저열한 혹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벗지 못한 이들로 치부하면 된다.

이렇게만 하면 적어도 지식인 행세가 가능하며, 독자적인 집단을 형성하면 담론 진영 안에서 일정한 힘을 행사할 수도 있으며, 9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넓어진 문화 소비 시장을 일정하게 점유할 수도 있고, 잘 되면 대학 안으로 세를 넓힐 수도 있다. 그런데 어찌 위의 매뉴얼과 같은 지루하고 인기 없는 짓을 하겠는가? 슬픈 일이지만, 그리하여 진보 좌파의 이론 및 담론은 대중 운동과는 계속 멀어져갔다. 사실 한 번도 결합된 적이 없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3.
이 책의 저자 장석준은 이렇게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준수할 생각은 더욱 하지 않는 위의 매뉴얼을 착실하게 지키려고 하는 아주 드문 이이다.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지던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진보정당 운동에서 일해 온 그의 이력이 아마 관계가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가 얼마 전 김수영 시인의 기일에 <프레시안>에 기고했던 글처럼(☞바로 가기 : '통조림 자본주의'에 맞선 '통조림 진보'를 성찰함) 우리나라에서 숨 쉬고 땀 흘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실에 "거대한 뿌리"를 박고 싶어 하는 이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세계 곳곳의, 특히 서구의 진보 좌파 진영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정보와 지식에 있어서 그는 견줄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정통하고 박식하다. 때때로 중요한 사안이 터질 때마다 유럽과 세계 곳곳의 진보 진영이 어떠한 상태에 있고 그곳의 진보 정당들은 어떤 연혁과 이력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의 상황은 어떻게 해서 벌어진 것인가를 그가 소상히 설명해주는 값진 글들을 여러 온·오프라인 매체에서 접할 수 있다. 또 세계 진보 운동과 사상의 역사에 대해서도 드물게 보는 해박함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적 상황에서 어떠한 함의를 가지고 있는가를 고민하고 풀어내는 데에 있어서도 대단히 값진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가 재작년에 낸 책 <신자유주의의 탄생>(책세상 펴냄)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특히 작년에 그가 다시 감수하고 번역을 손보아 펴낸 G. D. H. 콜의 고전 <영국 노동 운동의 역사>(김철수 옮김, 책세상 펴냄)에서도 볼 수 있는 바이다. 현재 노동조합 운동이라고 하는 협소한 틀에 갇혀 진퇴양난이 되어버린 한국 노동 운동의 현실에 있어서, 노동 운동이 본래 얼마나 포괄적이고 넓은 틀과 전통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이 그 두꺼운 책을 다시 손보아 펴내게 만들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번 책 <장석준의 적록서재>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책들은 실로 범위가 넓다. 국내 저자의 마르크스 경제학 해설서부터 중국 현대사를 거쳐 생태주의의 고전에 이르기까지, 지금 세계 어느 곳에서나 진지한 좌파 세력이 고민하고 관심을 두는 문제들과 관련된 의미 있는 책들을 착실하게 읽고 소개하고 평하고 있다.

그 다양한 책들에 대해 저자가 붙인 이야기들에 대해 다시 견해를 붙일만한 지식과 고민의 넓이도 깊이도 없는 나로서는 흥미롭게 보았던 지점이 따로 있다. 바로 위에 말한 매뉴얼이 거의 모든 서평에서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정도로 폭넓은 범위의 책들을 다루면서 이러한 매뉴얼을 지킨다는 것은 오로지 성실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래도록 축적된 방대한 지식과 이해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에 대해 놀라고 존경스러울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암묵적으로 이 책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지의 한 방법을 암시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바로 이 책의 "새끼를 치는 것"이다. 70년대부터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큰 홍역을 치르고 난 뒤 아직도 혼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진보 및 좌파 담론은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유의미한 시각과 지식을 토대로 한 대중적이면서도 폭넓은 담론을 만들어나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장석준의 적록서재>는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꼭 참고할만한 이정표가 될 책들의 목록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당연히 이 목록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하여 우리가 소화해야 할 책들은 대단히 많다. 장석준은 자신이 톱질하고 못을 박아 만들어낸 자신의 서가에 우리 모두가 함께 달려들어 책을 채워나가자고 은연중에 촉구하고 있다. 그런데 책을 채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책은 항상 과잉으로 넘쳐나지 않았던가. 장석준이 이 책에서 선보이고 있는 것처럼, 위의 매뉴얼에 최대한 충실하게 작업한 서평을 그 책 한 권 한 권마다 달아놓아야 한다는 것이 또한 이 책이 은연중에 촉구하는 바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꼭 "새끼를 치기를" 바란다. 저자 본인도 이 작업을 계속해 주기를 바라며, 또 능력과 열정이 닿는 이들 모두가 그의 모범을 따라 이러한 서평집을 더 많이 내주기를 바란다.

책을 덮으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가슴 따뜻해지는 훈훈함을 느꼈다. 이렇게 지적으로 성실하면서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계속 늘어간다면, 반세기에 가깝게 계속되고 있는 지적인 혼란도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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