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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님에게 또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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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님에게 또 빚을 졌다!"

[모래가 흐르는 강] 이제 우리, 강이 되자

지율 스님이 돌아왔다.

지난 수년간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반대하며 낙동강 상류 지천 '내성천 지킴이'로 활동해온 지율 스님이 다큐멘터리 <모래가 흐르는 강>을 제작, 개봉한다. 지율 스님은 이 다큐멘터리에서 세계에서도 희귀한 자연 경관을 가진 내성천이 4대강 사업의 하나인 영주 댐 건설로 망가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강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극장에서 보는 첫 4대강 다큐멘터리 <모래가 흐르는 강>를 먼저 본 김택근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이 영화를 권하는 글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김택근 전 논설위원은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집필하고, 김대중 평전 <새벽>(사계절 펴냄)을 펴냈다. <프레시안>은 <모래가 흐르는 강>을 먼저 본 독자의 감상을 계속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

지율 스님이 영화를 만들었다. 4대강 사업을 다룬 첫 다큐멘터리 <모래가 흐르는 강>이다.

지난 4년 동안 우리 강에서는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강을 찾지 않았다. 강을 어머니로 모셨던 것들이 사라지고, 이제 강은 점차 모성을 잃어버렸다. <모래가 흐르는 강>을 보고 있으면 영화 속 강물이 우리 가슴 속으로 흘러든다. 사람 대신 강물이 얘기한다. "당신들은 그간 어디에 있었느냐"고.

슬픔과 분노를 넘어서

지율 스님은 2008년 12월 4대강 사업 착공 소식을 들었다. 정부는 4대강에 삽질하는 이유를 처음에는 "물류 혁명"이라 했다가 "관광"으로, 다시 "치수(治水)"로 바꾸었다. 4대강에는 이미 저들의 탐욕이 둥둥 떠다녔다. 스님은 영천 칠보산을 내려왔다. 낙동강 수백 리를 물길 따라 걸었다.

수많은 굴착기가 강 속에 주둥이를 처박았다. 흡사 강의 내장을 파먹는 것처럼 보였다. 수수만년 낮은 곳으로 흐르며 이 땅의 구석구석을 핥아주던 착한 혀를 잘랐다. 낙동강은 원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스님은 강을 떠날 수가 없었다. 지난 날 고속철도 터널이 뚫리던 천성산이 그랬듯이, 이번에는 강물이 울고 있었다.

낙동강의 지천인 내성천으로 올라갔다. 지천이 건강하면 강은 언젠가 제 모습을 찾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모래강 내성천에도 물과 모래를 가두는 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바로 영주댐이다. 스님은 강가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모래밭이 자갈밭으로 흉측하게 변해가는, 하루하루 죽어가는 강의 모습을 캠코더와 카메라에 담았다.

다큐멘터리 <모래가 흐르는 강>은 수억 년 동안 생명을 실어 나르던 강이 주인공이다. '모래'는 강 속의 에너지이자 생명체의 상징이다. 내성천 강가에는 400년간 이어온 집성촌이,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버들 군락이 있다. 희귀종 수달, 삵, 먹황새, 원앙, 흰수마자 등도 살고 있다. 댐이 생기면 모두 사라질 것들을 스님은 꼼꼼히 잡아냈다.

특히 수 백 년 동안 마을을 지켰던 당산나무의 거대한 몸체가 토막 난 채 대형 트럭에 실려 가는 장면을 보면 가슴이 서늘하다. 야만을 넘어 우리 시대의 종말을 떠올리게 만든다. 당산목은 사람들의 탄생과 죽음을 지켜봤다. 큰 키로 집집을 들여다보고 마을의 숨소리를 고스란히 들었다. 그 아래서 굿하고 제사도 모시고 회의와 재판도 열었다. 당산목은 이 모든 것들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이번에는 강 대신 스님이 말한다.

"댐 공사가 지역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그곳에 물을 채우는데 불과하다는 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가."

영화 속 끊임없이 움직이는 굴착기는 권력이 비호해주는 허가 난 폭력이다. 4대강 공사로 낙동강 제1비경이던 경천대, 철새의 땅 해평습지, 모래섬 하중도가 망가진 모습을 예전 풍경과 함께 보여준다. 관객들 가슴이 다시 먹먹해진다. 4대강 사업에 암묵적 동의를 했던 우리들을 많이, 아주 많이 아프게 한다.

지율 스님은 혼자서 촬영하고 편집했다. 하기야 늘 혼자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홀로 강을 지켜봤다. 스님의 거처는 강변이었다. 어떤 때는 사냥꾼들이 나타나 텐트 주변에서 총을 쏘았다. 또 독사가 안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누군가 시켰을 것이다. 그래도 스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홀로 싸우는 방법이 정교해졌다. 캠코더와 카메라는 강력한 무기였다. 그리고 비로소 다큐 영화 한 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전혀 기획하지 않은 기록물이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진실을 담고 있기에 아름답다. 눈을 뗄 수 없다. 이제 공명을 얻으면 눈부신 초록 세상 하나를 얻을 것이다. 영화 속 모래강 내성천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묻고 있다.

"그동안 강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신들은 강을 잊고 살았지요. 4대강 사업은 그런 당신들의 망각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성천 보존 운동은 모래강에 발을 담그고 망각의 세계를 건너면서 시작됩니다. 처참하게 망가진 하류를 보았겠지요? 그래도 아직 상류는 원시성을 지니고 있답니다. 아직 내성천은 죽지 않았답니다."

생명을 좇아가는 <모래가 흐르는 강>은 깊은 강물처럼 고요하다. 슬픔과 분노를 가라앉혔다. 지율 스님은 사람들이 "이제 강은 회복 불능"이라며 포기할 때 가장 절망했다고 한다. 그렇다. 절망을 말하려면 4대강 다큐를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결론은 희망이다. 강이 강으로, 인간이 인간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기다림은 멀어져간 사랑처럼 그립고 아프다.

"우리는 강이 변해간다고 이야기한다. 강은 우리가 변해가고 있다고 이야기 한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강이 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강에 가하는 폭력을 멈추고, 강이 건강해지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가슴 속에 들어온 강물, 그 강물이 노래를 할지 눈물을 흘릴 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 지율 스님은 뭇 생명을 위해, 그리고 너와 나를 위해 우리 모두 강이 되자고 한다. <모래가 흐르는 강> 속에는 수 억 년을 흘러온 강에 대한 기억이 있고, 또 우리가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인간에 대한 성찰이 있다. 삼가 영화를 보며 강의 소리를 듣고 희망을 탁발하기 바란다.

ⓒ시네마달

지율과 천성산 그리고 낙동강

지율 스님은 천성산 내원사의 비구니였다. 어느 날 굴착기가 바위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 날마다 산이 나타나 울었다. 스님은 천성산을 지키는 어미가 되기로 했다.

천성산을 살려달라며 단식을 했다. 도롱뇽을 앞세워 법정 싸움을 벌였다. 한 비구니의 목숨을 건 호소에도 세인들은 단식 날짜만을 헤아렸다. 지율 스님 뒤의 생명은 외면해 버렸다. 세인들은 단식을 극단적인 방법이라고 했지만 지율에게는 절실한 선택이었다. 목숨 외에는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과 개발론자들은 집요하게 스님을 공격했다. "공사가 지연되어 수조 원의 손해를 끼쳤다"는 식이었다. 그러한 폭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탐욕에 눈먼 저들은 개발 이익만 눈앞에 보였다. 저들은 공사비를 터무니없이 부풀려 스님을 공격했다. 하지만 자연을 보존했을 때 그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혜택은 전혀 계산하지 않았다.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식한 횡포였다.

천성산을 지키지 못해 날마다 절망하며 울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이제 됐으니 그만하라고 했다. 조계종단 내부에서도 스님을 꾸짖었다. 목숨을 건 단식도 여론의 추적으로 실패했다. 스님은 기댈 곳도 믿을 곳도 없었다. 영천 칠보산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개발론자들과 이를 옹호하는 언론에 쫓겨 난 셈이었다.

하지만 스님을 내친 것은 우리의 무관심이었다. 후손들에게 물려줘야할 자연임에도 이를 망각하고 우리가 자연의 주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자연을 현명한 후손들에게 맡겨야 함에도 자신들의 시대에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무엄한 집단의 악다구니에 우리가 침묵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통령이 삽질을 독려하는, 산이 아닌 강을 죽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다시 강물이 울고 있었다. 4대강을 향한 '밑도 끝도 없는' 삽질이 시작되고 강이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들은 '생명 살리기'라고 했다. 환장할 일이었다.

지율 스님은 산속 작은 오두막집을 나왔다. 그리고 낙동강 물과 함께 흘렀다. 자연을 자연으로 보지 않는 무리들의 삽질 앞에 위태로이 서 있다.

우리 시대 지율 스님은 누구인가. 돌아보면 우리는 스님에게 태산만한 빚을 졌다. 그러나 그 태산마저 저들은 간단히 허물어버릴지 모른다. 그것이 두렵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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