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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한의 DJ "대통령제는 글렀다"

[김대중 평전 '새벽'·54] 역사는 속일 수 없다

역사는 속일 수 없다

"나는 오랫동안 대통령 중심제를 지지해 왔으나 요즘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대통령제의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등 10명 중 8명이 독재자이거나 그 아류다. 나와 노무현 10년 동안 민주화를 적극 추진해 와서 안심이다 생각했는데 이명박 대통령을 보니 역시 제도를 바꾸어야겠다.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책임제로."

김대중은 퇴임 후 자신이 목숨을 걸고 쟁취한 직선 대통령제에 대해서 회의가 들었다. 5년 단임제는 국정 파탄에 대해서 중도에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대통령을 쫓아낼 수도, 또 독주를 막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내각제와 이원집정부제를 떠올렸다. 민의를 따르지 않는 독재자는 민의로 퇴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퇴임 후에도 동교동 사저 앞에서는 '김대중 규탄' 시위가 자주 벌어졌다. 극우 단체 회원들이 몰려와 구호를 외쳤다. 그들의 고함이 담을 넘어왔다. 서재와 침실에서도 들렸다. 그럴 때마다 김대중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또 검사 출신 국회의원 주성영이 김대중과 이희호가 거액의 비자금을 만들었다고 흘렸다. 저들의 행태가 참으로 가소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슬펐다.

"나는 그동안 사상적 극우 세력과 지역적 편향 가진 자들에 의해서 엄청난 음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는다. 하느님이 계시고 나를 지지하는 많은 국민이 있다. 그리고 당대에 오해하는 사람들도 내 사후에 역사 속에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바르게 산 자에는 영원한 패배는 없다. 살아서도 승자, 죽어서도 승자 그것이 나의 꿈이다."

김대중은 퇴임 후에는 자신을 향한 시선이 달라질 줄 알았다. 집권 5년 동안 모든 것이 걸러질 줄 알았다. 그러나 바뀌지 않았다. 김대중은 결국 미리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미래인들과 교감했다. 김대중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역사의 심판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속일 수 있지만 역사는 속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땅의 주인이 바뀌면 그들은 김대중을 역사 속에서 꺼낼 것이다. 비록 세상에서의 매질이 서러웠지만 역사는 정의 편에서 김대중을 심판할 것이다.

김대중은 우리 민족이 크게 번영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일기를 살피는데 불쑥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의 시가 나왔다. 한국인에게 바친 <동방의 등불>이었다.

"일찍이 아시아 황금기에
빛나던 동쪽(등불의 오기인 듯-필자 주)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 되리라" (2006년 6월 27일)


시만 있지 이와 관련 어떤 설명도 없었다. 아마 우리 민족의 미래를 그려보다가 문득 타고르의 시가 생각났고, 머릿속에 떠오른 것을 그대로 옮겼을 것이다. 김대중은 민족의 미래에 머지않아 '등불'이 켜질 것으로 확신했다. 한국인은 높은 교육열을 지녔고 지적 호기심이 왕성하여 능히 정보화 시대를 선도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50년 내, 21세기 중반에는 미국 다음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국민 1인당 소득이 8만 달러가 넘을 것입니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골드만삭스가 예측한 거예요."

그러면서 그 전제 조건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바로 민주 국가를 반석 위에 세우고 남과 북이 화해 협력을 이루는 것이었다. 민주화를 후퇴시키고, 남과 북이 살기를 뿜으며 갈라져 있다면 후세들에게 천추의 한을 물려주는 것이었다. 열강이 한반도에서 언제 이빨을 드러낼지 모른다. 김대중은 마지막까지 외교를 걱정했다. 자신이 왜 4대국 외교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살펴보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다시는 가난해지지 말아야 했다. 독재와 전쟁과 가난은 더 이상 후대에 물려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은 일시적인 반동은 있을지 몰라도 역사는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퇴임 후 김대중은 민족의 현안에 대해서 성찰하고 또 고민을 거듭했다. 반면 소소한 일들이 그를 즐겁게 했다. 거동이 불편한 김대중에게 동교동 집은 하나의 세상이었다. 침실, 거실, 서재를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이었지만 살아있음에, 그리고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김대중의 얼굴은 온화했다. 속기(俗氣)가 지워지고 편안해 보였다. 그의 표정에서는 현자의 면모가 어렸다.

점심을 들면 거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 시간에 맞춰 참새와 비둘기가 날아들었다. 모이를 주며 아내와 함께 커피를 마셨다. 김대중의 커피는 설탕을 듬뿍 넣어 달았다.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은 커피 맛처럼 달콤했다. 퇴임 후에는 아내 이희호의 손을 자주 잡았다. 둘이 종일 붙어있어도 즐거웠다. 일기에는 아내를 향한 정과 사랑이 듬뿍 묻어있다.

"나는 행복하다. 아내가 나(보다) 먼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내 없는 삶이란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점심 먹고 한강변을 아내와 같이 드라이브했다.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프레시안(손문상)

김대중은 아내에게 농담을 자주 건넸다. 다소 썰렁해도 이희호는 크게 웃었다. 늦은 밤 침대 위에 걸터앉아 노래를 불렀다. <고향의 봄>, <사랑으로>를 좋아했다. 노래는 집 안에 안식을 불러들였다. 밖에서 노래를 듣고 있는 비서들도 행복해졌다. 손을 꼭 잡고 노래하는 노부부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아름다웠다.

김대중이 꽃을 좋아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특히 봄꽃으로는 진달래, 가을꽃으로는 코스모스를 좋아했다. 재임 중에는 경호실장 안주섭이 청와대 경내에 진달래를 심어 김대중을 기쁘게 했다. 김대중은 담쟁이와 능소화 등 다른 나무나 벽 등을 타고 '기대어 올라가는' 식물을 싫어했다. 분재와 박제도 멀리했다. 멋진 분재일수록 나무의 고통이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박제에서는 죽음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아내와 드라이브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달리다 가게가 보이면 비서에게 아이스 바를 사오도록 했다. 팥이 들어간 '비비빅'을 좋아했다. 또 집에서는 족발과 닭튀김을 곧 잘 시켜 먹었다. 한 번 입에 대면 물릴 때까지 들었다. 양구이집 양미옥은 마지막 단골집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자주 찾았다. 김대중에게 양구이는 "언제 먹어도 맛있"는 음식이었다.

퇴임 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김대중을 찾았다. 성공한 민주 투사,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의 명예는 갈수록 빛이 났다. 국내에서도 강연과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동교동 사저에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외국의 지도자, 석학들이 면담을 요청했다. 또 벗과 동지, 그리고 학자와 국민의 정부 일꾼들이 찾아왔다. 한승헌 이해동 김원기 백낙청 임동원 임채정 김정길 박승 양성철 이근식 정세현 한상진 김태랑 백학순 김하중 등이 찾아와 손을 잡았다. 김대중은 이들을 각별하게 아꼈다.

"두 말이 필요 없는 한국의 대표적 인권 변호사." (한승헌)
"곁에 있어서 귀한 줄 모르지만 없으면 빈자리가 너무 크다." (백낙청)
"재야 출신으로는 가장 성공적이며 건실한 정치인." (임채정)
"탁월한 경제적 식견을 지녔다. (내가) 많이 배운바 있다." (박승)
"열심히 공부하고 박식하다. 그래서 두 번 법무장관에 발탁했다." (김정길)
"대북 전문가는 많지만 전문성과 리더십을 지닌 사람은 그뿐이다." (정세현)
"의리 있고 순수한 사람." (이근식)
"통일과 민족의 미래에 대해 묻고 답했던, 진정성 있는 학자." (한상진)
"인품이 훌륭하고, 그의 강연은 유익하고 인상적이다." (백학순)
"의리와 용기의 좋은 인물." (김태랑)
"내가 신임하던 인물이고 맡긴 직책마다 업적이 좋았다." (김하중)


이들과의 대화는 유쾌하고 유익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이사회가 열리면 누군가 발제를 하고 참석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흡사 국무회의에서 국가 대사를 논의할 때처럼 진지했다. 돌아가며 김대중을 초청하여 오찬이나 만찬을 대접했다. 만나면 마냥 좋았다. 한승헌, 정세현 등은 김대중을 위한 유머를 준비했다.

김대중은 주변 사람들에게 다정다감했다. 비서들에게 사탕을 건네고 작은 것들을 선물했다. 겁 많은 김대중은 주사 맞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주사를 아프지 않게 놓는 간호부장 김전우를 좋아했다. 마지막 입원을 하기 전 김대중은 십 수 년 동안 한 번도 실수 없이 주사를 놓았던 김전우가 고마웠다. 2009년 6월 어느 날 투석을 마치고 김대중이 말했다.

"간호부장, 우리 집 감나무에 감이 많이 열렸는데 가을되면 그걸 팔아 원피스 한 벌 사줄게요. 이쁜 걸로."

간호부장은 "대통령님 꼭 사주세요"하면서 웃어보였다. 하지만 목이 메었다. 주말에 몸이 좋지 않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오면 김대중은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몸이 아파 미안합니다."

그런 자상한 대통령을 돌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몸은 너무도 쇠약했다. 그해 어느 때보다 감이 탐스럽게 익었지만, 김대중은 그걸 보지 못했다.

김대중을 모시는 사람들은 김대중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맑고 따뜻한 인품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부당한 일로 김대중이 고난을 받을 때는 함께 눈물을 흘렸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김대중 곁을 떠나지 않았다. 경호부장 조영민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조영민은 1992년부터 김대중 수행 경호를 맡았다. 그해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고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지만 조영민은 동교동을 지켰다. 조영민에게 김대중이란 존재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볼 때 "어둠 속 한줄기 빛"이었다. 김대중의 삶과 철학에 매료되었다. 김대중을 끝까지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 김대중이 있는 곳에는 조영민이 있었다. 김대중은 그런 조영민을 깊이 신임했다. 퇴임 후 입원했을 때 병실을 나서는 조영민을 불러 세웠다.

"조 군, 나는 자네를 내 친자식같이 생각하네. 고맙네."

가늘고 갈라진 대통령의 목소리가 조영민의 가슴을 훑었다. 병실을 나와 한참을 울었다. 가슴이 벅찼지만 한 편으로는 죄송했다. 대통령 병환이 자신들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졌다. 김대중은 그런 사람들이 있어 행복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김대중이 있어 행복했다.

김대중은 일주일에 세 차례 신장 혈액 투석을 받았다. 2003년 5월부터 어김없이 월, 수, 금요일은 4시간 넘게 누워있어야 했다. 대개 오전 9시에 시작하면 오후 1시를 넘겼다. 스윽스윽 기계음이 들렸다. 크지는 않았지만 소리가 몸속을 파고드는 듯했다. 몸을 빠져 나간 혈액은 기계 속을 돌아 다시 몸속으로 들어왔다. 한 번 투석으로 이틀, 사흘치의 생명을 얻었다.

갈수록 힘이 들었다. 투석 치료를 받는 날 아침은 심란했다. 서재에 마련된 인공 혈액 투석기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안 되지만 대통령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비서들은 그걸 안타깝게 바라봤다. 김대중이 침대에 누우면 비서들이 책이나 신문 등을 읽어주었다. 투석 치료를 마치면 한동안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김대중은 걸음이 매우 불편했다. 고관절 장애는 재임 중에도 감히 대통령을 괴롭혔다. 걷다가 넘어질까봐 두려웠다. 크고 작은 행사 중에도 다리를 잘못 짚을까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다리가 아파도 김대중은 웃어야 했다. 한 쪽 다리에 살이 빠져 구두가 맞지 않았다. 한쪽 구두는 나막신처럼 끌고 다녀야 했다. 그래도 김대중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2009년 새해 수백 명의 세배객이 몰려왔다. 김대중은 10시간 동안 세배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앓았다. 혈압이 내려가고 맥박이 빨라졌으며 가슴이 몹시 아팠다. 의사들의 권고로 병원에서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다행스럽게 장과 위에는 이상이 없었다.

'정초에 병원행이라니…….'

동교동 사람들 얼굴이 어두워졌다. 김대중은 1월 6일 생일에는 생을 정리하는 듯한 일기를 썼다.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한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연초부터 여러 가지 일들이 김대중을 아프게 했다. 1월 20일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죽는 '용산 참사'가 일어났다. 그날 김대중의 일기에는 분노와 슬픔이 가득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국민을 적으로 아는 정권, 권세 있고 부자만 있는 정권이다. 반드시 국민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틀 후 대표 정세균 등 민주당 지도부 예방을 받고 용산 철거민 참사를 언급하며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당하니 가슴 아프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이후 김대중은 눈물을 자주 보였다.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명동성당에 찾아가 그의 위대한 일생을 기렸다. 평소 얼굴보다 더 맑아서 김대중은 크게 감동했다.

4월 24일 김대중은 고향 신안군 하의도를 찾아갔다. 14년 만이었다. 선착장에는 주민 수백 명이 나와 반겼다. 선영을 찾아가 배례했다. 조상들께 세상의 마지막 인사를 올린 셈이었다. 다시는 찾아올 수 없음을 김대중도 알았을 것이다. 농민운동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하여 방명록에 事人如天(사인여천)이라 썼다. 모교인 하의 초등학교를 방문하고 생가도 둘러봤다. 또 '큰바위 얼굴'도 찾아갔다. 줄곧 굵은 빗방울이 따라다녔다. 비서들이 일정을 줄이자고 했지만 김대중은 듣지 않았다. 김대중은 "행복한 고향 방문"이었다고 말했다.

5월 23일 봉화 마을의 전 대통령 노무현이 세상을 떴다. 영결식이 끝난 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손이 떨려 글씨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리고 김대중의 육필 일기는 2009년 6월 4일에서 멈췄다. 이후 김대중은 눈물이 더 잦아졌다. 비서들은 불길했다. 비서실장 박지원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대통령님, 이제 눈물은 그만 흘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김대중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내 자신 없어 했다.

"그렇게 하려 하는데도 잘 안 되는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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