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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버린 노무현 '햇볕' 대신 선택한 '먹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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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버린 노무현 '햇볕' 대신 선택한 '먹구름'!

[김대중 평전 '새벽'·50] 소쩍새 울음이 슬펐다

소쩍새 울음이 슬펐다

대통령 노무현이 '대북 송금 사건'의 특검을 수용했다. 국무위원 중 단 한 사람만 빼고 모두가 반대했지만 듣지 않았다. 통일부 장관 정세현은 이렇게 반대했다.

"대북 사업 추진 과정이 공개되면 남북 대화와 민간 교류 등이 중단될 것입니다. 햇볕 정책에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그러자 산업자원부 장관 윤진식, 농림부 장관 김영진, 여성부 장관 지은희, 환경부 장관 한명숙 등이 이에 동조했다. 해양수산부 장관 허성관만이 "부산 지역 민심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라며 찬성의 뜻을 내비쳤다. 토론을 지켜보던 노무현이 중간에서 말을 잘랐다.

"이 얘기는 그만합시다. 내게 생각이 있습니다."

노무현의 '생각'은 바로 특검 수용이었다. 노무현은 햇볕 정책 승계를 선언했지만 실제로 그 근간을 흔들어 버렸다. 소위 '노무현의 사람들'은 국민의 정부와 거리를 두려 했다. 햇볕 정책을 승계 아닌 극복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을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측근들은 '김대중 산맥' 속의 '노무현 산'이 되는 것을 경계했을 것이다. 노무현은 대북 정책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음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남북 관계는 미세한 균열 하나가 파국을 불러올 수 있었다. 대통령 노무현은 결국 멀리 보지 못했다.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특검 수용은 거대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대북 송금은 남북 관계를 고려한 통치 행위로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지만 노무현은 이를 일축해 버렸다. 김대중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특검 수용은 남북 관계와 통일 문제에 관한 우리 사회의 추동력을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당장 남북 대화가 겉돌았고, 남과 북은 어정쩡한 상태로 시간을 허비했다. 북한은 남쪽 정부를 의심했다. 노무현 정부는 결국 임기 말에 가서야 남북 정상 회담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그 합의는 이명박 정권에 의해서 간단히 외면당하고 남북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남북 관계의 파탄은 이미 노무현 정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특검 수용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국민의 정부 사람들이 줄줄이 불려가 죄인 취급을 받았다. 끝내 금융감독위원장 이근영, 경제수석 이기호, 비서실장 박지원이 구속됐다. 김대중은 비탄에 빠졌다. 칩거하며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한 번은 "모두 내 책임"이라며 특검 수사본부에 직접 나가겠다고 집을 나섰다. 이를 말리며 비서들은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김대중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식사를 거르고 말수가 줄어들었다. 침묵이 동교동 사저를 짓눌렀다.

김대중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2003년 5월 10일 구급차에 실려갔다. 심장 혈관이 막혀 피가 돌지 않았다. 곧바로 심혈관 확장 수술을 받고 신장 혈액 투석을 처음으로 받았다. 체력이 약해 혼수상태가 지속됐다. 신장 기능을 잃어버린 김대중은 그때부터 기계에 의존해서 연명했다. 김대중이 체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것은 그해 가을이었다.

ⓒ프레시안(손문상)

민주당이 둘로 쪼개졌다. 노무현을 따르는 무리가 당을 박차고 나가 국민참여통합신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11월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이듬 해 4월 총선이 있었다.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열린우리당에 대한 압도적 지지를 기대한다"는 대통령의 회견 내용을 문제 삼아 탄핵안을 기습 상정했다. 김대중은 이를 지켜보며 혀를 찼다. 그만한 일로 국민의 직접 선택을 받은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순 없었다. 민심이 이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과연 전국에서 탄핵을 반대하는 촛불 집회가 벌어졌다. 국민적 분노는 선거판으로 옮겨 붙었다. 열린우리당의 기세가 대단했다. 반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거대한 역풍에 휘말렸다. 특히 민주당은 표를 달라고 손을 내밀 수가 없게 되었다. 민주당은 김대중이 나서 줄 것을 간절하게 바랐다. 김대중의 정치 철학과 정책을 계승한 적자임을 내세웠다. 그러나 김대중은 나서지 않았다.

나는 그런 김대중의 처신에 감동했다. 김대중이 처음으로 유권자로부터 '자유'를 획득했다고 판단했다. 김대중이 없는 첫 번째 선거였다.

내 마음 속에는 '그래, 김대중 없이 너희끼리 잘해보라'는 일종의 분노가 생겨났다. 그리고 김대중의 남은 생이 곱게 빛났으면 좋을 것 같았다. '김대중을 3김으로 묶지 말라'는 칼럼을 썼다. 김대중은 그대로 김대중이어야 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의 참패가 꽤나 안타깝다. 이미지와 바람이 휩쓸고 간 전장(戰場)에는 민주당 장수들의 주검이 즐비하다. 나라를 떠받칠 만한 미래의 일꾼들이 힘 한번 못써보고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정작 지역구에서 '표의 반란'이 진행 중인데도 방방곡곡을 돌며 "민주당을 살려 달라"고 무릎 꿇고 울먹이던 추미애 의원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민주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이념과 정책, 그리고 철학을 계승한 적자(嫡子) 정당임을 외쳤지만 DJ의 추인이 없었기에 구원 병력은 오지 않았다. 민주당은 절박했고, 그래서 DJ를 향한 구애는 절절했다. 몸이 대단히 불편한 DJ 큰아들을 앞세우고 다녔다. 하지만 DJ의 입은 열리지 않았고 결과는 참담했다. 아침마다 동교동의 뜨락을 쓸었던 가신들이 피를 흘리며 돌아왔다. 일부 언론은 DJ가 이번 선거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정 많은 노인네가 측근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았으니 어찌 슬프지 않았겠는가. DJ는 꽃 지는 봄밤에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 선거에서 이겼다. 현실은 노무현, 정동영, 박근혜, 권영길 같은 사람을 승자의 반열에 올려놓겠지만 역사는 DJ를 진정한 승자로 기록할지 모른다. 그는 이겼다. 어쩌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뒀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는 약속대로 정치판에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 청와대를 나온 지난 1년여 동안 그에게는 다시 현실 정치로 복귀할 수 있는 명분과 기회가 많았다. DJ표 정책들이 후퇴 내지는 폐기되고, 자신의 햇볕 전도사들이 잇달아 구속되고, 동교동계 사람들이 모두 구악(舊惡)으로 분류되고 있는 시점에 국면 전환용 반격의 횃불을 들 수도 있었다. 명예 회복을 명분으로, 호남 소외를 구실로 마지막 승부를 걸어볼 만도 했다. 어찌 보면 승산도 있었다. 그에겐 여전히 여러 무기가 있다. 이번 선거만 봐도 여당 대표라는 사람이 주어진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중대한 말실수를 하고 말았지만, DJ는 아직도 '정제된 입'을 가지고 있다. 여전히 논리적이고 판세를 읽는 안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따르는 무리가 있다. 일각에서는 집권세력의 섭섭함, 야당의 무례함을 들먹이며 일전불사를 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정확히 읽었다.

그는 지긋지긋하게 자신을 따라다녔던 지역 감정의 망령을 잘 알았다. 본인이 원하지 않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더라도 그는 지역 감정의 한복판에 서있어야 했다. DJ는 자신이 나설수록 정치판이 혼탁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DJ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현장을 쫓아다니는 아들에게 연민의 정이 왜 없겠는가. 추미애 의원의 삼보일배가 DJ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는 선동하지 않았다. 그는 참았다. DJ 때문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던 지지자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비로소 선거판에서 DJ가 사라졌다.

그렇게 지지자들로부터 지워짐으로써 인간 김대중으로 돌아왔다. 그도 자유를 얻었다. 이제 목포나 하의도에 내려가 사람들이 내미는 탁배기를 '아무 복선 없이' 받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세상사가 정치 아닌 것이 없지만 앞으로는 함부로 '정치인 김대중'을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김대중이란 인물이 '3김'으로 묶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복수하지 않았고 대신 고뇌하였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접었다. 그러나 봄밤이 아플 것이다. 봄이 가기 전에 이제는 늙어버린 가신들을 불러 손을 잡아주길 바란다. 소쩍새 울음을 타서 술 한 잔 건네기를 바란다. 그들도 떠나갈 때가 되었음을 알 것이다." (<경향신문> 2004년 4월 19일자)


김대중은 대통령 노무현의 국정 운영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조마조마했다. 소위 개혁 정책이라는 것들이 곧잘 현실을 떠나 이상적이거나 또 소모적인 논쟁을 일으켜 국민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일련의 민주적 조치들은 평가할만한 것이지만 국민 의사를 수렴하는 데는 문제가 많았다. 김대중은 노무현 정부 사람들을 만나면 모든 정책은 "국민보다 반걸음만 앞서가라. 국민의 손을 잡으라"고 당부했다. 끊임없이 국민을 설득하고, 그래도 따라오지 못하면 멈춰 섰다가 국민의 손을 잡고 함께 가야한다고 일렀다. 국민들과 체온을 나눠야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국민은 걷고 있는데 정부만 뛰어가면 실패는 예고된 것이었다. 목적이 정의로울수록 '국민과 함께'라는 원칙을 지키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야 집을 나간 토끼들이 돌아오고, 그 뜻을 이해한 새로운 토끼들이 들어온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에서는 끝내 토끼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2006년 9월 남북 문제 전문가 임동원, 이장희, 백학순, 문정인, 김근식, 고유환 등을 초청하여 오찬을 했다. 북한은 이미 미사일을 발사하며 국제사회에 무력 시위를 한 바 있었다. 그러자 온갖 비난의 화살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참석자들은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말 그로부터 보름 쯤 후에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지진파가 남쪽에서도 감지되었다. 노무현은 "대화만 계속하자고 강조할 수 있는 입지가 없어진 것 아닌가 생각한다"며 강경 대응 방침을 암시했다. 다음 날 대통령 노무현이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했다. 북한 핵실험과 관련 조언을 구했다. 전 대통령 김영삼이 햇볕 정책을 공격했다. 포용 정책을 지속하다가 이런 상황을 초래했다며 김대중과 노무현의 대국민 사과를 촉구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김대중이 말했다.

"햇볕 정책을 통해 남북 관계 발전은 제대로 해왔고, 또 성과도 있습니다. 문제는 북미 관계에 진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핵개발이 어떤 단계에 왔든 이를 해체시켜야 하고 또 북한이 더 이상 도발을 못하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다음날 김대중은 광주의 한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침에 대통령 노무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제 불편하게 했던 일들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노무현은 김대중이 일방적으로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김대중은 대통령 노무현의 대북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포용 정책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포용 정책은 남북의 긴장을 완화시켰지 악화시킨 적이 없는데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죄 없는 햇볕 정책에 북한 핵 실험을 갖다 붙이는데 동의할 수 없습니다. 햇볕 정책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이후 김대중에게는 국내외 언론 인터뷰가 쇄도했다. 북한 핵 실험의 원인과 향후 정세 등을 물었다. 김대중은 북미 관계 개선을 촉구했다.

"북한 핵 실험은 지난 6년 동안 계속된 부시의 대북 강경책이 실패했음의 방증이다. 이제라도 대북 강경책에서 벗어나 북한과 대화에 나서야 한다."

이후 미국은 강경책을 버리고 북한과 대화를 적극 모색했다. "사악한 정권과의 대화란 있을 수 없다"는 큰소리가 오간데 없어졌다. 부시 행정부는 베이징과 베를린에서 북한과 직접 협상을 시작했다. 미국은 방코델타아시아 은행(BDA)의 북한 계좌 동결을 해제하고 북한은 핵시설 가동 중단과 폐쇄에 합의했다. 이른바 '2·13 조치'였다. 북한은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취하고, 미국은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기로 합의했다. 결국 북한은 1만8000쪽에 이르는 핵 가동 문서를 미국 측에 넘기고 영변 핵발전소 냉각탑을 폭파했다. 그 냉각탑이 폭파되던 2008년 6월 27일, 김대중은 남다른 감회를 이렇게 남겼다.

"오늘은 2차 대전 이후의 한반도 역사에 획기적인 날이다. 북한이 영변 핵발전소 냉각탑을 폭파한 날이다. 그리고 미국은 북한의 테러 지원국 지정에서 해제를 국회에 통고한 날이고, 적성국 교역 금지 대상에서 제외한 날이다. 이제 6자 회담은 제3단계, 즉 북의 핵무기 폐기와 국교 정상화를 주고받는 단계로 진입할 것이다. 내가 1971년 대선 이래 주장한 한반도 4대국 평화 보장이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94년 미국 내셔널프레스클럽 연설에서 주장하고 대통령 재임 중 미국 정부 당국자에게 거듭 주장해온 북미 간의 직접 대화와 주고받는 협상이 큰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 2006년 북한 핵실험 당시 노무현 대통령 이하 여야 모두가 절망과 대북 일전불사의 강경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 내가 홀로 직접 대화와 주고받기 협상으로 경색된 국면을 타개하라고 국내외의 언론 인터뷰와 강연에서 주장하던 일이 감회 깊게 회상된다. 부시는 결국 나와 클린턴이 주장하던 노선에서 결실을 얻었다."

퇴임한, 그리고 병약한 80대 노인이 남북 관계를 이렇듯 명징하게 정리하고 있으니 놀랍기만 하다. 김대중이 평생을 바쳐 완성한 햇볕 정책은 그러나 그 이후에도 많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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