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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경고 "인류 큰 재난 앞두고 있다!"

[김대중 평전 '새벽'·46] 동강댐 백지화

2001년 8월 23일 국제통화기금(IMF) 차입금을 모두 갚았다. 이로써 한국은 '경제 신탁 통치'에서 벗어났다. IMF와 2004년까지 상환키로 했으나 3년 앞당겨 빚을 갚았다. 우리 경제 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30대 재벌 중에서 16개가 없어지거나 주인이 바뀌었다. 대마불사의 신화도 깨졌다.

국민의 정부는 기업, 금융, 공공, 노동 4대 부문 개혁에 온 힘을 쏟았다. 그것은 각 부문의 군살을 빼고, 환부를 도려내는 일이었다. 국민들의 의식까지 개혁해야 하는, 환골탈태의 난제였다. 금융 개혁은 특히 어려웠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자민련(자유민주연합) 몫으로 들어온 경제장관들은 열심히 일했다. 김대중의 개혁 정책에 공감하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특히 재정경제부 장관 이규성, 금융감독위원장 이헌재 등은 김대중을 감동시켰다. 김대중은 각료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김대중 또한 각료들을 감동시켰다. 김대중은 일 잘하는 장관을 아끼고 그들 말을 우선 들었다. 모두 밤잠을 설쳐가며 나라 경제를 챙겼다.

돌아보면 외환 위기 극복 과정은 눈물겨웠다. 세계는 한국에서 일어난 두 가지 일에 감동했다. 하나는 금 모으기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한 것이었다. 자신보다 이웃을, 나보다 우리를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김대중이 없었으면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가진 자들과 기득권층과 유착하지 않았기에 할 수 있었다. 새 대통령, 평화적으로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룬 대통령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열었을 것이다.

김대중은 그런 국민이, 노동자가 또 기업인이 고마웠다. 환란 극복에 앞장섰던 인사들을 초청하여 만찬을 나눴다. 전 재정경제부 장관 이규성이 김대중의 공을 헤아렸다.

"국민들을 개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님의 높으신 경륜 때문이고, 우리가 국제 금융 기구나 우방국으로부터 신뢰를 받은 것은 대통령님의 정상 외교 덕분입니다."

김대중은 취임 초기에 나라 빚이 얼마인지도 몰라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언제 부도가 날지 몰랐다. 달러가 있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갔다. 초창기 정상 외교는 다름 아닌 '달러 빌리기'였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건너듯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돌아보니 행복한 기억이었다. 김대중은 그 행복을 나눠주고 싶었다.

"후일 역사가들이 우리와 IMF의 관계, 그리고 외환 위기 극복 과정을 기록할 때 반드시 이러한 노동자들과 기업인들의 희생과 협력에 대해서 기록할 것을 믿습니다."

2001년 9월 외환 보유액이 1000억 달러를 넘었다. 세계 5위의 규모였다. 외환 위기를 맞은 나라로서는 유례가 없었다. 세계가 몇 번씩 눈을 씻고 한국을 바라봤다.

그러나 김대중도 두 가지는 아쉬워했다. 바로 재임 중에 일어난 카드 대란과 외환 위기로 심화된 소득의 양극화였다. 경기 활성화와 투명한 상거래를 위해 카드 사용을 권장하자 너도나도 카드를 긁었다. 결국 수많은 신용 불량자를 낳았다. 또 집권 초기에 '실업 내각'이라 할 만큼 실업자 구제에 힘을 쏟았지만 결국 중산층이 엷어졌다. 김대중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카드란 것은 불쑥 튀어나온 문제였어요. 그런데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예상했어요. 그래서 준비를 시켰어요. 그런데 (임기가 끝나서) 나와야 했어요. 그것이 아쉽습니다."

소득의 양극화는 지구촌 전체의 문제인데 김대중은 과연 어떤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지금도 유용할까. 짐작컨대 김대중은 누군가에게 특단의 대책 마련을 지시했고 의미 있는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어쨌든 준비된 대통령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때 그 자리에 김대중이 없었다면 위기의 한국은 지금 어디에 있을 것인가.

김대중은 이런 얘기를 자주 했다.

"눈을 가지고 보면 온통 자연의 눈물이고, 귀를 가지고 들으면 만물들의 아우성이다."

상징적이며 극히 시적이다. 언제부터 김대중은 자연의 비명과 흐느낌을 들었는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연에 대한 외경심은 고향 하의도에서부터 싹 텄을 것이다. 친구들과 쏘다니다가 문득 노을에 물든 바다를 보며 진정한 평화를 느꼈을 것이다. 김대중이 꽃을 좋아하고 동물을 사랑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옥중에서도 나무와 동물을 챙겼다. 청주교도소에서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이런 대목이 있다.

"당신 편지에 뜰에 나무들이 굉장히 자랐다고 했는데, 하나 궁금한 것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옮긴 후 하나가 시들고 있었는데 둘 다 자라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랬으면 참 기쁘겠어요. 개 이야기를 쓸 때는 똘똘이 이야기만 쓰지 캡틴과 진돌이, 진숙이 이야기는 없는데 같이 알려주면 좋겠어요."

또 감옥에서 돌보던 화단의 꽃들이 시들자 그 안타까움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꽃들의 처참한 모습을 볼 때 마치 사랑하는 이의 최후를 보는 것같이 적막한 슬픔의 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늘 꽃과 얘기를 나누고, 애완견이 없어졌다는 전화를 받고는 당무회의 중임에도 회의장을 박차고 집으로 달려갔던 일화가 있다.

ⓒ프레시안(손문상)

김대중은 '환경 보호'라는 말을 마뜩치 않게 여겼다. 환경을 망쳐 놓고 마치 시혜인 것처럼 보호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속에 인간의 독선과 오만이 들어있다고 했다.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후 정치적 유배지 영국 케임브리지에 머물면서 '전 지구적 민주주의'를 구상했는데 그 속에는 '자연과의 상생'이 들어있다. 김대중은 민주주의 정치사상가 존 던과 정치지도자에게 <제3의 길>을 제시한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등을 만나 인류의 미래를 논의했다. 김대중은 모든 인류가 차별 없이 자유와 인권을 호흡해야 하며 나아가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는 전 지구적 민주주의를 실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글로벌 민주주의(global democracy)라 이름 붙였다. 김대중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 집착한 서구 문명의 한계를 지적했다. 선진 국가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향락을 위해 과학의 힘을 빌려 저지른 지구 파괴는 이제 더 이상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국제적 불평등을 시정한 후 마지막은 생태계의 조화를 이룬 새로운 문명을 건설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김대중은 집권 이후 이러한 전 지구적 민주주의, 즉 자연과의 상생을 드러내 놓고 중점 과제로 설정하지 못했다. 경제 위기가 엄존했기 때문이었다. 또 생산적 복지, 햇볕 정책, 지식 정보화 강국 같은 시급한 현안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환경에 뒷짐을 지고 있지는 않았다. 취임 후 줄곧 깊은 관심을 보였다. 환경 관련 발언만 놓고 보면 어느 환경론자 또는 환경운동가에 못지않았다. 취임 후 첫 환경부 업무 보고에서 이런 말을 했다.

"부처님은 '흙과 물과 공기가 모두 부처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연과 인간을 똑같이 귀중하게 생각한 겁니다. 성경에 보면 하느님이 지구를 만들고, 동식물을 하나하나 만들고, 창조한 피조물을 우리보고 '다스리라'고 여섯 번째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백성을 편하게 해 주라는 얘기입니다. 인간보고 자연을 편하게 해 주라는 얘깁니다. 이런 동양 사상이 여러분의 생각과 연결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오늘날 인간 역사상 지금처럼 환경을 파괴한 적이 없고, 이제 그 죄악으로 뭘 당할지 모릅니다. 엘리뇨 현상 같은 것이 그 하나의 예라고 봅니다."

국민의 정부 최장수 각료는 환경부 장관 김명자였다. 대통령과 전혀 인연이 없었고, 임명장을 수여하면서도 "잘할 것 같아 발탁했다"고 했다. 그리고 김명자는 3년 8개월 동안 열심히 일했다. 김대중은 치밀하고도 열정적인 일처리가 미더웠다. 매번 힘을 실어주며 부처이기주의에 휘둘리지 말고 소신껏 일하라고 격려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강이 죽어가고 있었다. 환경부는 4대강을 살리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 물 관리 특별법 제정은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은 거셌다. 기업과 주민들은 세금을 더 내야했고, 경제 관련 부처는 경기 침체를 우려했다. 이런 점을 감안해서 장관 김명자가 보고했다.

"정부 내에 경제 개발을 중시하는 목소리가 있고, 4대강 대책에 이견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목소리를 고려하겠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오히려 그런 자세를 나무랐다.

"다른 목소리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환경부 장관임을 잊지 마십시오,"

4대강을 보호하는 3대강 특별법(낙동강, 금강, 영산-섬진강)이 국민의 정부에서 제정되었다. 물 관리가 사후 정화 처리에서 사전 예방 정책으로 바뀌었다. 김대중은 학계, 종교계, 지방자치단체, 시민 단체 등 관련 인사들을 초청해서 특별법에 최종 서명했다. 이로써 강에 오·폐수를 흘려보내는 어떠한 행위도 법과 제도로 규제하게 되었다. 물이 비로소 법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이었다.

동강댐 건설을 싸고도 논란이 계속됐다. 보존과 개발 사이에서 끝없이 싸우고 있었다. 김대중은 민·관 공동 조사단을 구성하여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2000년 6월 5일 '새천년 국가 환경 비전 선언'을 통해 동강댐의 백지화를 선언했다. 개발론자들의 주장이 처음으로 꺾였다. 김대중은 '환경'이란 이름으로 국책 사업을 백지화시킨 첫 대통령이었다.

김대중은 2000년 9월 대통령 직속 기구로 '지속발전가능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위원회를 통해 대형 국책 사업, 국토 난개발, 기후 변화 협약, 에너지 문제 등의 현안을 조율토록 했다.

2001년 환경인들과 신년 모임에서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지구를 어머니로 생각하고, 이 지구상의 만물을 형제로 생각해서 소중하게 같이 살고, 같이 번창하고, 같이 가꾸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김대중은 '지구는 후손들에게 빌려서 잠시 머무르는 곳'이라고 했다. 그가 쓴 퇴임 후 쓴 일기가 우리를 깨우고 있다.

"인간의 환경 파괴로 기후 온난화가 본격화하여 한국에도 아열대 식물과 어족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환경 파괴로 인류는 큰 재난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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