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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노벨상 로비의 진실은? 수천 통의 편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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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노벨상 로비의 진실은? 수천 통의 편지가…

[김대중 평전 '새벽'·45] 찬란한 햇볕의 잔치

찬란한 햇볕의 잔치

남북 정상 회담 이후 미국은 대북 경제 제재 조치를 완화했다. 반세기 동안 금지됐던 교역이 재개 되었다. 6월 23일 미국 국무장관 올브라이트가 서울에 왔다. 노랑 옷에 '선샤인 브로치'를 달고 나타났다. 햇볕 정책 성공을 축하하고 있음이었다.

"하나의 아이디어를 인내심을 갖고 추진하여 성공시킨 집념에 경의를 표합니다. 개인적으로 김 대통령을 존경하지만 이제는 세계가 존경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햇볕이 가득했다. 그 햇볕을 받고 여러 가지 것들이 피어났다. 놀라운 변화였다.

2000년 7월말 남북 장관급 회담이 열렸다. 8월 5일 남쪽 언론사 사장단 56명이 북한을 방문했다. 8월 15일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남쪽 이산가족 102명이 평양에서, 북쪽 101명은 서울에서 헤어진 가족들을 얼싸안았다. 8월 20일 남북교향악단 합동 연주회가 열렸다. 9월 2일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북으로 돌아갔다. 9월 11일 특사 김용순이 칠보산 송이를 싣고 서울을 방문했다. 9월 15일 호주 시드니 올림픽에서 남북 선수단이 공동으로 입장했다. 9월 18일 경의선 연결 기공식이 있었다.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은 한반도는 물론이고 현존하는 지구촌 모든 사람의 가슴을 적셨다. 상봉 장소인 서울 코엑스와 평양 고려호텔은 눈물바다였다. 아주 많이 늙은 사람들, 곧 세상을 떠야만 하는 노인들이 부둥켜안고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 북의 계관시인 오영재는 어머니 사진에 볼을 부비며 울부짖었다. 한국 전쟁 때 16살 중학생이었던 그는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50년 만에 어머니를 만나러 왔다. 그러나 어머니는 땅에 묻힌 지 오래였다.

사연 사연마다 너무 애절해서 눈물 속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잠깐 헤어진 줄 알았는데 어느새 50년이었다. 이런 피눈물을 외면하고 남과 북은 서로 미움만을 키웠다. 김대중은 이를 지켜보며 '대통령 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9월 24일 남북국방장관회담 북측 대표 13명이 판문점을 넘어왔다. 북한군 수뇌부가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은 한국 전쟁 이후 처음이었다. 김대중은 인민부력부장 김일철의 예방을 받았다. 일행이 대통령 김대중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다시는 총부리를 겨누고 싸워서는 안 됩니다. 남북이 오랫동안 적대 관계를 유지해 조금만 잘못돼도 깨질 수 있습니다. 조급해 하지 말고, 그렇다고 쉬지도 말고 신뢰를 쌓아 가면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2000년 10월 9일 북한 국방위 제1부위원장 조명록 차수가 미국을 방문했다. 세계가 놀랐다. 조명록은 군복 차림으로 클린턴을 예방하고 김정일의 친서를 전달했다. 조명록과 미 국무장관 올브라이트는 회담을 갖고 '북미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김정일 위원장께 클린턴 대통령의 의사를 직접 전달하여 미합중국 대통령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하여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가까운 시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기로 합의하였다."

성명은 '1953년 정전 협정을 평화 협정으로 바꿔 한국 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데 여러 방도가 있다는데 견해를 같이했다'고 밝혔다. 북은 미사일 실험을 유예하고 미국은 북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키로 했다. 10월 말에는 미 국무 장관 올브라이트가 클린턴의 친서를 휴대하고 평양을 답방했다.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올브라이트에게 기자들이 김정일의 인상을 물었다.

"그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훌륭한 대화 상대자였다. 실용주의적이고 결단력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반도에는 평화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2000년 10월 13일 노벨 평화상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어느 때보다 김대중의 수상이 유력했다. 주요 외신들은 김대중의 수상을 기정사실로 보도하고 있었다. 한국의 언론사 기자들도 일찌감치 노르웨이 현지로 날아갔다. 김대중은 아내 이희호와 함께 관저에 머물며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노벨위원회 위원장 군나르 베르게가 김대중의 이름을 불렀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는 순간이었다. 위원장 베르게가 선정 이유를 밝혔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2000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및 북한과의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한국의 김대중을 선정했다. 한국에서 수십 년간 지속된 권위주의 체제 속에 계속된 생명의 위협과 기나긴 망명 생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한국 민주주의 대변자였다. 그가 1997년 대통령 선거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 대열에 올랐다.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은 민주 정부 체제를 공고히 했고, 한국 내의 화합을 도모했다.

김대중은 강한 도덕성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인권을 제약하는 기도에 대항하는 보편적 인권의 수호자로 동아시아에 우뚝 섰다.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와 동티모르의 억압을 반대하는 그의 역할은 평가할 만하다."

김대중의 그해 가을은 실로 찬란했다. 그간에 쌓아두었던 축복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세계 언론도 일제히 축하 기사를 내보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호외를 발행했다.

"세계 뉴스는 음울한 소식으로 가득하다. 중동은 전쟁의 위협 아래 놓여 있고, 영국 남부지방은 홍수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로 분단된 한반도의 화해를 추진하기 위한 끈기 있는 노력으로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에게 돌아간 노벨평화상은 암흑 속의 한 줄기 소망의 빛이다." (<더 타임스> 2000년 10월 14일자 사설)

2000년은 노벨 평화상을 제정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래서인지 어느 해보다 경합이 치열했다. 35개 단체와 115명이 후보로 추천을 받았다. 중동평화협상에 주력한 빌 클린턴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남북 정상 회담을 이끌어낸 김대중이 단연 빛났다. 노르웨이 언론은 '과거에는 이런저런 자격시비가 있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단 한 건의 반대 의견도 없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국내 야당과 보수언론의 반응은 사뭇 냉랭했다. 수상을 위한 로비가 있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이에 노벨위원회 위원장 군나르 베르게는 별도의 해명을 했다. 이는 한국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노벨상은 로비가 불가능하고, 로비가 있다면 더 엄정하게 심사한다. 기이하게도 김대중에게는 노벨상을 주지 말라는 로비가 있었다. 김대중의 수상을 반대하는 수천 통의 편지가 한국에서 날아왔다. 그것이 모두 특정지역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레시안(손문상)

10월 20일 ASEM 정상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아시아와 유럽의 26개국 정상들이 참석했다. 나라를 세운 이래 최대 규모의 국제 행사였다. 김대중은 의장국 자격에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다. 멀리 있어도 빛이 났다. 각국 정상들이 노벨 평화상 수상을 축하해 주었고,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덕담을 건넸다.

김대중은 14개국과 정상 회담을 가졌다. 정상 회의 중 80회의 양자 회담이 열렸는데 26회를 김대중이 주관했다. 살인적인 일정이라고 비서들이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신명이 솟았다. 일생에 가장 바빴던, 하지만 가장 행복하게 일했던 2박 3일이었다.

그해 12월 10일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있었다. 김대중은 8일 노르웨이에 도착했다. 노벨위원회에 들러 위원들과 환담을 나눴다. 위원회 사무실 벽면에 역대 수상자들의 초상화기 걸려 있었다. 빌리 브란트, 헨리 키신저, 레흐 바웬사, 오스카르 아리아스 산체스, 고르바초프, 아웅산 수치, 넬슨 만델라, 라모스 오르타 등이 김대중을 쳐다 보고 있었다. 모두 김대중과 인연이 있었다. 맨 마지막에 김대중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 그 뒤에 또 많은 사람들 얼굴이 걸릴 것이다. 수상자들이 늘어 날수록 세상은 더 발전하고 평화로울 것이다. 김대중은 사진 속의 김대중을 한참 바라보았다.

식장인 오슬로 시청 메인 홀은 온통 노란 꽃으로 장식했다. 햇볕 정책을 상징하고 있었다. 시상식은 격조 높게 진행되었다. 노벨위원회 위원장 군나르 베르게가 노르웨이 작가 군나르 롤드크밤이 쓴 시 '마지막 한 방울'을 인용하며 선정 이유를 발표했다.

옛날 옛적에
물 두 방울이 있었다네
하나는 첫 방울이고
다른 것은 마지막 방울
첫 방울은 가장 용감했네
나는 마지막 방울이 되도록 꿈꿀 수 있었네
만사를 뛰어넘어서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되찾는 그 방울이라네
그렇다면
누가
첫 방울이기를 바라겠는가?

군나르 베르게는 김대중을 이렇게 소개했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냉전의 빙하 시대는 끝났습니다. 세계는 햇볕 정책이 한반도의 마지막 냉전 잔재를 녹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시작되었으며, 오늘 상을 받는 김대중 씨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은 없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첫 번째 떨어지는 물방울이 가장 용감하였노라.'"

김대중은 수상 소감에서 국민과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수많은 동지들과 국민들에게 영광을 돌렸다.

그날 밤 축하 음악회가 열렸다. 노벨 평화상 수상을 기념하는 마지막 행사였다. 성악가 조수미가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다.

"한국의 노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남한 사람 모두가 꼭 가고 싶어 하는 북한에 있는 아름다운 산, 금강산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곡을 김대중 대통령과 대한민국 국민들께 바칩니다."

조수미의 목소리는 청중을 완전히 압도했다. 그날 이후 노르웨이에서는 조수미 붐이 일었고 그의 음반이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김대중은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솟구쳐 올랐다. 눈물이 났다. 왜 그 노래만 들으면 눈물이 나는지 몰랐다. 조수미는 노래를 마치고 달려와 노(老)대통령을 껴안았다. 청중들의 박수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김대중의 2000년은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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