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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가 가장 좋아한 남자…"그를 만난 것은 행운이다!"

[김대중 평전 '새벽'·42] 임동원을 얻다

임동원을 얻다

한 해가 저물고 있었다. 1994년 12월, 임동원의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알고 지내던, 전 통일부 출입 기자 정동채였다. 한번 뵙고 싶다고 했다. 임동원은 통일원 차관 자리를 끝으로 물러나 공직 생활 40년을 정리하고 있었다. 임동원은 가볍게 나갔지만 무거운 소리를 들어야 했다.

두 사람은 서울 시내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정동채는 자신이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김대중의 비서실장이며 김 이사장의 지시로 면담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김대중 선생님은 아태평화재단을 책임지고 운용할 사무총장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임 차관님을 추천하여 이렇게 영입 제안을 드리려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부디 승낙해 주십시오."

임동원은 의아했다. 김대중이 자신을 찾을 이유가 별로 없어보였다. 그리고 대뜸 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떠올랐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 그것도 평소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인물과 같이 일할 생각이 없었다.

"초청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분을 모시고 일할 생각이 없습니다. 내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동채는 마치 그런 대답을 예견이나 한 듯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생각해 볼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김대중이 영입하려는 임동원은 누구인가. 그는 노태우 정부 때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을 끌어 낸 주역이었다. 남북고위급회담의 대표로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다. 남측 대표로는 그가 유일했다. 남과 북이 합의한 "탈냉전의 새로운 시대를 맞아 서로 화해하고 교류 협력하며 전쟁을 배격하고 평화를 만들어가자"는 남북기본합의서는 북방 정책의 귀중한 산물이었다. 김대중은 이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그 주역인 임동원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임동원은 물론 이를 알지 못했다.

임동원은 평안북도 위원 출신으로 17세 때 한국 전쟁이 나자 남쪽으로 내려왔다. 육군사관학교(13기) 출신에 교수 요원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다. 1967년 <혁명 전쟁과 대공 전략>이란 책에서 이듬해 일어난 '1·21 사태', 즉 게릴라들의 청와대 습격 사건을 예고해 명성을 얻었다. 또 나이지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대사 등을 역임하며 통일, 외교, 안보 분야의 전문 식견을 두루 쌓았다. 선배나 동료들은 그를 "가장 양심적인 사람"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라 평했다.

정동채가 다시 임동원을 졸랐다. 또 마주 앉아야 했다. 커피숍에 캐럴이 흘러나왔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정동채는 서신 한통을 내밀었다. 김대중의 친서였다. '임동원 차관은 이미 능력이 검증된 분이고, 또 능력은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것이니 부디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임동원은 흔들리지 않았다.

"40년이 넘게 국가에 봉사했습니다. 이제 나이도 60세가 넘었으니 편히 쉬고 싶습니다. 또 저는 건강이 썩 좋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건강 검진을 받았습니다."

듣고 있던 정동채가 간청했다.

"그렇다면 선생님을 한 번 만나서 직접 말씀을 나눠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러자 정동채의 표정이 바뀌었다. 웃음기를 거두고 기자 출신답게 취재하듯, 따지듯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만나 뵙고 싶어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정말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이렇듯 건방질 수 있습니까."

정동채는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임동원은 "죄송하다"며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정동채의 '불손'이 그리 밉지 않았다.

'저렇듯 번듯한 인물이 진심으로 떠받드는 김대중이란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집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내심 걱정도 됐다. 그러나 걱정의 실체는 알 수 없었다. 아내에게 낮에 있던 일을 얘기했다. 아내는 이제 "여생을 편히 지내자"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의 아내는 개성 출신으로 임동원보다 더 김대중을 싫어했다. 임동원은 육사 또는 이북 출신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열에 일곱, 여덟은 부정적이었다.

"김대중에게 가면 변절자 취급을 받을 것이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정치인에게 이용만 당할 뿐이다."


새해가 밝았다. 1995년 1월 1일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그날 임동원은 교회에서 예사롭지 않은 설교를 들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향해 비전을 품으십시오.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그리고 진취적이고 모험적인 인생을 사십시오."

설교가 임동원의 가슴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런데 그의 아내도 똑같이 설교를 가슴으로 들었다. 그리고 곧 이어 정동채로부터 세 번째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건강 검진 결과는 어떠하냐"는 말도 곁들였다. 아태재단 측에서는 이미 병원에 연락해서 검진 결과가 양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임동원은 거부할 수 없었다.

약속한 날 아침 아내가 말했다.

"이 정도라면 하느님의 섭리인 것이 분명하니 하느님의 뜻에 겸허히 순종하세요."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정동채가 말했다.

"꼭 모셔오라는 선생님의 간곡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제발 선생님을 한 번만 만나 주십시오."

임동원은 결국 만남 요청을 수락했다.

1995년 1월 23일 오전 11시경 임동원은 김대중의 동교동 사저로 들어섰다. 김대중은 응접실에서 임동원을 맞았다. 임동원의 눈에 비친 김대중 자택은 매우 작아 보였다. 김대중의 첫인상은 근엄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그리고 얘기를 나누면서 솔직하고 진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은 두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다. 주로 김대중이 얘기했고 임동원은 들었다. 임동원이 완성시킨 남북합의서를 훤히 꿰고 있었고 또 높이 평가했다. 북핵 문제의 본질과 해결책, 통일 방안을 설파하고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햇볕 정책의 개념을 설명했다. 임동원은 처음으로 햇볕 정책이란 용어를 들었다. 또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특사로 북한을 방문한 것이 김대중의 미국 내셔널 프레스 센터의 연설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임동원은 감동했다. 북한 핵문제와 관련된 분석과 판단은 예리했고 해결책은 명쾌했다. 통일 철학과 원대한 비전, 그리고 논리 정연함에 깊이 감탄했다. 김대중의 식견이 두려울 정도였다. 임동원은 그때까지만 해도 정치인을 다소 얕보고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달랐다. 자신이 십 수 년 동안 남북 문제에 매달려 왔는데도 이렇듯 고견을 지닌 인물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임동원은 속으로 뇌었다.

'아, 큰 인물이다. 나는 아직 멀었구나. 이런 분이 지난 대선에서 당선되었다면 지금쯤 남북 관계는 큰 진전을 이룩했겠구나.'

당시 김영삼 정부는 북한이 붕괴하기만을 기다리며(붕괴 임박론) 대북 강경책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김영삼 정권에서 남북기본합의서는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아무리 봐도 김대중은 온건하고 현실적이었다. 김대중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다섯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 감옥 생활, 수십 년 연금과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변절하지 않은 '행동하는 양심'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는 그날의 감회를 이렇게 글로 남겼다.

"평화 통일을 말하면 그 순간부터 빨갱이가 되고, 민주화를 외치면 과격 분자가 되고, 정치하겠다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야만의 세월을 의연히 버텨온 그가 바로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임동원이 말했다.

"성심껏 모시고 연구 활동을 돕겠습니다."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보다 김대중과 임동원이 결합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한반도의 역사를 바꾸는 사건이었다. 71세 김대중이 61세 임동원을 얻었다. 삼고초려였다.

김대중은 임동원이 보기만 해도 좋았다. 그런데 집에 들어와 일도 잘하니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자신을 소도둑에 빗대며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임 총장은 정치인 옆에 가본 적이 없다. 요조숙녀를 소도둑놈이 훔쳐온 격이다."

그러면서 "그런 인물을 알아본 자신도 대단하다"고 했다. 모두 임동원을 얻은 기쁨과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 자부심에서 나온 말이었다. 칭찬에 비교적 인색했지만 임동원만큼은 공개 석상에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태재단 사무총장 취임 축하연이 열렸다. 이사장 김대중이 환영사를 했다.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책임감이 강한 공무원, 소신을 굽히지 않은 강직한 성격을 가진 사람, 민족에게 통일의 비전을 제시한 사람으로서 제가 평생에 관심을 가져온 통일 문제 연구에 백만 원군을 얻은 셈입니다."

하지만 임동원의 집으로는 하루에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배신자로 낙인을 찍는 비난 전화가 대부분이었다. 길에서 만난 어떤 이는 "봉변당하면 어쩌려고 혼자 다니느냐"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태재단 사무총장 임동원은 부임하자마자 '김대중 3단계 통일론' 완성에 매진했다. 김대중과 임동원은 만나면 토론을 벌였다. 정중하면서도 자신의 논지에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또 상대의 주장을 경청하고 수긍이 되면 그대로 수용했다. 탁월한 식견과 학구적 자세에 서로가 놀랐다. 치열했지만 돌아서면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최종 원고를 놓고는 호텔방에서 1박2일 동안 독회를 가졌다.

ⓒ프레시안(손문상)

두 사람이 마지막까지 이견 절충을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통일 단계' 설정이었다. 김대중은 남북연합-연방제-완전통일 3단계를, 임동원은 화해협력-남북연합-연방제통일을 주장했다. 임동원은 남과 북의 화해 협력이 통일을 향한 중요한 과정이라고 봤다. 이는 숱한 대북 접촉에서 체득한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남북 간에 합의만 하면 화해 협력 단계 없이도 남북연합은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사실 김대중의 3단계 통일안은 1970년부터 주장한 통일에 대한 '김대중표 공식'이었다. 그 속에는 자존심이 들어 있었다. 결국 임동원은 김대중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김대중의 자존심을 건드리면서까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김대중 또한 이를 도전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상적이며 다소 막연한 학술적 통일론은 임동원의 손을 거쳐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정책으로 거듭났다. 이렇게 해서 '3단계 통일론'이 완성됐다. 훗날 이 책은 국민의 정부에서 대북 정책의 교본이 됐다.

김대중이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신당을 창당했다. 대권에의 마지막 도전이었다. 김대중은 임동원에게 미안했다. 정치인 김대중은 더 이상 아태재단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임동원을 찾아와 우리 민족의 새 길을 내고 싶다며, 그러기 위해 생애 마지막 도전에 나섰음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임 총장, 내게는 세 가지 꿈이 있습니다. 첫째는 박사 학위를 따는 것이고, 두 번째는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삶을 잘 가꿔서 노벨평화상을 받고 싶습니다. 박사 학위는 이미 받았지만 남은 두 가지는 아직 꿈일 뿐입니다."

임동원은 그런 김대중이 부럽고 또 존경스러웠다. 일흔이 넘어서도 꿈을 지니고 있었다. 긍정의 삶을 살고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 임동원에 대한 소문들이 돌았다. 한동안 지역구(서울 송파) 출마설이 돌더니 다시 전국구 후보로 발탁될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잇달았다.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이 어느 날 아태재단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임동원에게 전국구 후보로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김대중은 수첩을 꺼내 전국구 명단을 보여줬다. 5번, 6번 순위만 비어 있었다. 두 말없는 당선권이었다. 임동원은 공손히 거절했다.

"애초 재단에 참여하면서부터 말씀드렸듯이 정치할 생각이 전혀 없고, 국회의원의 적성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아태평화재단을 계속 지킬 것이니 제게는 부담을 갖지 말아 주십시오."

이 말을 듣자 김대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악수를 청했다. 존경의 표시였다.

"다들 국회의원 하겠다고 아우성인데 임 총장은 시켜주겠다고 해도 사양하니 참으로 훌륭한 인품입니다. 고맙습니다."

김대중은 선거에서 이겼다. 마침내 대통령이 되어 두 번째 꿈을 이뤘다. 김대중은 임동원에게 자신의 곁을 지켜달라고 했다. 임동원은 외교안보수석비서관, 국정원장, 통일부 장관, 청와대 통일외교안보담당 특보 등으로 대통령 곁을 지켰다. 그리고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임동원은 욕심이 없었다. 외교안보수석으로 있을 때 국방장관을 시키려하자 끝내 고사했다. 국정원장을 마치고도 쉬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다시 통일부 장관에 임명했다. 야당이 발의한 통일부 장관 해임안이 통과되자 다시 특보로 임명했다. 그 때도 임동원은 이를 강력 고사했지만 대통령의 뜻이 간절했다.

"대통령님, 이제 쉬고 싶습니다. 집 사람과 여행도 하고……."
"임 장관, 민족을 생각해야지요. 햇볕정책을 위해 끝까지 한 배를 타고 갑시다."


퇴임 후 임동원 부부는 김대중을 자주 찾아갔다. 어느새 그의 아내는 임동원보다 더 김대중을 좋아했다. 한 번은 임동원 부부가 서울 조선호텔 중식당에 김대중을 초대했다. 김대중은 중식을 무척 즐겼다. 최고급 세트 요리를 미리 주문했다. 그런데 요리가 나오기 직전 김대중이 메뉴를 바꿨다.

"임 장관 너무 비싸요. 그리고 나는 지금 탕수육이 먹고 싶습니다. 다른 것은 시키지 마세요."

김대중은 평소 강직하고 청렴한 면모로 봐서 퇴임 후 임동원의 형편이 매우 곤궁할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니 돈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임동원 부부의 간청에도 김대중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날 화려한 요리 집에서 전직 대통령과 장관 부부는 오직 탕수육 한 접시와 짜장면으로 식사를 마쳤다. 임동원은 이를 두고두고 후회했다.

'우겨서라도 그때 그 세트 요리를 시켜서 드시게 했어야 했는데…….'

퇴임 후에도 통일과 남북 관계 연설문은 꼭 임동원의 도움을 받았다. 2009년 7월 12일 김대중이 임동원에게 전화를 했다. 유럽상공인회의 초청 행사에서 발표할 연설문을 검토해 달라고 부탁했다. 김대중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대통령님, 목소리가 좋지 않으십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닙니다. 임 장관, 괜찮아요."


그러나 그것이 지상에서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김대중은 다음 날 입원하여 돌아오지 못했다.

김대중과 임동원, 두 사람의 교유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서로를 믿고 존경했다. 민족의 새 길을 여는 동지로서 티끌만한 사(邪)도 없었다. 김대중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임 장관과 같이 일한 것이 15년이 되었다. 그를 만난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 아태평화재단에서 '김대중 3단계 통일론'을 만들었고, 집권 이후에는 통 일 정책을 총괄해서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의 통일 정책에 대한 박식과 성실과 능력은 남북 당국 모두가 높이 평가했다." (2009년 1월 19일)

대통령 서거 후, 임동원은 먼저 떠나간 주군을 이렇게 기리고 있었다.

"저는 너무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바칠 것이 눈물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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