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일 동티모르 대통령 호세 라모스 오르타가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그는 김대중 묘소 앞에서 오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을 찾아가 미망인 이희호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저희 동티모르인 10만 명이 더 죽었을 것입니다. 나라의 은인이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있었는가.
1999년 9월 작은 나라 동티모르에서 유혈 사태가 발생했다. 대통령 김대중은 뉴질랜드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 회의 출국을 앞두고 있었다. 무장 군인들에게 수천 명의 주민이 학살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김대중은 세계 지도를 펼쳐봤다.
동티모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네시아 사이의 섬나라였다. 400년 넘게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다가 1975년 독립했다. 그러나 곧바로 인도네시아가 점령해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후 동티모르에서는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고, 인도네시아 정부는 유혈 탄압을 계속했다.
그런 와중에 1996년 라모스 오르타와 카를로스 벨로 주교가 동티모르의 비폭력 독립 운동을 이끈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후 동티모르 비극은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마침내 국제 사회의 압력에 굴복, 인도네시아 정부는 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 투표를 실시했다.
주민들은 독립에 찬성했다. 이에 반발한 인도네시아 군과 이들이 훈련시킨 민병대가 동티모르 전역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인구의 3분의 1이 죽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의 운명도 경각에 달려있었다. 총소리가 들리면 사람이 죽었다.
새 천년을 눈앞에 두고 아시아에서 야만적인 살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대중은 산 속에 숨어 공포에 떨고 있을 사람들이 생각났다. 시간이 없었다. 행동하기로 했다. APEC이 경제 협력체였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우선 칠레 대통령, 브루나이 국왕, 싱가포르 총리에게 동티모르를 돕자고 설득했다. 그리고 중국 국가 주석 장쩌민에게 말했다.
"동티모르 유혈 사태와 인권 문제는 어떤 식으로도 의사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한·미·일 3국 정상 회담에서도 미국 대통령 클린턴과 일본 총리 오부치에게 말했다.
"아·태 지역의 지도자들이 모여 있는데 동티모르의 비인도적이며 주권을 짓밟는 일에 우리가 입을 다물고 떠난다면 우리 지도자들은 물론 APEC에 대한 비난이 있을 것입니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정상들이 인도네시아 정부에 유혈 사태 종식과 동티모르 독립 승인에 책임을 다하도록 요청하고 유엔에 필요한 일을 하도록 요청할 것을 제안합니다."
클린턴과 오부치는 즉각 화답했다. 폐막을 앞두고 한·미·일 3국은 동티모르 독립을 위해 유엔과 인도네시아 정부가 즉각 나서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신속한 결정은 인류의 보편적인 선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김대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김대중은 인도네시아 재무 장관을 찾아가 정부 차원의 해결책을 마련해 달라고 촉구했다.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만일 이 문제를 묵살한다면 APEC 차원의 성명을 발표할 수 있음을 알렸다. 재무장관은 대통령 하비비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분위기를 전했다.
그날 밤 인도네시아 군부는 '사람 사냥'을 중단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유엔 다국적군 파병을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훗날 라모스 오르타는 미국 대통령 클린턴을 만나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동티모르 사태와 관련해서 보여주신 지도력에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클린턴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께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그의 말을 따랐을 뿐입니다."
유엔 다국적군이 동티모르에 파견됐다. 우리 정부도 파병을 결정했다. 야당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인도네시아와의 관계가 악화될 우려가 있고, 우리 교포들도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김대중은 밀어붙였다. 그리고 두 나라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인도네시아에서는 군부 독재 정치가 종식되었다. 양국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한국이 파병한 상록수 부대는 다시 평화유지군으로 2003년 10월까지 주둔했다. 진료, 방역, 영화 상영, 농기구 정비, 구호품 전달 등 이른바 '푸른 천사' 작전을 완벽하게 마쳐 진정한 천사가 되었다. 지금도 동티모르에서 가장 큰 중심 도로의 이름이 '한국 친구의 길'이다.
동티모르에는 유독 한국인과 관련된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많다. 얼마 전에 상영된 영화 <맨발의 꿈>은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팀과 이들을 지도한 한국인 감독의 이야기를 그렸다. '동티모르의 히딩크'로 불리는 김신환 감독이 불모지의 아이들을 가르쳐 국제 대회 2년 연속 우승을 일구는 기적 같은 이야기를 담았다. 그 기적의 씨앗은 대통령 김대중이 뿌린 것이었다.
김대중은 미얀마의 야당 지도자 아웅산 수치를 각별하게 챙겼다. 아마 수치 여사를 이렇듯 열성을 다해 지지한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1994년 창설한 '아태민주지도자회의'의 첫 의제가 바로 '아웅산 수치에 대한 지원'일 정도였다. 대통령 재임 중에도, 또 퇴임 후에도 일관되게 노력했다.
1999년 11월 필리핀에서 열린 '아세안+한·중·일 정상 회의'에서는 버마 군부 지도자 탄 슈웨 총리를 직접 만나 아웅산 수치 여사와 함께 민주화를 이룩하도록 장시간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자 탄 슈웨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국민들은 군사 정부를 확실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치 여사는 우리 정부가 보호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 정부로는 우리가 마지막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은 내심 놀랐다. 군사 정부의 집권 논리가 어느 나라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퇴임 후에는 미얀마를 직접 방문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 정부는 비자를 발급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그럴 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또 다른 수상자에게 힘을 보태야 했다.
김대중은 2007년 '미얀마 민주화의 밤'을 개최하고 모인 성금을 미얀마 반체제 인사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미얀마 국내 민주 세력의 단결과 궐기를 촉구했다. 표현은 완곡했지만 민주주의는 희생이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김대중은 군부 독재 정권이 바꾼 '미얀마'를 옛 국호인 '버마'로 호칭했다.
"우리는 버마 민주화를 지원하지만 우리가 버마 민주주의를 쟁취해서 버마 국민들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결코 가져서는 안 됩니다. 버마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버마 민주 인사들이고 버마 국민들입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생전에 아웅산 수치를 보지 못했다. 홀로 남겨진 이희호가 그 유지를 받들었다. 2010년 연말에 가택 연금 해제를 축하하는 편지를 보냈다.
"제 남편이 생전에 수치 여사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두 분이 만날 수 있었다면 아시아 민주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수치가 답장을 보내왔다. 민주화 동지로서 애틋한 정이 배어 있었다.
"고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분입니다. 이 곳 미얀마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는 우리 모두는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셨을 때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그분은 대한민국의 최고 직위에 오른 뒤에도 야당 시절과 똑같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 곁을 지켜준 진정한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김 전 대통령의 고귀한 지지를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프레시안(손문상) |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 시절 인권위원회 설립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취임 후 1998년 6월 미국 뉴욕에서 국제인권연맹이 주는 '올해의 인권상'을 받으며 인권법 제정과 국가인권위 설립을 국제 사회에 약속했다. 그러나 인권위 출범은 더뎠다. 법무부와 검찰은 법 제정에 소극적이었다. 자신들의 영역이 침식당할까봐 주춤거렸다. 시민단체 또한 내부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욕심이 문제였다.
김대중은 양쪽을 다그쳤다. 마침내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제정되었고, 11월에 국가 인권위원회가 출범했다. 인권위원회는 곧잘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보건소장직에서 탈락시킨 것은 잘못이다."
인권위의 첫 결정이었다. 정부가 즉각 시정했다. 이로써 야만의 그림자를 몰아내는 인권의 커다란 등이 켜졌다. 세계가 박수를 보냈다.
국민의 정부에서 의문사 진상 규명 특별법, 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등이 제정되었다. 김대중은 법안마다 공개 서명식을 가졌다. 관련 단체와 민주 인사 또는 유족들이 지켜봤다. 전태일 분신 사건, 인혁당 사건, 3선 개헌 반대투쟁, 부마 항쟁 그리고 4·3 사건 관련자들이 명예를 회복했다. 진실이 역사가 됐다. 폭도, 빨갱이란 오명을 씻을 수 있었다. 특히 4·3 사건은 정부 차원의 진상 보고서를 채택했다.
"4·3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일으킨 무장 봉기가 발단이 됐다. 강경 진압으로 다수의 양민이 희생됐다."
죽은 자들은 이제 겨우 '양민'이 되었고, 숨어서 가슴을 쥐어뜯던 유족들은 비로소 눈물을 멈췄다.
우리 근현대사는 온통 피에 젖어 있었다. 그 피를 닦아내지 않고, 억울한 죽음들을 방치한 채 국민 통합과 화해를 말할 수 없었다. 진실을 제대로 밝히는 것은 우리 시대 산 사람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그리고 평화적 정권 교체가 없었더라면 아직도 우리 근현대사는 피를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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