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도예 기술과 장래성은 어떤지요."
"기술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다만 무엇을 만들 것인가 하는 목표 설정이 매우 혼미한 상태인 것 같습니다. 고려나 조선 시대의 복제판을 만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국은 왕조가 바뀌면 도자기의 색깔도 바뀌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입니다. 조선 시대가 끝났으니 새 도자기를 만들 시기인데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도공 뿐 아니라 지식인 모두의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일본과 한국의 현재 기술은 과거 고려나 조선과 비교할 때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까."
"도자기는 모양을 만드는 기술만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도공의 윤택한 마음과 시대를 이해하는 마음이 들어있지 않으면 도자기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일본을 포함하여 지금의 도자기는 기술은 좋으나 윤택한 마음으로 시대를 노래하는, 그러한 점이 부족합니다."
"도자기를 상품화, 상업화하여 그 순수성을 잃게 한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돈에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조선 도자기가 진열된 곳에 깔린 카펫이 가장 빨리 낡아 버린답니다. 본 사람도 자꾸 다시 보고 싶어 관람객이 다른 곳의 세 배나 된답니다. 기술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지만 도자기에 담긴 무심과 무욕이 유럽인들을 매료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경지라고 생각합니다."
가히 고담준론이다. 핵심을 묻고 경청하는 것, 이것이 김대중 내면의 힘이었다.
김대중은 재임 중에 작가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기념하는 토지문화관 개관식에 참석해서 치사를 했다. 대통령은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과 고유의 정서인 한을 극명하게 그려낸 박경리의 노고를 진심으로 치하했다.
대하 소설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입원했을 때에도 비서관을 보내 위문했다. 최명희의 혼이 담긴 문체와 치열한 작가 정신을 기리며 쾌유를 기원했다. 김대중은 의례적인 관심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한 시대를 앞서 살다간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김대중은 미국인 박대인(에드워드 포이트라스(Edward Poitras)) 목사와 깊이 교유했다. 그는 민주화 투쟁의 동지였다. 그가 박두진 시인의 작품을 영역하고 있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박두진 시인은 시와 인품이 곧았습니다. 문학적 공헌과 실제 생활이 일치하신 분입니다."
김대중은 이미 박두진의 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박두진과 최명희는 재임 기간 중에 세상을 떴다. 이를 애석해했다.
1999년 5월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 대학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나는 오랜 옥중 생활을 통해서 러시아 문학을 섭렵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푸슈킨, 레르몬토프,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등 많은 러시아 고전을 탐독했습니다. 그리고 솔제니친이나 사하로프의 작품들도 애독한 바 있습니다. 나는 그때마다 이처럼 위대한 문학을 만들어낸 러시아 국민의 저력과 예술성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제 러시아 문학이 나에게 준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러시아 문학을 읽는 것만 가지고도 감옥에 간 보람이 있었다고까지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이런 연설을 할 수 있는 정치 지도자는 전에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장 한광옥은 골프를 처음 배우면서 대통령에게 골프가 생각보다 좋은 운동이라고 말했다. 김대중이 받아 말했다.
"좋은 운동이지요. 모처럼 자연과 벗도 되고……. 그런데 골프 한번 치려면 서너 시간은 걸리죠? 그렇다면 책을 한권 읽을 시간인데, 독서가 낫지 않을까요."
ⓒ프레시안(손문상) |
퇴임 후에도 책을 놓지 않았다. 비서들은 독서 중독중을 의심하며 걱정했다. 혈액 투석을 할 때도 비서들에게 책이나 신문을 읽어달라고 했다.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못했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러 집을 나서기 직전까지도 책을 읽었다.
김대중도서관 지하 강당 한 구석에는 김대중이 기증한 책들이 꽂혀있다. 손때 묻은 책들을 살펴보면 그의 책에 대한 욕심을 알 수 있다. 김대중의 독서 성향은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잡식'이었으니 그것은 세상 공부였다. 김대중은 곧잘 이렇게 얘기했다.
"바빠서 책을 읽지 못하면 감옥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감옥에서 책이나 실컷 읽었으면 할 때가 많아요."
김대중은 세계 명작이라 불리는 것들은 거의 읽었다. 소(초등)학교 때 세계문학전집을 완독했다. 김대중은 몇 백 년을 살아온 작품은 그렇게 남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했다. 인간의 영혼에서 나온 불멸의 목소리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책을 정독했다. 그리고 독후(讀後)의 여운을 사색으로 이어갔다. 그 내용을 완벽하게 새김질했다. 후세에 남긴 '김대중의 말'들은 이런 새김질의 결과물일 것이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 감각" "행동하는 양심" "기적은 기적적으로 오지 않는다" "철의 실크로드" 등은 사안을 꿰뚫는 명언들이다. 깊은 독서와 사색으로 내부에서 퍼 올린 것들이었다.
김대중은 '문화 산업'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지식 기반 경제 강국이 되기 위한 핵심이 문화 산업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문화 산업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취임 전부터 문화 산업의 가치와 중요성에 주목, 문화 산업의 진흥을 위한 정부의 지원을 강조해왔습니다. 할리우드의 스필버그가 만든 <쥐라기 공원> 한 편이 자동차 수만 대를 수출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창출했습니다. 이것이 문화 산업의 위력입니다."
새 천년의 시작인 2000년의 문화 부문 예산이 사상 처음 전체 예산의 1퍼센트가 되도록 편성했다. 그것은 대통령 후보 김대중의 공약이었다. 김대중은 '적극적으로 지원하되 간섭은 하지 말라'는 정책 기조를 유지시켰다. 정부가 간섭하거나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나라에서는 문화의 창의성이 구현될 수 없다고 수없이 강조했다.
영화의 경우에도 영화진흥회를 설립하고 영화 사전 검열제를 없앴다. 퇴임 후 김대중은 영화인들로부터 상을 받았다. '춘사 나운규 예술 영화제'의 공로상 수상자로 뽑혔다. 수상 이유는 이렇다.
"재임 중 스크린 쿼터를 지키고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보장했으며 1500억 원의 영화진흥기금을 조성하는 등 한국 영화의 장기적인 발전의 버팀목이 되었다."
시상식장에서 많은 영화인들이 김대중을 받들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국민의 정부가 정책적으로 영화 산업의 인프라를 대폭 확충해서 오늘 한국 영화가 르네상스를 맞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민의 정부에서 한국 영화의 도약은 실로 눈부셨다. 해외 유명 영화제에서 잇따라 굵직한 상들을 수상했고 시장 점유율도 치솟았다. 영화 한 편이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믿기지 않는 일들이 벌어졌다. 국민의 정부 초기에 한국 영화는 25.1퍼센트의 점유율에 불과했지만 2001년 50퍼센트, 2001년 48.3퍼센트, 2003년 53.5퍼센트로 높아졌다.
김대중은 드라마를 즐겨보았다. 그것도 사극을 좋아했다. 재임 중 한국방송(KBS) 사장 박권상에게 자신이 방송국 PD라면 세 사람의 일대기를 드라마로 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바로 이순신, 장보고 그리고 전봉준이었다. 역사에 빛날 위대한 인물이었고 그 삶이 극적이었다.
김대중이 특히 좋아하는 전봉준은 서당 훈장에서 혁명가로 변신한 인물이었다. 퇴임 후 이순신과 장보고의 삶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김대중은 이순신을 그린 <불멸의 이순신>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장보고의 삶을 담은 <해신>에는 매우 실망했다. 장보고가 바다의 영웅이 아닌 국내 정치의 희생양 정도로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예술 장르를 가리지 않고 김대중은 생전에 많은 평을 남겼다. 그것들은 비범했다.
김대중은 '문화 대통령'이라 불렸던 가수 서태지도 좋아했다. 서태지 또한 김대중을 찾아오곤 했다. 김대중이 말했다.
"록을 우리 음악에 접목시킨 것이 대단히 돋보입니다."
이쯤 되면 과연 누가 문화 대통령일까. 김대중은 누구보다도 예인들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어느덧 김대중도 자신만의 향기를 지니게 됐다. 오정해, 박찬호, 이선희, 신형원 등 튀임 후에도 동교동 사저에는 수많은 예술가와 스타들이 찾아왔다. 김대중, 그가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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