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재임 중 4대국 외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둘러보면 4대 강국에 둘러싸인 나라는 지구상에 한국뿐이었고, 한반도는 과거 강대국들의 각축장이었다. 열강들의 체스 놀이에 한반도는 말판이 되었고 한국인은 말이 되어야 했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는 작았지만 지정학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김대중은 국내 정치는 실수를 하더라도 수정할 수 있지만 외교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수없이 강조했다.
1998년 11월 11일 중국을 방문했다. 국가 주석 장쩌민의 초청을 받은 국빈이었다. 김대중은 동포들과 간담회에서 주목할 발언을 했다.
"중국은 지금 세계에서 일곱 번째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지만, 중국이 지닌 잠재력은 세계의 첫째가 될지 둘째가 될지 모릅니다.
한국은 4대국 사이에 끼여 있는데, 자칫 잘못하면 찢기고 당할 수 있지만, 잘만 하면 우리의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4대국이 서로 협력하려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색시 하나를 두고 신랑감 넷이 프러포즈를 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외교입니다. 그 가장 중요한 외교 상대 하나가 바로 중국입니다. 그런 점에서 중국은 오늘 이 시점에도 중요하지만 내일은 더 중요한 나라입니다."
주석 장쩌민은 김대중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단독 정상 회담을 시작하며 덕담을 건넸다.
"김 대통령께서는 저보다 불과 8개월 연장으로서 나이가 비슷한데 저보다도 젊어 보이십니다."
"외국에 나가면 나이보다 젊다며 비결을 물어 옵니다. 그러면 오랫동안 군사 독재의 박해를 받으며 지내오는 동안 제 인생이 중단되다시피 했기에 노화도 중단되었다고 답했습니다."
한중 정상 회담은 40분 예정이었으나 무려 100분 동안 진행됐다. 그리고 한중 관계를 '포괄적 동반 관계'로 격상했다. 정상 회담을 마치고 두 사람은 통역 없이 대화를 나눴다. 장쩌민은 민감한 발언을 서슴없이 쏟아냈다.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의 언행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한국의 대통령은 이를 조용히 듣기만 했다. 멀리 보고 있었다. 김대중은 그런 지도자였다.
이날 저녁 주석 장쩌민은 만찬을 주최했다. 만찬 도중 흥에 겨운 장쩌민은 중국 민요 '저녁 노래(夕歌)'를 불렀다. 그리고 김대중은 답가로 이희호와 함께 '도라지 타령'을 불렀다. 만찬장은 화기로 가득 찼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었다. 장쩌민은 김대중을 인간적으로 좋아했다.
총리 주룽지와도 만찬을 가졌다. 김대중은 주룽지에게 다섯 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중국 핵발전소 건설에 우리 기업의 참여, 둘째 완성차 조립 공장 건립 허용, 셋째 우리의 독보적 기술인 음성다중분할방식(CDMA)의 이동 통신 사업 중국 진출, 넷째 중국에 진출한 금융 기관에 대한 위안화 영업 허가, 다섯째 베이징~상하이 고속철도 건설 참여 등이었다.
주룽지는 이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정중하게 말을 보탰다.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닙니다. 김 대통령을 존경하기 때문에 진심에서 하는 말입니다."
당시 중국의 CDMA 채택은 업계의 간절한 바람이었다. 유럽식(GSM)도 중국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때였다. 결국 중국은 CDMA를 채택했고, 한국 휴대전화가 중국 시장을 장악했다. 한국의 이동 전화 전파가 대륙을 뒤덮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 중심에 김대중의 세일즈 외교가 있었다. 훗날 2001년 11월 한·중·일 정상 회담 때 총리 주룽지는 김대중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는 김 대통령을 형님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께서 CDMA 문제를 말씀하셨기에 솔직히 본인이 노력했습니다."
중국 지도자들은 김대중을 좋아했다.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도 <인민일보>는 새벽 1시의 개표 결과를 전하며 김대중의 당선이 확실하다고 보도했다. 중국 신문이 다른 나라 선거 결과를 이토록 신속하게 보도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또 중국 외교부는 "열렬히 환영한다"는 공식 논평을 냈다.
주석 장쩌민은 정상 회담 열흘 후 쯤 일본을 방문하러 한국 영공을 통과하면서 하늘에서 메시지를 내려 보냈다.
"김대중 대통령과 우호적인 한국 국민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귀국의 번영을 기원하며 한중 양국 간 21세기를 향한 협력 동반자 관계의 발전을 희망합니다."
또 2001년 10월 상하이에서 열린 제9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 회의에서도 사뭇 감동적인 일화가 있다. 19일은 장쩌민과 한중 정상 회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외교 관례상 다자 간 정상 회의에서는 번갈아 상대 숙소를 찾아가 회담을 했다. 대한민국이 중국 측 숙소를 찾아갈 차례였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 측에서 연락이 왔다. 장쩌민이 한국 측 숙소로 찾아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내 장쩌민이 나타났다. 한국 대통령 김대중과 중국 주석 장쩌민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가려던 참인데 이렇게 오셨습니다."
"동생이 형님한테 와야지요. 동생이 형님을 앉아서 맞을 수 있습니까."
두 정상은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었다. 이를 지켜보던 청와대 의전비서 김선흥의 눈에는 두 사람이 흡사 천진한 아이 같았다. 사실 당시 김대중은 국내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악재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장쩌민은 그런 김대중을 위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1999년 5월 러시아를 방문했다. 미·중·일 방문을 마쳤고 러시아는 4강 외교의 마지막 나라였다. 당시 세계 언론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건강 이상설을 연일 보도하고 있었다. 옐친은 국빈 만찬장에서도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옐친은 인상적인 만찬사를 했다.
"러시아 심장인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여러분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한국 속담에 '가까운 이웃은 먼 친척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우리 양국은 지리적으로 서로 가까이 위치하고 역사적으로 공통의 운명을 가질 뿐 아니라 민주주의 가치관, 전반적인 평화와 번영을 확보하려는 의지로도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옐친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렀듯이 정이 많았다. 김대중을 껴안고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가 만든 최신형 미사일을 구입하십시오. 성능은 내가 보장하겠습니다."
김대중은 그런 옐친이 안쓰러웠다. 그는 이미 모든 것이 기울고 있었다. 옐친을 상대로 4강 외교의 완성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4강 외교는 정치인 김대중이 1971년부터 구상해온 것이었다. 대통령 후보로 주창했던 4대국 안전 보장론이 바로 미·중·러·일의 불가침 약속을 받아내자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마침내 주변 4대국과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무려 28년을 기다린 집념의 결실이었다. 김대중은 4대국 외교에서 '1동맹 3친선 체제'를 완성했다. 김대중 개인의 눈물겨운 노력의 산물이며 아울러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뽑은 나라의 저력이었다. 평화적 정권교체의 힘이었다.
ⓒ프레시안(손문상) |
하지만 이런 외교적 성과는 다음 정권에 승계되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고 4강 외교는 후퇴를 거듭했다. 2006년 9월 한미 정상 회담을 하러 출국하는 대통령 노무현을 향해 불만을 쏟아냈다. 육필 메모에서 이렇게 꾸짖고 있다.
"현 정부는 미·일·북한 등 가장 중요한 상대들과 관계가 원만치 못하다. 지정학적 입장에서 주변의 미·일·중·러의 4대 강국과의 외교는 국가의 안위를 좌우한다. 안보는 물론 무역, 외국인 투자, 외교 등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98년 정권 인수시 미국, 일본과의 관계는 매우 안 좋았다. 그것이 외환 위기의 큰 원인이기도 했다. 중·러와는 일상적 교역 외에 큰 진전이 없었다. 내가 취임한 이후 4대국 모두와 관계가 크게 개선되고 전 세계가 나의 한반도 햇볕 정책의 지지를 표명했다. 이러한 외교적 성공은 5년 내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후 상황은 급속히 잘못되고 있는 것 같다. 잘못하면 한국은 고립 속으로 갈 우려가 크다. 이미 그러한 분석을 하고 있는 외신도 있다. 이번 부시의 회답이 분수령이 될듯하다. 걱정된다."
이명박 정부 출범 후에는 불만이 분노로 폭발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일관성, 구체성이 없다. 특히 철학이 부족하다."
"남북 경색은 상당히 오래가고 잘못하면 북의 통미봉남의 덫에 걸리게 될 우려. 마치 김영삼 정권의 94년 1차 핵 위기 (때의 실책이 재연될지도.) 당시의 '핵을 가진 자와는 악수하지 않는다'는 강경 태도로 제네바 회의에서 소외되고 거기서 북미 간에 합의된 40억 불짜리 경수로 건설의 70퍼센트 부담이란 짐만 안고 나선 것. 그 7할도 우리의 이름으로는 못주고 미국이란 이름으로 (제공하는) 형태. 한국 외교 사상 최대의 실패작이 되풀이되는 우려 크다."
김대중은 외교가 명줄이라고 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한반도는 4대국 이해가 촘촘히 얽혀 있는 기회이자 위기의 땅이다. 4대국을 잘 활용하면 도랑에 든 소가 되어 양쪽의 풀을 뜯어먹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단합해 있어야 한다. 남북이 협력하여 한반도가 대륙과 해양을 잇는 평화의 다리가 돼야 한다. 나라를 책임진 사람이나 외교관들은 이를 위해 깨어있어야 한다."
이제 김대중은 떠나고 그의 간절한 외침만 남아있다. 지금 4대국과의 관계는 위태롭기만 하다. 한반도가 다시 열강들의 체스놀이에 말판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멀리 보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가슴을 치고 있다. 지금 한반도는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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