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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원조, '배용준'도 아니고 '카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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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원조, '배용준'도 아니고 '카라'도 아니다!

[김대중 평전 '새벽'·37] 한류의 발원지, 김대중

한류의 발원지, 김대중

재일교포 22세 청년 강상중(현재 도쿄 대학 교수)은 1972년 한국을 방문하고 난 후 나가노 데츠오(永野鐵男)라는 일본 이름을 버렸다. 강상중에게 김대중은 "단 하나의 청춘의 상징"이었다. 그런 김대중이 이듬해 일본에서 납치를 당했다. 납치 사건은 강상중의 젊은 날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한국 민주화의 상징적 존재가 도쿄 한복판에서 대낮에 납치를 당하다니……도대체 어떻게 그런 구조적 폭력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공포와 분노가 솟아올랐다. 강상중은 결국 나름의 '구조적 폭력'의 실체를 밝혀냈다.

"나는 비로소 거대한 구조적 폭력을 들여다 본 것 같았다. 한일 유착의 구조와 그것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미국의 압도적인 그림자. 그것이 구조적 폭력의 '정체'임을 알았을 때, 나는 안이한 낭만적 감성에 이별을 고하고 역사적 현실이라는 거대한 존재와 마주하게 되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그러한 구조적 폭력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행된 정치적 테러였다고 할 수 있다." (<반걸음만 앞서가라>(오근영 옮김, 사계절 펴냄) 中)

미국과 일본이 김대중을 살렸지만 결국 납치 사건이 가능하게 만든 것 또한 부도덕한 정권에 미국과 일본이 유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이 강상중을 깨웠다. 이후 그는 현실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손으로는 예리한 글을 썼다.

납치 사건은 수많은 젊은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김대중을 민주화의 상징으로 각인시켰다. 하지만 강상중의 분석대로 정부 간의 유착이 없이는 '납치'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사건이 일어난 나라, 일본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어떤 매듭도 짓지 않았다. 그리고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어 '납치당한 땅'을 밟게 되었다.

1998년 10월 7일 일본을 국빈 방문했다. 당연히 납치 사건의 진상 규명이 현안으로 떠올랐다. 적어도 일본 정부 차원의 매듭이 필요해 보였다. 이때 김대중은 자신이 대통령으로 있는 한 납치 사건을 품속에서 먼저 꺼내지 않기로 했다.

일본 방문 기간 중 어떤 유감도 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옛 동지들 얼굴이라도 한 번 봐야 했다. 민주 투사 김대중을 도왔던 일본 내 인사들을 초청해서 다과를 함께 했다. 납치 사건 진상규명 위원장이었던 덴 히데오(田英夫) 참의원을 비롯해 70여 명이 참석했다.

김대중은 만감이 교차했다. 둘러보니 다들 늙어 있었다. 불같은 열정도 나이를 먹는지, 범처럼 용감했던 옛날은 가고 없었다. 어쩌면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사람들이었다. 때는 가을이라 밤에 만나 술 한 잔이라도 대접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전에 딱 한 시간만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김대중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날의 감회를 훗날 이렇게 정리해 두었다.

"그날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사람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투쟁은 무엇이고, 혁명은 무엇인지, 또 동지란 누구인지 참으로 허허로웠다."

일본 총리 오부치 게이조와 정상 회담을 갖고 '21세기 한일 파트너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때 대통령 김대중은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일본의 대중문화 개방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국내에서는 논란이 거셌다. 일본 대중문화를 섣불리 개방하면 문화 속국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다. 하지만 김대중의 생각은 달랐다.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 문화의 저력을 강조했다.

"우리는 대륙에 혹처럼 붙어 있으면서도 중국에 동화되지 않았어요. 주변국들은 모두 흡수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살아남았어요. 그것은 독창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문화를 받아들여도 우리식으로 재창조했다 이겁니다.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였어도 우리의 해동불교로 발전시켰고, 유교를 들여와서도 조선 유학으로 심화시켰습니다."

김대중은 우리 문화의 잠재력을 믿었다. 우리 것들은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아도 깊은 맛이 배여 있었다. 문화 약소국이 아님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숱한 침략과 함께 그 많은 이민족 문화가 흘러들어왔어도 우리 것으로 여과시켰다. 실로 문화 강국이었다. 특히 한국 전쟁을 전후해서 수많은 이질적, 퇴폐적 문화가 들어왔지만 이를 모두 우리 것으로 정화시켰음을 주목해보라고 했다.

김대중은 문화 개방에 자신이 있었다. 우선 문화예술인들의 창의력이 비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였다. 어떤 제약도 없이 그 창의력에 날개를 달아준다면 세계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문화는 나라 간의 교류를 통해 서로 배운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문화의 역류를 우려해 쇄국 정책을 편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김대중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대중문화 개방 이후 드라마, 영화, 대중음악 등이 일본에 상륙했다. 한국의 스타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이른바 한류(韓流)가 생겨났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 흐르는 한류의 발원지는 대통령 김대중이었다. 배용준에서 최근의 장근석까지 숱한 예인들이 일본의 별이 되었다. 훗날 걸 그룹 '카라'의 엉덩이춤이 일본인 모두를 춤추게 할 줄은 몰랐겠지만 김대중의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한 번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국립박물관에서 우리나라 전통보자기를 관람한 적이 있었어요. 조선 시대 배우지도 못한, 일테면 우리 어머니, 누이들이 만든 것이었어요. 그런데 그 솜씨가 비범했어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 호롱불에서 만들었을 텐데 세계 어디다 내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어요. 우리는 고품격의 문화 유전자를 지닌 것 같아요."

한류가 소멸될 위기를 맞았다며 언론들이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라고 호들갑을 떨 때가 있었다. 김대중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 문화를 쉽게, 간단히 볼 일이 아닙니다. 우리 문화는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지 않았어요. 그것은 위대한 조상들이 물려준 소중한 것입니다."

ⓒ프레시안(손문상)

대통령 김대중은 참의원 본회의장에서 연설을 했다. 언론의 관심은 대단했다. 730명쯤 되는 중·참의원 중에서 527명이 참석했다. 일본 국회연설 사상 가장 많은 의원들이 참석했다. 이날 연설은 공영방송 NHK가 전국에 생중계했다. 김대중은 의미 있는 연설을 했다.

"기적은 기적적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한국의 민주화, 특히 한국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는 한국 국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기적입니다. 우리 국민과 저는 이처럼 값지게 얻은 민주주의를 흔들림 없이 지켜나갈 것입니다."

이 연설은 일본인들을 아프게 했다. 일본은 아직 민주주의를 쟁취하지 못했다는 지적일 수 있었다. 의회 연설 다음날 정계 지도자 초청 대담에서 도이 다카코 사민당 당수는 속내를 솔직히 드러냈다.

"어제 '기적은 기적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본회의에서 연설하신 것 중 하나의 명언으로 남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정치인들로서 꼭 지켜야 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을 '가장 존경하는' 강상중이 동교동에 찾아와서 김대중에게 답을 구했다. 세상을 뜨기 넉 달 전이었다. 김대중은 일본 정치의 위기를 '민주주의'에서 찾았다.

"일본의 민주주의는 맥아더가 와서 선물로 준 게 아니었던가요? 그래서 민주주의의 기반이 다소 분명치 않은 건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흔들립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처럼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운 기억이 없지 않습니까? 어쩌다 보니 손에 들어온 민주주의라 별로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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