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평전 <새벽> 제2부 연재를 시작합니다. 한 주에 두 번(월, 목요일) 게재될 제2부는 대통령 재임기와 퇴임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제1부가 김대중의 도전과 응전의 삶을 조명했다면 제2부에서는 철학과 비전 그리고 최후의 열정을 담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증언을 보태 진솔하고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김대중을 함부로 얘기하고, 심지어 그 이름을 팔아 입신양명에 활용하려는 무리들이 들끓는 시점입니다. <새벽>에서는 대통령 김대중이 누구였고 무엇을 추구했으며 무엇을 남겼는지 진지하게 탐색할 것입니다. 그를 다시 불러오겠습니다. <필자> |
대통령으로 첫 밤을 맞았다. 어둠은 누리에 평등하게 내렸다. 경축 사절을 접견하느라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했지만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김대중은 자신에게 주어진 어둠이 낯설었다. 청와대 관저는 너무 넓었다. 노부부에겐 불편할 뿐이었다. 푸른 기와만 얹었을 뿐이지 근육질의 건물들은 정감이 없었다. 관저와 집무실도 너무 멀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치가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는 사람 찾기가 쉽지 않았다. 김대중은 내내 외로웠다.
대통령 김대중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취임식장의 환성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도대체 모든 것이 어수선했다. 국회에서 김종필 총리 임명 동의안은 표결도 하지 못했다. 대통령이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거대 야당은 이를 간단히 일축했다. 한나라당은 똘똘 뭉쳐서 대통령을 공격했다. 앞날이 심상치 않았다. 세계의 축복을 한 몸에 받았지만 밤이 되자 혼자였다.
'나를 탄압했던 독재자들도 이곳에서 잠을 못 이루며 번민을 거듭했을 것이다. 저들과 나의 차이는 과연 무엇인가.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나라를 개조해야 한다.'
ⓒ프레시안(손문상) |
김대중은 당선되자 곧바로 숱한 전문가들을 만나 수많은 개혁 리포트를 점검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한국 전쟁 이래 최대 국난이라는 외환 위기를 맞고 있었다. 한 손에는 개혁 프로그램을 쥐었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달러를 구걸해야 했다. 한 손으로는 개혁의 칼을 빼들고 있었지만 다른 한 손으로는 곧 무너지려는 나라의 기둥을 붙잡고 있는 형국이었다.
자유민주연합(자민련)과의 공동 정부는 그 앞날이 순탄할 수 없었다. 야당과 협상하기 전에 자민련을 설득해야 했다. 보수 색채의 자민련은 또 다른 벽이었다. 때때로 딴전을 피우거나 몽니를 부렸다. 대통령 김대중의 뜻과는 상관없이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크고 작은 다툼을 벌였다. 자민련은 소수 정권의 약점을 여지없이 파고들었고, 국민회의에서는 자민련과의 권력 나누기에 속으로 들끓고 있었다.
김대중 정권이 출범하면서 외신들은 현실적 어려움을 경제에서 찾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내부에, 그리고 '정치'에 있었다. 그것은 대통령이 되었어도 반(反) 김대중 정서가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것들은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표출되었다.
사회 곳곳에서 '반 김대중 기류'가 감지되었다. 우화 같은 실화를 옮겨보겠다. 존경하는 언론계 선배가 있었다. 그는 경상도 출신이었다. 그러면서도 지역 색이 전혀 없었고, 경상도 사람끼리 '뭉쳐서 해쳐먹는데' 곧잘 분노했다. 경상도 독재에 환멸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 선배가 존경스러웠다.
마침내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선거가 끝나고 존경하는 경상도 선배와 몇이서 술을 마셨다. 얘깃거리는 당연히 극적인 승리였고 모두 기분 좋게 취했다. 그런데 늘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던 사람 좋은 선배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취흥이 높아가고 있을 때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자슥들, 그렇게 존나."
바로 존경하는 선배였다. 일순 술자리는 얼어붙었다. 그는 이제까지의 그가 아니었다.
"이놈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끝이 없고만.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전라도 세상이 온 줄 아는가 본데, 택도 없는 소리다. 그래 잘해 보거라, 많이들 해쳐 먹거라."
끝내 선배는 전라도 정권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를 퍼부었다. 술자리는 거기서 끝났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경상도 선배가 보여준 그간의 언행은 승자의 아량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경쟁은 '경상도 사람끼리'여야 했다. 권력이 호남으로 넘어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회 곳곳에 그런 기류가 나타났다. 지지자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지켜보며 마음을 졸여야 했다. 어느 날 보니 전라도 사람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주변의 안색을 살피기에 급급했다. 김대중은 모가 아프도록 개혁을 외쳤고, 반 개혁 세력은 빈틈을 노렸고, 김대중 지지자들은 초조했다.
공직 사회에서도 저항은 있었다. 끼리끼리 모여 앞날을 걱정했다. 또 책상을 치는 부류도 있었다.
"저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까."
1998년 3월 권영해 전 안전기획부 부장이 자해 소동을 벌였다. 이른바 '북풍 사건(북한을 이용해 김대중 집권을 저지하려던 공작)'으로 구속되어 검찰의 조사를 받다가 문구용 칼로 자신의 배를 그었다. 그는 "선거에서 진 패장이니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구악(舊惡)을 일소하겠다는 국민의 정부에 피를 뿌리며 저항했다. 당시 나는 이런 칼럼을 썼다.
전 안기부장이 검찰에 피를 뿌렸다. 자신을 패장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그에겐 적(敵)이 있었다. 그 적은 누구인가. 소름이 돋는다. 그에게 지난 대통령 선거는 축제가 아니었다. 전장(戰場)이었다. 그의 적은 나라 안에 있었고, 패배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그러자 어떤 정당은 이를 '중대 사건'으로 규정했다. 북풍 공작 수사 자체를 공작이라고 공격했다. 그 후 거센 북풍은 미풍으로 변했다. 자해였는지, 자살 기도였는지, 연필 깎는 칼을 성경에 넣어 왔는지, 아니면 변기를 깨뜨려 그 파편으로 배를 그었는지. 적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가 어디를 향해 피를 뿌렸는지, 모든 게 궁금할 뿐 나머지는 국민들의 상상에 맡겨진다.
환란(換亂)의 주범으로 지목, 검찰이 칼을 들이대자 강경식, 김인호 씨 같은 이들은 "증거를 대라"고 소리친다. 나아가 국회에서 떳떳하게 말했다. "구속이 두렵지 않다. 경제를 살릴 수 있다면 나를 밟고 가라"고. 누구를 향한 호통이며 협박인가. 물론 한국 경제는 오래전부터 무너져 내렸다. 차입 경영, 문어발 확장, 정경 유착, 고임금, 노동 시장 경색, 선진국 망상, 계산 안 된 세계화, 공무원 부패……. 이런 것들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정책 표류에 이어 환란이 왔다.
그래서 그 끝에 서 있던 자신들은 억울하다는 말이 일견 그럴 듯하다. 역사의 죄인이 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경제가 무너지는 소릴 들으며 경고 방송 한번 하지 않은 그들이 무엇을 믿고 큰소리치는가. 그들을 믿고 따른 국민들을 무엇으로 보는가.
김영삼 전 대통령은 어떤가. 처음엔 모두 내 탓이라고 했다. 하지만 검찰에 보낸 소위 환란 답변서란 걸 보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총론은 '내 탓'이지만 각론은 '모두의 탓'으로, 정치권을 포함한 여러 무리들에게 책임을 돌렸다. 정치권은 기다렸다는 듯 이른바 '환란 책임' 공방을 지금까지 벌이고 있다. 물론 증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환란의 본질이 서서히 희석되고 있다. 또다시 국민들이 남은 의혹들을 이리저리 굴려보며 사태의 전말을 상상으로 꿰맞춰야 하는가.
왜 우리에겐 정확한 매듭이 없는가. 문제만 있고 답이 없는가. 결과만 있고 책임은 없는가. 왜 소문이 세상을 지배하는가. 이번만은 안 된다. 국민들은 더 이상 구경꾼만 될 수는 없다. 나라가 무너졌는데, 국민 가슴 가슴이 무너졌는데 이대론 안 된다. 가정이 붕괴되고, 아이들이 버려지고, 가장들이 목숨을 끊고 있다. 가정 파괴범과 간접 살인자들을 색출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검찰은 그 큰 칼로 모든 연줄을 끊어야 한다.
요즘 검찰이 이상하다. 왠지 서둘고 있다. 왜 그런가. 혹 정치 일정에 맞추려 하는가. 대통령의 지적대로 환란의 책임이 검찰에도 있기 때문인가. 하지만 검찰의 방황도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 가장 따스한 건 국민의 품이다. 검찰은 환란의 범인들을 모조리 잡아 역사에 던져야 한다. 그래서 환란의 매듭을 지어야 한다.
대통령과 새 정부도 매듭짓기에 주저하는 것 같다. 일처리가 시원찮다. 자꾸 앞뒤를 쳐다보는 것 같아 보는 사람이 오히려 불안하다. 고통은 이미 시작됐다. 망설일수록 고통의 그림자만 길어질 뿐이다.
국민만이 개혁의 버팀목이다. 표심(票心)을 좇지 말고 민심을 따라야 한다. 아픔 없이 어찌 개혁을 할 수 있는가. 새 출발을 위해 한점 의혹 없이 매듭을 지어야 한다. 제살을 도려내는 아픔이 있더라도.' ('개혁과 매듭짓기', <경향신문> 1998년 5월 13일자')
김대중은 '각하'라는 칭호를 쓰지 말라고 했다. 언제부터인지 각하라는 말 속에는 다른 음험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군사 정권에서 자기네끼리 자신들을 높여보려고 했다. 박정희는 쿠데타로 각하가 됐고, 전두환 노태우는 각하를 모시다가 스스로 각하가 되었다. 정통성이 없기에 더욱 높은 존칭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군부 정치의 소굴로 들어간 김영삼도 순순히 '각하'가 되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달랐다.
"대통령이라는 말 자체가 높임말입니다. 보통 말할 때는 대통령이라 부르고 정 서운하면 님 자 하나를 붙이면 좋겠습니다."
김대중은 이 땅에서 각하라는 호칭을 추방했다. 그 이후 대통령들도 각하라는 말을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또 관공서 등에 대통령 사진을 걸지 말라고 했다. 대통령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동사무소와 파출소까지 대통령 사진을 걸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또 휘호를 제작해 붙이거나 돌에 새기는 일을 삼가도록 했다. 대통령 김대중에게 휘호 요청이 헤일 수 없이 많았다. 각 부처는 물론이요 여기저기서 대통령의 글씨를 요청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모두 거절했다. 권력이 시들면 함께 사라질 것임을 김대중은 잘 알고 있었다.
예외적으로 국가안전기획부를 국가정보원(국정원)으로 바꿀 때 새로 정한 원훈을 써준 적이 있었다. '정보는 국력이다'가 그것이었다. 원훈이 마음에 들었고, 순수 정보기관으로 거듭날 것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휘호를 썼다. 국정원은 김대중의 휘호를 돌에 새겨 세웠다.
그로부터 10년 후 이명박 정권은 국정원 원훈을 바꿔버렸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이 그것이다. 얼핏 공포의 제3공화국 중앙정보부 원훈과 닮았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향한다'와 색깔은 물론 냄새 또한 비슷하다. 검은 선글라스가 어른거리고, 왠지 비릿하다. 어쨌든 김대중의 휘호는 국정원 마당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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