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books'는 2012년 신년호를 '내가 사랑하는 저자'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열두 명의 필자가 사랑하는 저자와 만났던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독자 여러분도 사랑하는 저자와 만나는 기쁨을 누리길 기대합니다. |
거대 담론의 시대는 끝났거나, 끝났다고 계속 선포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현상들을 종합할 수 있는 어떤 '시선'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주어지는 정보를 종합하여 일관된 서사를 만들어내고, 그 속에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배치시키고 싶다. 하지만 이념의 시대도, 뒤따라 등장한 '문화'의 시대도 이미 끝난 지 오래다. 대체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이 자본주의적 삶과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포착해낼 수 있을까?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모음 펴냄)는 등장과 함께 눈 밝은 독자들의 환호성을 불러왔고, 여러 매체로부터 호의적 서평을 받았다. '프레시안 books'는 2011년의 책 중 하나로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소개했는데 그 역시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지면에서 굳이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전에 <인터페이스 연대기>(디자인플럭스 펴냄)를 쓴 작가 박해천을 통해, 위 문단에서 꺼낸 문제의식을 다루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거대 담론 없는 시대의 거대 담론'은 어떻게 시도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지금까지 한국 지성계가 시도하지 않은 경로의 도전이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거창한 논의를 위해 잠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 문장이 담긴 그 대목을 다시 불러와보자.
결국 비판의 화살들은 내 몸에 수북이 박혀 생매장의 말 무덤을 만들지만, 나를 향한 욕망의 불도저는 막지 못한다. 나는 담론의 가상 세계에선 언제나 패배하지만 현실 세계에선 백전백승이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물론 내 비판자들은 나름 전문가이긴 하다. 지면만 허락된다면, 그들은 거시 경제학자의 시선으로 아파트 분양가나 매매가의 상승 추이에 따라 유동 자산의 흐름을 분석하고 사회 경제적 함의를 밝혀낼 것이며, 문화사회학자의 관점에서 '강부자'로 표상된 특정 계층의 속물적 행태를 분석하고 가속화된 공간의 계급적 분화에 관해 울분을 토해낼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56쪽,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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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크리트 유토피아>(박해천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
미셸 푸코의 이름이 한국의 지성계에서 떠돌기 시작한지 20여 년이 지났고, 그의 논의를 비판하거나 이어받은 여러 학자들도 덩달아 수입되었다.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 역시 그런 이름 중 하나다. 그리고 박해천은 바로 그 아감벤의 '장치'라는 개념을 원용하여,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대량 생산된 아파트가 당시에 떠오르던 신중산층을 흡수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습속"을 불어넣는 기제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습속의 확산, 바로 이것이 앞서 언급한 내 비판자들이 헛물만 켠 채 백전백패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치명적 함정이다. 그들은 내가 지닌 공간의 논리가 거주자들의 신체와 정신과 맺고 있는 관계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내놓는 해결안 대부분은 그들 자신의 무능을 증명할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그들은 아파트 투기 열풍이 부동산 거품 붕괴를 재촉해 결국엔 경제적 대재난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정부의 주택 정책이 소유 중심에서 거주 중심으로 전환해야 하며 부동산 관련 세제 정비, 임대 주택 공급, 분양가 상한제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67쪽)
아파트라는 공간, 즉 '장치'가 그 속에 사는 이들의 신체 및 정신을 뒤바꿔놓는 방식. 그로 인해 발생하는 한국 사회의 욕망의 정치학. 이런 종류의 논의를 담아낼 수 있는 담론적 양식은 아직까지 한국의 지성계에서 개발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박해천은 '픽션'이라는 표제 하에 본인이 아닌 아파트의 목소리를 끌어와야 했던 게 아닐까? 박해천은 인간 대 인간, 정당 대 정당, 권력 대 권력의 정치학이 아닌, 인간과 사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양상에 대해 사회적인 차원에서 서술하기 시작한 최초의 한국어 화자다(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렇다).
인간과 사물의 관계, 그것은 다른 말로 (몇 단계의 논의를 생략해서) '인터페이스'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인터페이스 연대기>의 서문에서 그는 "이 개념(인터페이스)은 컴퓨터 스크린의 표면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행동반경을 넓혀가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인공 환경의 접촉면을 지시하는"(8쪽)것이라고 말한다. 스마트폰의 터치스크린만이 인터페이스가 아니고, 스티브 잡스가 '와우'를 연발하며 시연한 그 매끈한 UI(유저 인터페이스)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피부 바깥에 있는 것, 심지어 잘 '관리'된 피부마저도 인터페이스의 영역으로 수렴될 수 있다.
요컨대 인터페이스는 '인간'이 '인간을 뺀 모든 것'과 만나는 방식이 되며, 그리하여 한 디자인 연구자는 자신의 전문 영역으로부터 나선형으로 발걸음을 넓혀나간다. 그런데 그가 만나게 되는 것은 이미 거대 담론이 전부 죽어버리고, 그 거대 담론의 빈자리를 메우겠다고 도입된 온갖 현대 철학들이 제 쓸모를 잃고 주례사 비평에 소진되어버리고 있는, 혹은 그 잘난 '번역 논쟁'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는, 속된 말로 '고자'가 되어버린 한국의 담론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지식인 한 명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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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페이스 연대기 : 인간, 디자인, 테크놀로지>(박해천 지음, 디자인플럭스 펴냄). ⓒ디자인플럭스 |
우리가 살아온 20세기 후반, 그리고 21세기 초까지, 이 모든 '현재'를 지배하는 구조는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의 담론계는 그 세계사적 사건을 '민족 동란'으로 축소하거나, '자본주의의 연속적 진행 과정'으로 지나치게 확장하는 두 가지 선택지 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전자와 후자 모두 수입된 이론을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이론을 구성하고 그것으로부터 현실을 해석하는 방법론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 역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박해천은 디자인의 역사에 등장한 핵심적인 '사물'들을 먼저 검토한다. 그것이 앨런 케이가 디자인한 최초의 GUI(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건, 대한민국을 욕망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양산형 콘크리트 유토피아건, 그 사물들은 이론보다 앞서 우리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브루노 라투어의 용어를 빌자면) '행위자(actor)'로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과도 네트워크되어 있다. 인간과 사물 사이의 위계를 먼저 설정하고 그것들의 구성과 변화를 추적해야만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사람이 아니라 사물들을 먼저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질서, 즉 미국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전후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워낙 흥미진진한 담론적 성과가 최근 10여 년간 전무했던 탓에, 흥분한 내가 '오버'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앞서 언급된 두 책을 읽은 후 박해천이 준비하고 있다는 세 번째 단행본의 제목을 슬쩍 엿듣고 나면 아마 당신도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그 단행본의 가제는 <인터페이스 연대기>의 보론으로 삽입된 글의 제목과도 같다. "우리, 파시스트 : 테크놀로지의 강철 폭풍". 그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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