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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모으기 운동, '대통령 김대중'의 아이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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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금 모으기 운동, '대통령 김대중'의 아이디어!"

[김대중 평전 '새벽'·33]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

김대중의 '준비된 대통령'이란 외침은 멀리 깊이 퍼졌다. 선거판에 여러 가지 좋은 조짐들이 나타났다. 여당에서 떨어져 나온 후보 이인제는 보수와 영남 표를 잠식했다. 환란에 이은 IMF 구제 금융 신청은 경제 대통령을 자임한 김대중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 김종필은 색깔론 공세와 지역 감정 조장을 일정 부분 희석시켰다. 또 김원기, 노무현 등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인사들이 합류해서 개혁적 이미지를 떠받쳐주었다. 일찍이 이보다 유리한 선거 환경은 없었다.

1997년 12월 17일, 선거는 하루 밖에 남지 않았다. 김대중은 서울 시내 열두 곳을 찾아갔다. 마지막 유세는 명동 입구에서 열렸다. 겨울 해는 짧았다. 어느 새 어둠이 내렸다. 거리는 청중이 가득했다. 생애의 마지막 유세였다. 지든 이기든, 이제는 더 이상 표를 달라고 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최후의 연설을 했다.

"조그만 섬 하의도에서 태어나 이만하면 출세했습니다. 그러나 40여 년간 갈고 닦으며 준비해 온 것들을 국가와 민족을 위해 꼭 한 번 써보고 싶습니다. 저는 감옥에서도 미국에 망명 중일 때도 대통령이 될 준비를 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대통령이 될 준비를 저만큼 많아 한 사람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저에게 꼭 한번 기회를 주십시오. 잘 할 수 있습니다."

청중이 김대중을 연호했다. 거리에는 불빛들이 출렁거렸다. 사회자 김민석이 소리쳤다.

"내일 이 나라 정권이 교체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탄생합니다. 고난의 시대가 끝나고 희망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김대중은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판세는 박빙이었다. 누가 이길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12월 18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그래도 선거 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저 남쪽 전라도 사람들은 이심전심으로 숨죽이며 투표율을 지켜보고 있었다. 초반에 투표율이 높으면 경상도 기권자들을 자극할 수 있었다. 서남쪽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선거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대중의 마지막 도전이면서도 당선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전라도 사람들은 오전 투표를 자제했다. 그날 오후 3시 광주의 투표율은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 살얼음이 언 강물 위를 걷는 것처럼, 어두운 밤길에 촛불을 받쳐 든 것처럼 모두 조심했다. 누구는 휘파람을 불지 않았고, 누구는 손발톱을 깎지 않았다. 크게 웃지도 않았다. 거기에는 이념도, 논리도 없었다. 오직 김대중만이 있었다.

김대중은 아내와 함께 투표를 했다. 그날 오후 서울 삼성의료원을 찾아갔다. 선거 전날 사랑하는 동생 대의가 세상을 떠났다. 김대중은 동생 대의의 유언을 듣고는 가슴을 쳐야 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형님께 누가 될 수 있으니."

고령에다가 건강 시비에 휘말린 김대중에게 '동생이 먼저 죽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리가 없었다. 동생은 김대중보다 먼저 죽는 것을 미안해했다. 늘 뒷전에서 그림자로 살았지만 끝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형을 보고도 아우는 말이 없었다. 김대중은 오열했다.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시작되었다. 출구 여론 조사는 김대중이 1퍼센트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개표 초반에는 이회창이 앞서다가 이후 한동안 엎치락뒤치락 혼전을 벌였다. 이윽고 밤 10시가 지나자 김대중이 앞서기 시작했다. 새 역사가 펼쳐지는 감동적인 시간들이었다. 자정께 김대중의 당선이 확정되었다. 제15대 대통령이었다.

김대중 1032만 6275표, 이회창 993만 5718표, 이인제 492만 5591표.

새날 새벽이 밝았다. 일산 김대중의 집 앞에 사람들이 몰려왔다. 물어물어 찾아들었다. 집을 알고 있는 사람도 "대통령의 집이 어디냐"고 소리 내어 물었다. 참말로 대통령이 되었냐는, 꿈은 아닐 것이라는 확인이었다.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울렸다. 그러나 돌아서서 우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하여간 김대중 선생 때문에 미치겠구먼."

'애국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김대중이 당선되면 왜 그런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정확히 몰랐다. 그저 누가 부르니 모두 따라 불렀다. 마침내 눈물 나게, 참말로 눈물 나게 김대중이 이겼다.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뤘다.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백성이 권력을 바꿔버렸다. 민중의 위대한 승리였다.

사형수에서 대통령으로. 우리 역사에 이런 인물은 없었다. 야당 후보가, 고졸 학력으로, 서자 출신이, 재혼한 사람이, 섬사람이, 전라도 사람이, 70대 고령으로, 네 번째 도전 끝에 당선됐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김대중의 호는 출생지 지명에서 따온 '후광'이었다. 후광리는 하의도의 간척지였으니, 호처럼 김대중은 바다를 메워 길을 내는 고난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마침내 나라를 책임지는 단 한사람이 되었다. 외신들은 일제히 김대중에게 경배했다.

"영원한 반대자의 역사적 승리"
"한국 민주주의의 혁명"

12월 30일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3군 지휘부가 있는 대전 계룡대를 방문했다. 정적들이 '김대중의 최대 비토 그룹'이라고 떠벌린 군의 심장부였다. 김대중은 차기 군 통수권자였다. 본청 계단에 이르자 장성 70여 명이 도열하여 경례를 올렸다. 이들 어깨에 달린 별이 120개였다. 이들과 오찬을 함께했다. 3군 총장이 차례로 건배사를 바쳤다.

"통수권자에게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지난날이 험했으니 앞날은 따사로워야 했다. 그러나 나라 경제는 수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나라 빚이 얼마나 되는지 도대체 가늠할 수도 없었다. 김대중은 당선되자마자 나라 곳간부터 열어보았다. 금고는 텅 비어 있었다. 국가 부도 위기는 진행형이었다. 식물 대통령 김영삼을 대신하여 동분서주했다. 달러가 들어온다면 누구든 만났다. 차기 대통령 김대중의 독백이 아직도 가슴을 친다.

"그동안 벌어놓은 국제적인 명성이 있다면 이를 팔아 달러로 바꾸고 싶었다."

그 말은 빈 말이 아니었다. 세계는 김대중을 믿고 한국을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졌다. 백성들이 나라의 빈 곳간을 자신들이 지닌 금붙이로 채워 넣었다. 은행마다 금붙이를 든 사람들이 줄을 섰다. 날마다 감동이었다.

사실 금 모으기는 김대중의 아이디어였다. 구한말 국채 보상 운동을 벌였듯이 집집마다 장롱 속에 숨어있는 금을 모으면 외환 위기를 타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비자 단체 간부들과 간담을 하면서 제안한 것이었다. 금 모으기는 외국인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었다. 세계가 감동했고, 그들은 한국의 미래를 믿기 시작했다.

199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이 있었다. 김대중은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고 공무원 출근 시간인 오전 9시에 청와대로 들어섰다. 정적들이 김대중을 향해 끊임없이 화살을 날리던 철옹성, 그곳에 당당히 입성(入城)했다. 김종필 국무총리 및 한승헌 감사원장 임명 동의안에 '김대중'이라고 한글로 서명했다. 첫 공식 업무였다.

취임식장으로 향했다. 날씨는 맑고 포근했다. 국회 앞 광장에는 4만여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전직 대통령이 모두 참석했다. 김대중은 취임 선서를 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 문화 창달에 노력하며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프레시안(손문상)

이렇게 '국민의 정부'로 이름 붙여진 새 정권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나는 취임식을 지켜보고 '대통령 김대중'(<경향신문> 1998년 2월 26일자)이란 칼럼을 썼다.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장엔 햇살이 쏟아졌다. 눈부셨다. 취임사를 하던 그는 목이 메었다. "모든 영광과 축복을 국민에게 돌린다." 그렇다. 그는 암흑 시대에 지지자들이 놓아준 눈물의 강, 그 강줄기를 타고 올라가 마침내 대통령이 됐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를 열망했던 사람들도 목이 메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열성적인 지지자들과 헤어져야 한다. 그들은 국민으로 편입됐다.

그는 더 오를 곳이 없다. 실패하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과거의 좌절은 오를 곳이 남아있기에 극복되었다. 하지만 이후부터 그의 실패는 민족의 실패이다. 지면서도 사실은 늘 이겨왔던 고난의 과거가 아니라 패배가 곧 국가파멸로 이어지는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다. 실패한 대통령은 갈 곳이 없다. 아무도 눈물의 강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제 대통령의 길만이 남아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인기를 버려야 한다. 국민으로 편입된 지지자들은 감시자로 바뀌었다. 그런 국민을 지지자로 착각해선 안 된다. 박수와 환호 속에 묻힐 것을 생각하지 말고 국민의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챙겨야 한다. 언론 동향에 너무 촉각을 곤두세우지 말고 준비된 대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인기란 것은 소신과 철학을 삼키는 거품일 뿐이다.

또 함부로 구호를 외쳐서는 안 된다. 구호는 정략이며 선동에 불과하다. 민족 중흥, 정의 사회 구현, 신한국 창조, 세계화 등 숱한 구호가 지금은 어찌 되었는가. 빛이 강할수록 그 반대편의 어둠은 더 짙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특별한 구호가 없는 이번 취임사가 솔직히 더 믿음직스럽다.

또 하나 측근들이 둘러칠 인의 장막을 걷어내야 한다. 측근들을 나무라고 경계해야 한다. 평생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에 몸 바쳤는데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는 측근이 있다면 그건 가짜다. 그런 사람의 말을 듣고 실패한 대통령이 된다면 가장 먼저 욕하며 떠나갈 사람이다.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밀실에서 나라를 요리한 대통령, 측근들을 줄 세우고 골목성명을 발표하여 부하들을 깡패로 만들고 자신은 골목대장이 된 대통령도 있잖은가. 바라건대 인기·구호·측근을 멀리하라.

이제까지는 백성의 눈물을 닦아만 주면 됐지만 앞으로는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게 해선 안 된다. 김대중 지지자들을 한번만 더 울게 하라. 이임하는 노대통령이 못내 아쉬워 울게 만들어 달라. 모든 게 눈부셨던 취임식 날 대통령 김대중이 목메었듯 나라를 위해 온몸을 태운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 사람들을 목메게 하라.

김대중 지지자들이 지금 일제히 숨죽이고 있다. 그 이유를 그는 알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계층, 김대중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무리들이 허점만 노리고 있다. "그래, 그렇게 원하니 한번쯤 해봐라"라는 승복 아닌 승복을 한 사람들에게 그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지지자들은 또 마음 졸이고 있다. 박해받은 자의 용서·화해와 통합의 정치도 성공했을 때만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대통령 김대중, 그가 끌고 온 고난의 생애가 앞으로의 5년을 위해 준비되었다는 걸 믿는다.


김대중 평전 <새벽> 제1부를 마칩니다. 그간 애독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필자의 취재가 완료되면 재임기와 퇴임 후의 이야기인 <새벽> 제2부를 싣겠습니다. 거듭 많은 성원에 고맙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편집자>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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