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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DJ가 JP와 손잡은 결정적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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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DJ가 JP와 손잡은 결정적 이유는…

[김대중 평전 '새벽'·32] 마지막 도전, 열두 고비를 넘어

마지막 도전, 열 두 고비를 넘어

1997년은 대통령 선거의 해였다. 김대중은 다시 선거에 나섰다. 네 번째 도전이었다. 나이 73세였다. 일생에 마지막 출마였다.

자유민주연합(자민련) 후보는 총재 김종필로 결정되었다. 여당은 당명을 민주자유당(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는 총재 이회창이 승리했다. 이회창은 후보 확정 이후 지지율이 급락했다. 반면 후보 경선에서 떨어진 이인제의 지지도는 상승했다. 이인제는 여론 조사 결과를 내세워 후보 교체를 주장했다. 그렇다고 물러날 이회창이 아니었다. 이인제는 결국 탈당하여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곧바로 출마했다.

<경향신문> 창간 특집 여론 조사(10월 6일)에서는 김대중이 압도적 선두였다. 김대중 35.8퍼센트, 이인제 24.2퍼센트, 이회창 20.3퍼센트, 조순 7.2퍼센트, 김종필 4.4퍼센트였다. 이회창은 이인제보다 뒤졌다. 그러나 김대중은 불안했다. 정부 여당의 네거티브 공세 때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수첩의 메모에는 여권의 공세를 예상하고 사안별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3김 청산-나는 모든 희생 다해서 민주주의 여기까지 온 데 참여했다. 군사 정권이나 부정 부패와 관련 없다. 나의 입장은 (다른 김 씨들과) 다르다.

세대교체-건강과 능력이 문제다. 전두환 40대, 노태우 50대, 김영삼 60대였지만 모두 실패했다. 나는 건강하다. 내게는 나라 일을 바로잡을 철학과 준비가 (되어)있다.

20억 (수수)-나는 정당하게 밝혔다. 다른 사람들은 숨겼다. 정당한 사람은 죄를 받고 숨긴 사람들은 상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정계 은퇴 공약 (번복)-비판 감수하겠다. 정부나 야당이 나라 망치는 것 묵과할 수 없어서 사명감 때문에 나온 것 이해해 달라. 정계 복귀해서 국민회의 만든 후 전·노 비자금, 광주 학살, 노동법 날치기, 한보 비리 등의 척결 등에 최선 다한 것 인정해 달라. 우수한 인재도 우리 당에 가장 많이 모였다.'

김대중은 이렇게 단단하게 준비하고 있었지만 여권은 전혀 다른 건을 준비하고 있었다. 10월 7일 '김대중 비자금 사건'을 터뜨렸다. 이회창의 지지율이 제자리에 머물자 서둘러 마련한 것이었다. 사무총장 강삼재는 김대중이 670억 원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고 폭로했다. 또 노태우로부터 20억 외에 6억 정도를 더 받았다고 주장했다.

10월 10일 김대중이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10개 기업으로부터 134억 원을 받았다고 추가로 발표했다. 대변인 이사철이 눈을 부릅떴다. 이회창은 "이번 선거는 혁명적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라며 폭로전을 부추겼다. 10월 14일 국회 국정 감사장에서도 추가로 폭로했다. 일가, 친인척 40여 명의 명의로 10년간 378억 원의 비자금을 관리해왔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정형근, 홍준표가 나서서 침을 튀겼다. 신한국당은 김대중을 특정 범죄 가중 처벌법상 뇌물 수수 및 조세 포탈 혐의로 대검찰청에 고발했다.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연일 터뜨렸다. 의혹은 삽시간에 산더미처럼 커져버렸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김대중은 치명타를 입을게 뻔했다. 김대중의 주변을 뒤지고, 주변 사람들을 소환하고, 당사나 사무실 등을 압수 수색하면 모든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언론이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중계하면 선거는 그걸로 끝이었다. 신한국당은 연일 수사를 촉구하며 검찰을 압박했다.

그러나 훗날 선거가 끝나고 비자금 사건을 수사하자 이 모든 폭로는 조작이었음이 드러났다.

아무튼 김대중에게는 최대의 위기였다. 이때 검찰총장 김태정은 비자금 사건 수사를 15대 대통령 선거 이후로 유보한다고 발표했다.

"과거의 정치 자금에 대해 정치권 대부분이 자유스러울 수 없다고 판단되는 터에 대선을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에서 이 사건을 수사할 경우 극심한 국론 분열, 경제 회생의 어려움과 국가 전체의 대혼란이 분명하다고 보인다."

검찰총장의 발표는 사실 민심이 선택한 것이었다. 시중에는 또다시 김대중에게 사건을 조작해서 불이익을 안긴다면 민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김대중은 자민련 후보 김종필과 후보 단일화에 매달렸다. 김종필을 잡아야 했다. 선거판은 마지막에 결국 지역 감정을 일으키게 되어 있었다. 이를 방어하기에는 충청권의 맹주 김종필이 필요했다. 당내에서는 재야 출신 소장파들이, 당 밖에서는 종교계 등 재야 인사들이 반대를 했다. 그러나 색깔론 망령과 3당 합당 이후 호남 고립의 정치 구도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후보 단일화가 절실했다.

필요한 것은 정권 교체였다. 역으로 그런 점을 잘 알기에 김종필과 자민련은 한껏 몸값을 올렸다. 차고 다니던 주머니에서 내각제를 꺼냈다. 후보를 양보하는 대신 많은 것을 얻겠다는 것이었다. 김대중과 국민회의는 양보를 거듭했다. 내각제 개헌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김대중(DJ)과 김종필(JP)의 연합(DJP)이 성사됐다. 두 사람은 이렇게 합의했다.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총재로 단일화하고, 집권 시 실질적인 각료 임명 제청권과 해임 건의권을 갖는 실세 총리는 자민련 측에서 맡도록 한다."

ⓒ프레시안(손문상)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의 김원기 대표와 노무현, 김정길 등 8인의 상임집행위원들이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김대중은 이들을 크게 반겼다. 백 만의 원군을 얻은 듯했다.

김대중의 국민회의 창당으로 당세가 극도로 위축된 민주당은 서울 시장 조순에게 총재직과 대통령 후보를 제의했다. 조순은 시장실을 박차고 나와 대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조순은 자신을 너무 믿었다. 서울 시장에 당선시킨 것이 김대중의 힘이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서울 시장 당선 후에도 그는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김대중 씨가 내 도움을 받았지, 내가 김대중 씨의 도움을 받지는 않았다."

조순의 지지도는 형편없었다. 처지가 참으로 딱했다. 그런 조순을 이회창이 노려보고 있었다. 가만히 다가가 낚아챘다. 이회창과 조순은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치는 데 합의했다.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꿨다. 이렇게 선거 한복판에서 민주당이 사라져 버렸다. 어지러운 합종연횡이었다.

대선 정국은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자 대결로 재편되었다.

선거 막판 대한민국에서는 경제신탁통치라는 굴욕적 상황이 전개됐다.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한국 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었다. 30년 동안의 고도성장 신화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IMF 실무단이 한국에 날아와 구제금융 조건 등을 따지고 돌아갔다. 마침내 IMF총재 미셀 캉드쉬가 서울로 날아왔다. 그리고 대선 후보들을 불러 합의문 이행각서에 서명토록 했다. 무능한 대통령 김영삼은 이를 바라만 봐야했다.

정부와 여당이 다시 색깔론 공세를 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그냥 지나갈 무리들이 아니었다. 전 천도교 교령 오익제가 월북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한때 국민회의 종교특위 위원장이었다. 그러자 공안 당국과 한나라당은 그의 월북에 김대중이 연루됐을 것이라며 칼을 들이댔다. 언론은 '오익제가 평양방송에 나와 국민회의 후보와 월북 직전까지 통일 문제를 자주 상론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당국자의 말을 인용했지만 공작에 동조한 것이었다.

북한을 방문한 재미 목사를 사주하여 일본 도쿄에서 회견을 하도록 했다. 북한 부주석 김병식이 김대중에게 보낸 것이라며 세 통의 편지 사본을 공개했다. "지금이야말로 이남에서 자주적 민주 정권이 서야 한다. 선생이 대선에서 꼭 승리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북풍의 위력은 현저히 약화되어 있었다. 유권자들은 이미 김영삼이 5년 전에 일으킨 북풍이 결국 허풍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대중에 대한 건강 이상설도 퍼뜨렸다. 그리고 정식으로 건강을 문제 삼았다. 사실 시중에는 건강에 대한 여러 소문들이 돌아다녔다.

"길을 걷다 쓰러졌다."
"회의 도중 신기하 의원을 찾았다."

신기하는 이미 비행기 추락 사고로 괌에서 숨진 사람이었다. 김대중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받은 종합 검진 결과를 공개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시비를 걸어왔다.

지역 감정의 망령도 되살려냈다. 한나라당 측은 "이인제 지지는 곧 김대중 당선"이라고 선전했다. 5년 전에도 그랬다. "정주영 지지는 곧 김대중 당선"이라 했다.

김대중에게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지지자들은 다시 마음 졸이며 이를 지켜봤다. 모든 것이 아슬아슬했다. 김대중에게는 닥친 위기는 열두 번도 넘었다. 그 때마다 위기가 호기로 반전되었다. 이때 비로소 텔레비전 토론이 성사되었고, 항간의 음해나 공작은 본인이 직접 해명할 수 있었다. 김대중은 시청자들에게 준비된 대통령임을 알렸다. 마지막 토론회에서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호소했다.

"불행히도 저는 세 번이나 도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국민들이 저를 이때에 쓰려고 뽑아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위기의 강을 건너는 다리가 되겠습니다. 모든 분이 제 등을 타고 위기의 강을 건너십시오. 저는 다음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두 분은 다음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저에게 꼭 한 번 기회를 주십시오."

김대중은 부모의 묘를 이장했다. 경기도 이천으로 옮겼다. 묘 자리가 명당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거처도 동교동을 떠나 일산으로 옮겼다. 김대중이 천주교 신자임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주변의 요청을 뿌리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이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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