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시·도의원 선거가 34년 만에 부활되어 1995년 6월 27일 치러지게 됐다.
민주당은 김대중을 찾았다. 지원 유세를 강력하게 요청했다. 동교동 집에는 후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김대중은 정당 연설회 연설원으로 등록했다. 전국을 돌며 다시 유세 강행군에 돌입했다. 가는 곳마다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우리는 김대중을 기다린다.'
김대중은 김영삼 정부의 실정을 공격했다. 그리고 '지역 등권론(等權論)'을 주장했다. 지역 패권주의와 지역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TK와 PK 패권주의 속에서 살았습니다. 특정 지역이 모든 권한과 혜택을 독점하고, 나머지 지역은 소외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6·27 지방 선거를 계기로 지역 패권주의는 결정타를 입을 것입니다. 이번 선거로 패권주의가 아닌 등권주의,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으로 대등한 권리를 가진 지방화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언론에서는 "지방 선거의 결과에 따라 김대중의 정계 복귀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도 행간에는 '선거를 통해 김대중의 정계 복귀가 무산될 것'이라는 속내를 드러냈다.
선거 결과는 여당인 민자당의 참패였다. 15개 시·도지사 선거에서 겨우 5곳에서만 승리했다. 서울 시장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조순, 무소속의 박찬종에 밀려 3위를 차지하는데 그쳤다. 민주당은 광역 단체장 4명, 기초 단체장 84명을 당선시켰다. 특히 서울에서는 시장을 비롯해 구청장 25명 중 23명, 133명의 시의원 중 122명이 당선되었다.
언론 보도대로라면 김대중은 정계 복귀의 길이 열린 셈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에는 대표 이기택이 버티고 있었다. 이기택은 여당이 주장했던 세대 교체론을 들먹거렸다. 정치판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김대중과 이기택은 지방 선거 공천 문제로 이미 갈등을 빚었다.
경기도지사 후보로 김대중은 이종찬을, 이기택은 장경우를 밀었다. 김대중의 간곡한 설득에도 이기택은 장경우를 고집했다. 만일 장경우가 패하면 대표직을 내놓겠다며 버텼다. 결국 장경우는 선거에서 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기택은 약속을 뒤집었다. 지방 선거에서 이겼으니 대표직에 눌러앉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민주당에는 9개 파가 있었다. 이기택과 각 계파의 두목들은 뭉쳐서 김대중의 입성을 저지하고 있었다.
결국 김대중은 민주당과 결별했다. 온갖 애환이 스며있는 마포 당사도 포기했다. 그런 것들에 집착을 했다가는 여론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김대중의 정계 복귀 명분은 '야당다운 야당의 재건'이었다. 김대중은 정계 복귀 관련 이런 소회를 글로 남겼다.
'나는 내가 없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다시 돌아섰다. 화려하게 등장했던 문민 정부는 '문민 독재'라는 신조어를 낳아놓고 있었으며 그 복지부동 속에서도 인천과 부평에서는 세금 도둑 사건이 터졌다. 곧이어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아현동 가스 폭발로 이어졌다. 국민들은 하나같이 다음에 일어날 대형 사고는 하늘일 것인지 바다일 것인지 점치기도 했다. 국민들의 자조감만 날로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특히 야당의 행태가 못마땅했다. 민주당은 내가 일구어낸 정당으로 내 분신이면서 동시에 전부이기도 했던 정당이었다. 그런데도 야당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여당의 독주를 수수방관 할 뿐이었다. 그들은 예산 심의도, 추곡 수매 문제도, 또 국정 감사도 전부 포기하면서 정부와 여당이 좋아할 일만 자행하고 있었다.'
정치인들이 일시적으로 은퇴했다 다시 돌아온 경우는 많았다. 드골 전 프랑스 대통령도, 닉슨 전 미국 대통령도 은퇴했다가 다시 나왔다. 김영삼도 1980년 10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가 복귀해서 대통령을 하고 있었다. 훗날에는 노무현에게 선거에서 지고 은퇴 선언을 했던 이회창도 슬그머니 정치판에 돌아왔다. 그러나 김대중에게는 '어물쩍'이 통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돌을 던졌다. 그래도 김대중은 참아야 했다. 꼭 다시 돌아가 정치를 해야 했기에.
김대중은 마침내 7월 18일 정계 복귀를 천명했다. 은퇴를 선언한 지 2년 7개월만이었다.
"저는 지난 40년 동안 많은 시련을 무릅쓰고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이제 그 노력의 완성을 신당을 통해서 이룩하여 국민 여러분께 마지막 봉사를 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비판이 반드시 국민적 수용과 지지로 변화될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너그러운 심정으로 지켜보아 주시고, 저희들이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 때는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가장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국민 여러분께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편, 신당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국민적 여망을 책임 있게 달성하는 정당으로 발전함으로써, 오늘 제 결단의 충정이 국민 여러분으로부터 이해와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바쳐서 노력하겠다는 점을 아울러 다짐하는 바입니다."
'마지막 봉사' '가장 겸손한 마음' '사과의 말씀' 등의 문구를 동원하여 국민의 이해를 구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여권은 일제히 포문을 열고 거짓말쟁이, 대통령 병 환자라며 공격했다.
김대중은 정말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다. 평생 품고 있었던 두 가지 꿈, 민주주의 국가 완성과 민족통일에 기여하고 싶었다.
김대중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신당을 창당했다. 당명은 새정치국민회의였다. 김대중은 당 총재로 추대되었다. 1995년 9월 5일 창당 대회가 열렸다.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대회는 7시간 동안 진행됐고, 1만 여명이 지르는 함성이 드높았다.
노태우의 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노태우가 비자금 4000억 원을 차명으로 은행에 분산 예치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국민들은 경악했다. 검찰은 수사에 착수했고, 노태우는 10월 27일 대국민 사과를 했다. 재임 중 5000여억 원을 조성해서 사용하고 현재는 1700억 원 정도가 남아있다고 밝혔다.
노태우는 눈물을 흘렸다. 민심이 들끓었다. '노태우 비자금'은 정국을 강타했다. 이어서 여권에서는 비자금 일부가 김대중에게도 흘러갔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대중은 중국 방문 중에 그 같은 소식을 들었다. 김대중은 댜오위타이(釣魚臺)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나 당시 대통령인 노태우에게 20억 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김대중이 그토록 서둘러 고백한 것은 김영삼이 들어앉아 있는 청와대와 노태우가 웅크리고 있는 연희동 측이 모종의 결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김대중 죽이기'로 나타날 수 있었다.
노태우의 혐의에 대해서는 적당히 수위를 조절하고는 김대중에게 화살을 돌릴 수도 있었다. 여권이 김대중의 '20억 수수'를 몰랐을 리 없었다. 기자가 김대중에게 20억 원 수수 사실을 밝히게 된 동기를 묻자 "연희동 측이나 여권이 화살을 나에게 돌리려 해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먼저 자신과 관련한 모든 정치 자금 의혹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나는 20억 원을 받았지만 김 대통령은 당시 노(태우) 씨는 물론 각계로부터 엄청난 돈을 받았다."
ⓒ프레시안(손문상) |
하지만 현직 대통령 김영삼은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5년이 넘게 지난 후 노태우로부터 3000억 원을 받았음이 드러났다. 3000억 원 대 20억 원. 혹자는 그리 말한다. '받은 사실이 중요하지 액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그러나 어찌 3000 대 20이 같을 수 있는가. 아무리 높은 도덕성을 요구받은 김대중이지만 참으로 억울했을 것이다.
김대중의 말대로 '정치는 생물'이고 그런 만큼 정치는 돈을 먹어야 했다. 과거 우리 정치는 돈이 많은 것들을 움직였다. 김대중도 돈에 자유스러울 수 없었다. 끊임없이 돈을 만들고 끊임없이 돈을 써야 했다. 김대중은 평소에 "부정하거나 문제가 있는 돈, 대가가 있는 돈은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는 역으로 돈을 받았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김대중은 일생 궁핍했다. 늘 돈 때문에 걱정이었다.
김대중에게 돈을 준다거나 편의를 봐주는 것은 모험이었다. 정보 기관이 몇 겹의 그물을 치고 감시했기 때문이었다. 걸리면 끝이었다. 작은 도시에서 음식점을 하던 여주인이 유세차 내려온 김대중에게 끼고 있던 반지를 건넨 적이 있었다. 그 음식점은 다음날 영업 정지를 당했다.
대우그룹 회장 김우중은 그럼에도 김대중이 야당을 꾸려갈 때 용감하게 '모험'을 했다. 김대중에게 김우중은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후 대우그룹이 해체 위기를 맞았다. 빚더미의 대기업들이 구조 조정을 서두는데도 대우그룹은 덩치를 키웠다. 김우중은 김대중을 만나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김대중은 독대를 하지 않았다. 면담 때는 곁에 꼭 수석 비서나 관료를 배석시켰다. 대우그룹은 끝내 해체되었고, 김우중은 해외를 떠도는 낭인 신세로 전락했다.
돈에 얽힌 얘기가 많다. 지방자치제 도입을 관철시키기 위해 단식 투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김대중이 탈수 현상을 보이자 주변 사람들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다. 당시 김대중의 단식과 그의 몸 상태는 국민적 관심사였다. 공보비서 김한정은 당보 발행 계획을 보고하러 김대중을 찾아갔다.
김한정은 단식 투쟁 속보 발행을 맡아하고 있었다. 왜 지방자치제를 해야 하며, 총재 김대중은 왜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하는지를 싣기로 했다. 김한정은 당보 30만 부를 발행하여 지구당에 보내겠다고 보고했다. 김대중은 그 와중에서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반으로 줄이세요. 지금 우리가 돈이 없어요."
목숨을 건 단식을 하면서도 총재가 돈 걱정을 하고 있었다. 김한정은 서둘러 병실을 나와 하늘을 보았다.
또 김대중은 노벨평화상 상금 11억 원 중 3억 원만을 김대중도서관에 기부했다. 사람들은 전액을 쾌척하지 왜 그리 소심하냐고 생각했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상, 상 중의 상을 받았으니 보람되게 쓰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은 8억 원을 남겨두었다. 아마 자신이 먼저 떠나면 홀로 남겨질 아내를 위해 쓰이길 바랐을 것이다. 실제로 민주화의 산실이며 김대중의 꿈과 고뇌와 눈물이 스며있는 이희호 명의의 동교동 집은 이런저런 이유로 수억 원에 근저당권이 설정되어 있다는 소식이다.
일각에서는 이러다 압류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와 탄식이 흘러나오고 있다. 또 김대중의 유산을 보존하고 계승하기에는 '김대중평화센터'도 작고 가난하다. 그럼에도 세간에는 김대중이 엄청난 재산을 숨겨두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냥 굴러다니고 있다.
아무튼 김대중은 노태우에게 돈을 받았다. 현직 대통령이 격려금으로 준 돈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정하게 모은 돈을 받은 것은 큰 잘못이었다. 김대중에게 20억 수수설은 당시에도 곤욕을 치렀지만 일생에서도 큰 오점이었다. 금전 관련 그동안 숱한 루머와 악선전에 휘말렸어도 이렇듯 자신의 입으로 사과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김대중은 훗날 이를 자책했다.
"받아서는 안 될 돈이었다. 국민에게 고백은 했지만, 돈과 관련된 추문이었으니 내 정치 인생에서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김대중의 고백에도 여권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김대중이 받았다고 자백해버리자 그것 말고도 또 있을 것이라며 몰았다. 20억 +α설이 그것이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자꾸 커지더니 노태우는 물론 전두환까지 구속되는 사태로 비화했다. 김영삼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 바로 세우기'를 내세워 5·18 특별법을 만들었다. 신군부 세력이 줄줄이 끌려나와 법정에 섰다. 검찰이 출두를 요구하자 전두환은 자신의 집 골목에서 성명을 발표했다.
김영삼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김영삼 정권의 출범 경위, 김영삼의 역사관을 문제 삼았다. "내란 세력과 영합해온 김 대통령도 응분의 책임을 져야하는 것이 순리"라고 말했다. 신군부의 소굴로 들어간 김영삼을 질타하고 있었다.
이때 정치권에는 대통령 김영삼을 향해 칼을 가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종필이었다. 김영삼과 상도동계는 3당 야합의 동지인 김종필을 '세계화'의 바람으로 날려버렸다. 이벤트성 깜짝쇼를 좋아하는 김영삼은 호주 시드니구상이라며 갑자기 세계화를 외쳤다.
실무 부처들은 전혀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데 세계화를 추진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김종필은 세계화의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고 연일 면박을 주었다. 당시 주류인 상도동계는 김종필을 당 대표로 인정하지 않았다.
잇단 수모를 당하자 처세의 달인 김종필도 배겨내지 못했다. 민자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김종필은 다시 소수 정당의 수장으로 전락했다. 주머니 하나 달랑 차고 이리저리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는 내각제 문서가 들어 있었다. 김대중은 그런 김종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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