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1995년 1월과 2월에 SBS에서 방영했다. 평균 시청률이 50퍼센트가 넘어 밤이면 거리가 한산했다. 그래서 '귀가시계'라 불리기도 했다.
드라마 배역 중에서 가장 비열한 깡패 두목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악질 깡패만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했다. 같은 고향에서 자란 젊은이들의 이야기인데도 주인공들은 전라도 말을 쓰지 않았다. '나쁜' 조연은 전라도 사투리로 거짓말을 토했다. 천신만고 끝에 다시 정계 복귀를 모색하던 김대중은 신음을 토했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래시계>를 만든 사람들, 감독이나 피디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당시 정치부 기자였던 강신철은 그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 나쁜 배역은 전라도 사투리를 써야 하는가. '전라도 출신들은 거의 믿을 수 없으니 의심하고,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무의식이 시킨 것인가. 비단 <모래시계>만이 아니었다. 사기꾼, 거짓말쟁이는 물론이고 파출부, 수다쟁이, 공사장 인부 등 이른바 우리 사회 하층민들은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 김대중은 또 이렇게 말했다.
"수십 년 동안 특정 지역을 차별하면 그 지역민은 저급한 문화를 지닌 열등한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지역 차별이 무서운 것입니다. 인재 등용, 지역 발전, 문화의 혜택 등에서 전라도는 줄곧 소외되었습니다. 물론 약간의 문화적, 지역 이기주의에 의한 차별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이 의도적으로 한 지방을 비호하고 한 지방을 차별했습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지역 차별 정책은 계속되었습니다. 과거 군사 정권 그리고 영남 패권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사람들은 역사에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 해악은 실로 가늠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지역 감정의 최대 피해자임에도 정적들은 김대중을 지역 감정의 화신으로 매도했다. 김대중은 선거 때마다 지역 감정에 피눈물을 흘렸다. 김대중은 곧 전라도이고, 전라도는 소수였다. 김대중이 등장하는 역대 선거는 정부 여당에서 보면 어쩌면 가장 쉬웠다. 김대중을 전라도와 함께 묶어버리고 붉은 물만 끼얹으면 선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김대중은 그렇게 매번 졌다. 식견이나 정책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정부 여당의 선거 전략이라는 것이 지역감정 조장이었다.
'전라도에는 저열하면서도 위험한 사람들이 모여살고, 그곳에 김대중이란 두목이 있고, 그 두목은 빨갱이고, 그럼에도 전라도 사람들은 김대중을 열렬히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 '90퍼센트가 넘게 김대중을 지지하는 것을 봐라. 상식적으로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상식적인 집단이 아니다'고 은밀히 퍼뜨렸다. 90퍼센트가 넘게 지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나 피맺힌 사연들은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아니 들을 필요가 없었다. 선거가 다가오면 대한민국은 문명 사회를 팽개치고 부족 사회로 들어갔다. 지역 연고가 판단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처음에 전라도 사람들은 김대중이 전라도의 한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믿었고 그래서 김대중이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독재와 맞서 분연히 일어나 당당히 싸우는 모습을 보며 환호했다. 그러나 전라도 출신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선거에서 자꾸 떨어지자 오기가 발동했고, 오기가 분노로 변했다가 이내 한(恨)으로 굳어졌다. 한은 김대중의 말대로 보복으로서는 풀리지 않았다. 또 보복을 할 수도 없었다. 전라도 사람들의 한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돼야 풀렸다. 그래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모든 전제나 조건 등을 삭제해버렸다. 김대중이 대통령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경상도 정권은 그동안 전라도와 김대중을 함께 묶어 고립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러다보니 전라도는 점점 '이상한 고장'이 되어갔다. 전라도는 외로운 섬이었다. 전라도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끝없이 지속되자 전라도 사람끼리도 서로 삿대질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언제까지 천대를 받아야 되는가. 제발 저들에게 책 잡히지 말자. 우리가 잘해서 전라도 사람들도 괜찮다는 이야기 좀 들어보자."
전라도 사람들은 세상을 조심조심 건너야 했다. 전라도 사람이 모여 살면 그곳은 빈촌이었다. 늘 당하면서도 뾰쪽한 수가 없었다. 조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적당히 타협을 해야 했다. 전라도를 고향으로 등에 지고 있으면 무겁기만 했다. 살아가는데 최대의 걸림돌이며 수모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고향을 숨기고 사투리를 감췄다. 자신이 태어난 땅을 저주하는 일, 이보다 더 잔인할 수가 있는가. 우리 사회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전라도 사람인데도 용케 그 자리까지 갔다."
유능하다는 말이면서도 그 속에는 얼마나 잘 보였으면 출세했겠느냐는 비아냥이 숨겨져 있다.
경상도 정권이 들어선 후 경상도는 모든 게 '긍정적인' 땅이었다. 가수 김상희는 유행가 <경상도 청년>을 불렀다.
내 마음을 나와 같이 알아줄 사람은 / 경상도 그 청년 한 사람 뿐입니다. / 덥수룩한 얼굴에 검은 수염은 / 나이보다 칠 팔세 위로 보이지만 / 구수한 사투리에 매력이 있어 / 단 한번 데이트를 하였답니다.
경상도 사나이에 대한 노래지만 왠지 '경상도 찬가'로 들린다. 물론 김상희는 그런 뜻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모래시계> 제작진도 악의는 없었는지 모른다. 극적 사실감이나 생동감을 불어넣다보니, 사투리를 고르다보니 무심코 그리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무심코'는 얼마나 섬뜩한 것인가. 그 속에는 엄연한 사실(事實)이 숨어있다.
경상도 사람들은 사투리를 버리지 않는다. 경상도 사투리는 입에 달고 다닐수록 자랑이었다. 매우 시끄럽고 발음이 불분명해도 흉이 아니다. 그러나 전라도 사투리는 성공한 사람들이 입에 달고 살아서는 안 되었다. 5·18 민주 항쟁을 정면으로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조차도 주인공들은 전라도 말을 일체 쓰지 않는다. 출신이나 직업이 그렇고 그런 조역들만 전라도 사투리를 '사정없이' 쓰고 있다.
시중에 유통되는 말 중에 경상도 청년은 있지만 전라도 청년은 없다. 경상도 사나이는 있지만 전라도 사나이는 없다. 전라도는 '개똥쇠'와 '리꾸사꾸' '더블백'들만 살고 있는 '하와이'에 불과했다. 지난 거의 반세기 동안의 지역 차별은 이렇듯 사람과 땅마저 비틀어버렸다.
김대중을 가장 정확하게 '계산'했던 전인권은 남진 보다 나훈아를 더 좋아'해야만'했던 이야기를 이렇게 털어놨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남진과 나훈아는 우리나라 가요계를 양분했던 인기 가수였다. 그런데 나와 내 친구들은 한결같이 나훈아를 좋아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남진은 전라도고 나훈아는 경상도였기 때문이다. 이게 1960년대 후반 경상도가 아니라 강원도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지금도 나훈아를 좋아한다.
남진은 왠지 간사스럽고, 주는 것 없이 밉고, 금방이라도 거짓말을 할 것 같다는 것이 내 친구들의 느낌이었다. 반면 나훈아는 투박하고 씩씩하고 남자답고 사나이의 의리를 지킬 것같이 보였다. 약간 소도둑놈(?)을 방불케 하는 나훈아의 그 못생긴(?) 얼굴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모른다. (…) 간사한 것보다 진실한 것, 계집애 같은 것보다 사나이다운 것, 전라도보다 경상도적인 것이 좋다는 것을 배워야할 나이였다. 이쯤 되면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스토리는 연예계의 뒷이야기 수준을 넘어 우리의 정신세계에도 매우 체계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김대중을 계산하자> 중에서)
전라도는 그러나 사투리까지 차별을 받는 그런 변방이 아니었다. 김대중은 대통령 퇴임 후 새로 지은 전남 도청사에 들러 이순신 장군이 말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방명록에 서명했다.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자부심의 표출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전국토가 유린당했다. 명나라 원군이 오기 전까지는 전 국토 중에서 오직 호남 한 지역만 남아 있었다. 호남이 없었다면 망국의 비운은 피할 수 없었다.
정유재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원균은 처절하게 패했지만 이순신은 남은 배 12척으로 일본 전함 133척을 물리쳤다. 이순신과 호남 사람이 있어 왜란을 막아 낼 수 있었다. 경상도 청년, 경상도 사나이가 아니라 전라도 청년과 전라도 사나이들이 나라를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그 땅 위에서 여전히 전라도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에게 투표를 했다고 고백한 김수환 추기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지역 감정이 크게 완화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선거를 앞두고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나는 오랫동안 소외돼온 사람들과 뜻을 함께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김대중은 낙선을 위로하러 온 추기경에게 이렇게 말했다.
"호남 사람들이 선거 때마다 김대중을 찍은 것이 아닙니다. 그 동안 당한 푸대접이 하도 서럽고 억울해서 그들은 각자 자기 자신에게 투표한 것입니다."
ⓒ프레시안(손문상) |
김대중은 이렇게 호남 사람들의 한이 자신을 통해 표출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했다.
"그 당시 선거(1992년)가 끝나고 광주에서 발행한 신문을 보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김대중 씨가 강원도에서만 태어났어도 이미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난 이 말을 들었을 때 호남 사람인 그 사람의 심정을 생각하며 얼마나 가슴이 쓰렸는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그가 그런 말까지 했겠는가를 생각하니, 고마움과 슬픔이 교차하여 눈시울이 젖어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여보시오, 그런 말은 꿈에도 하지 마시오. 나는 호남 사람인 것을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못 되어도 좋습니다. 추악한 지역 감정에 굴복하거나 영합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습니다.'"
김대중은 전라도 출신이었기에 대권은 멀고도 멀었다. 다시 말하지만 김대중을 떨어뜨리는 데는 지역 감정만 자극하면 그만이었다. 김대중은 전라도와 함께 추락을 거듭했다. 모든 선거 전략은 '호남 고립 작전'이었다. 호남은 늘 소수였고 '졸'이었다. 그래서 김대중은 전라도에 내려가면 안 되었다. 지역감정을 선동한다고 몰아 부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었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울고 있다.
"고향의 품에 안겨 실컷 울고 싶을 때도 많았다. (…) 전라도 사람의 한을 알고 있으나 나는 그걸 다 풀어드리지 못했다. 모든 지역 감정의 부정적인 부산물이 호남 지역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어찌할 수 없었다."
대흥사 아래 여관동네/술 파는 할머니/막걸리와 도토리묵 차려 주고/앞치마에 눈물 찍는다.
우리 선생님/고생도 징허게 많이 허신 양반/떨어져도 눈물 나고.../되야도 눈물 나고…
김장배추 뽑아 어수선한 밭에/진눈 마른눈 퍼부어쌓는데/말 못하는 진눈깨비도/옳은 말씀이라고
떨어져도 눈물 나고…/되야도 눈물 나고…
(심호택, '1997년 겨울 해남')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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