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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김일성 전쟁' 막은 사람, 카터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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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김일성 전쟁' 막은 사람, 카터 아니다!

[김대중 평전 '새벽'·29] 국민은 나를 버려도…

국민은 나를 버려도 나는 국민을 버릴 수 없다

영국 케임브리지에서의 생활은 시간이 보일 만큼 여유로웠다. 김대중은 패배의 상처를 조금씩 닦아냈다. 확실히 과거의 망명과는 다른 시간들이 주어졌다.

책을 읽고 숲길을 걸으며 사색에 잠겼다.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 민주주의 연구자 존 던(John Dunn) 등 석학들과 지구촌의 당면 과제와 인류의 미래에 대해 얘기했다.

호킹은 김대중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는 눈과 귀와 두뇌를 제외하고는 모든 신체가 불구였다. 그럼에도 삶을 미워하지 않았다. 눈에서 빛이 나고 입가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역경 속에서도 천체 물리학의 새장을 열어가는 그의 창조적 자세가 경이로웠다. 김대중은 그 열정과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물었다. 호킹의 대답이 천연덕스러웠다.

"아내와 자식이 있으니 먹여 살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합니다."

김대중은 그의 긍정적 삶에 고개를 숙였다. 용기를 얻었다. 호킹은 김대중의 장래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였다. 역경 속에서도 남을 배려하고 결국 자신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호킹과는 같은 지붕 아래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 둥지를 내린지 한 달이 될 즈음에 김대중은 비로소 국민에 대한 평소의 생각을 회복했다.

'국민은 나를 버려도 나는 국민을 버릴 수 없다. 국민은 나의 생명의 근원이요 삶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1993년 2월 28일 육필 메모)

수많은 인사들이 김대중을 보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왔다. 김대중을 위해 여러 가지 선물을 가지고 왔다. 홍어를 비롯해서 인삼, 젓갈, 생선 등 다양했다. 그리고 거의가 마지막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자신만의 '정치'를 조심스럽게 풀어놓았다. 정계 복귀였다. 그때마다 김대중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면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언제일지 몰라도 김대중은 돌아온다."

김대중은 영국에서 한반도와 통일 문제에 매달렸다. 독일을 세 차례나 찾아갔다. 독일은 통일로 영토는 합쳐졌지만 사람들은 그대로였다. 서독인과 동독인이 그대로 있었다. 독일 대통령 폰 바이츠제커는 김대중에게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지만 마음의 장벽은 그대로 있다"고 말했다.

바로 흡수 통일의 후유증이었다. 한반도가 준비 없이 통일을 하면 독일보다 더 큰 문제가 일어날 것이 불보 듯했다. 남과 북은 전쟁을 치른 사이였다. 독일처럼 어느 날 갑자기 통일이 된다면 갈등과 혼란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93년 3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다. 세계 언론은 북한 경제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예측들을 쏟아냈다. 영국에서 바라보니 한반도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 정책이 심상치 않았다. 남북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느 정당도, 누구도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북한과 미국은 핵문제를 둘러싸고 전쟁의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김대중은 귀국을 서둘렀다.

김대중은 다시 모국 땅을 밟았다. 1993년 7월 4일, 김포공항에는 수천 명의 환영 인파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중은 아파트를 얻어 거처를 경기도 일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통일 문제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정치에 끈을 놓지 않았다. 귀국 후 일정 수첩에 쓴 메모에는 정계 복귀를 암시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1. 은인자중하며 실수하지 말 것(1994년 여름까지) 2. 주시, 검토하면서 때를 기다릴 것(실수, 민심) 3. 개혁 후퇴, 수구화 필두로 민심 잃는다.'

김대중의 예측대로 민심이 점차 김영삼 정부를 떠나갔다. 취임 초기에는 공직자 재산 공개, 청와대 앞길 개방, 안기부·기무사 기구 축소와 민간 사찰 중지, 군내 하나회 해체 등 잇단 개혁 정책을 발표하여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한때는 지지도가 90퍼센트를 넘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김영삼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문민 정부를 내세웠지만 권력 창출에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군사 독재 세력과의 야합은 그 부작용이 예견되어 있었다. 우리 사회의 위기를 한국병으로 진단하고 이를 척결하는 이른바 '신한국 건설'은 구호에 불과했다.

1994년 새해 김대중은 김영삼 정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런 육필 메모가 있다.

'첫째 1년 보아주었으니 이제부터 본격 비판 일 듯. 두 번째 YS의 국정 능력 한계 보인 것. 셋째 국정 운영을 제도보다 깜짝쇼로 한다. 네 번째 외교능력 백지(국내 정치하듯 일과성으로 했다). 다섯째 북한과의 협상 능력 문제, 민족적 양심도 의심, 남북 직접 협상보다 미의 동북아 정책에 놀아나다.'

이걸 보면 김대중은 김영삼의 앞날을 정확히 예견했다. 그것은 정치인 김영삼의 자질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음이었다.

김대중은 영국에서 구상한 연구 재단 설립을 서둘렀다. 한반도 통일과 민주주의, 아시아 평화를 위한 산실을 꿈꾸며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출범시켰다. 1994년 1월 27일 서울 청천동 아륭빌딩에서 현판식을 가졌다. 해외 고문으로는 전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필리핀 대통령 코라손 아키노, 전 독일 외상 한스디트리히 겐셔가 참여했다. 김대중은 이사장직을 맡았다.

5월 5일 김대중은 미국·캐나다 방문길에 올랐다. 북한과 미국은 '북한의 핵 개발'을 둘러싸고 일촉즉발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미국은 무력 응징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김대중은 5월 12일 워싱턴 내셔널프레스클럽에서 연설을 했다.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 대한 충언'이었다. 김대중은 북핵 문제를 '일괄타결(package deal)'할 것을 촉구했다.

"북한과 미국은 두 가지씩을 양보해야 합니다. 북한은 핵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고 남쪽의 안보를 보장해야 합니다. 미국은 북한과 외교를 통해 경제 협력에 나서고 팀스피릿 훈련을 중단하는 등 북한의 안보를 보장해야 합니다."

아울러 국제적으로 신뢰받는 인물을 특사로 북한에 보낼 것을 제안했다. 연설이 끝나자 누가 특사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대중은 연설 전날 이미 카터에게 전화를 걸어 의향을 타진했다. 연설에서 특사로 실명을 거론해도 좋겠냐고 묻자 카터는 흔쾌히 동의했다. 김대중의 그날 연설은 그해의 '베스트 스피치'에 뽑혔다. 김대중의 제안은 미국을 움직였다. 미국 정부는 '카터 특사'를 정밀하게 검토했다.

6월에 접어들자 북한과 미국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미국의 잇단 경고에도 북한은 핵 연료봉 추출을 강행했다. 미 국방장관 윌리엄 페리는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저지'는 핵 시설에 대한 공격이었고 그것은 곧 전쟁이었다.

페리는 대통령 클린턴이 주재하는 국가안보회의에 3단계 작전 계획을 상정했다. 다시 한국 전쟁이 발발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개전 후 3개월 안에 미군 5만 2000명, 한국군 49만 명, 민간인 100만 명이 희생당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펜타곤이 계산해 낸 것이었다.

이때 한반도의 전쟁 구름을 헤치고 카터가 평양으로 날아갔다. 김일성 주석의 초청을 받아 사흘 동안 북에 머물렀다. 카터는 남북 정상 회담이란 선물을 안고 판문점을 넘어왔다. 극적 반전이었다. 김영삼과 김일성은 남북 정상 회담 일정에 합의했다.

ⓒ프레시안(손문상)

김대중은 "민족사의 앞날에 서광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는 논평을 냈다. 모두 그날을 기다리며 남북 화해의 새날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오지 않았다. 북한 주석 김일성이 7월 8일 돌연 사망했다.

어쨌든 김대중의 연설에서 비롯된 '카터 특사 파견'으로 한반도는 전운(戰雲)을 벗겨낼 수 있었다. 김대중은 9월 미국 애틀랜타로 날아가 카터를 만났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노력에 사의를 표했다. 그러자 카터는 김대중에게 찬사를 보냈다.

"당신이 나를 북에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내가 가지 않은 상황에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면 한반도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긴장 국면이 조성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이미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김대중에게 공(功)을 돌렸다.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신군부로부터 김대중의 목숨을 구하는데 앞장섰고, 그렇게 해서 다시 살아난 김대중의 제안으로 한반도를 전쟁 위기에서 구하는데 일조를 했다.

사람들은 김대중의 이런 노력들을 잘 알지 못한다. 1994년의 한반도에는 '거대한 위기'가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었다. 김대중은 북핵 위기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김대중이 국경을 넘나들며 혼신의 힘을 쏟고 있을 때 김영삼 정권은 일관성 없는 대북 정책으로 혼선만 불러왔다. 원칙이 없으니 대북 정책은 냉온탕을 오갔다. 결국 북한이나 미국에 믿음을 심어주지 못하고 끝내 어정쩡한 강경책으로 남북관계를 후퇴시켜 버렸다.

김대중은 육필 메모에 김영삼 정부의 대북 정책 실패와 이에 따른 후유증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거듭된 주장 변화와 대북 타협 기피로 위신 저하, 정부 통일 정책과 역량에 대한 국민적 불신, 미국과의 심각한 불신 관계, 일·중·러의 한국 정부 불신.'

김영삼은 김대중의 정계 복귀를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3김 시대의 마지막 승자는 김영삼 자신이어야 했다. 청와대·안기부·경찰 합동으로 '김대중 전담부서'를 두고 감시했다. 정치 사찰 극비 문서는 대통령 김영삼에게 직접 보고했다.

김대중에 대한 견제와 탄압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김대중이 쓴 저서의 판매를 방해하고, 아태재단 후원회를 수사하고, 김대중과 그 측근들의 전화를 도청했다. 동교동 자택 주변에는 경찰 안가가 4채나 있었다. 이런 사실들은 언론이 폭로해서 알려졌다. '문민'을 표방했던 무리가 저지른 일이라서 충격이 더 컸다. 6·27 지방 선거가 임박하자 대통령 김영삼은 '세대 교체론'을 얘기했다. 그것 또한 김대중을 겨냥한 것이었다.

"차기 대통령은 세대 교체된 새 인물이 나올 것이다. 대통령으로서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김대중은 이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것은 수평적 정권 교체 막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김대중은 정계로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었다. 청와대가 극비로 조사한 여론 조사 결과를 입수하여 적어놓았다. (1995년 5월 21일 메모)

1. 'KDJ(김대중) 정치하는가 75퍼센트 예스)
2. KDJ 정계 복귀 바람직한가 23퍼센트 본인 의사, 59퍼센트 국민이 원하면, 14퍼센트 안 된다.

국민이 김대중 복귀를 원하는 정치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국민 59퍼센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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