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교동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김대중의 집은 큰 길에서 움푹 들어간 골목길에 있다. 평소에도 낮은 집이 그 날은 더욱 납작 엎드려 있었다. 1992년 12월 19일 새벽 3시, 패배자 김대중은 일어나 불을 켰다. 그리고 기도를 올렸다. 아내 이희호가 그걸 지켜보고 있었다. 아내를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난 40년이 아득하다는 느낌이오. 그 세월 동안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민주주의와 정의와 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소. 나의 이런 노력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잘 알 것이오. 그런데도 다시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했소. 내가 할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소. 결연하게 정리하려고 하는데 당신도 동의해 줬으면 좋겠소."
아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아내를 끌어안았다. 국민에게 고할 성명 문안을 생각하려니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김대중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남편의 구술을 기다리는 이희호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다가가 다시 손을 잡았다.
"우리 사형 선고 받았을 때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웃을 일 아니오."
김대중의 정계 은퇴 성명은 눈물로 작성되었다.
오전 8시 30분 마포 중앙당사에 들어섰다. 당원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당사는 울음바다였다. 김대중은 당원들의 손을 일일이 잡았다. 곧장 5층 기자실로 올라가 은퇴 성명을 읽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또 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패배를 겸허한 심정으로 인정합니다.
저는 김영삼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입니다. 저는 김영삼 총재가 앞으로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성공하여 국가의 민주적 발전과 조국의 통일에 큰 기여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로써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 생활에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간 국민 여러분의 막중한 사랑과 성원을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국민 여러분의 하해 같은 은혜를 하나도 갚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 점 가슴 아프고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조용한 시민 생활로 돌아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과 당원 동지 여러분의 행운을 빕니다."
목소리에서는 슬픔이 묻어났다. 여기서 은퇴 성명을 잘 들여다보자. 한 가지가 빠져 있다. 그것은 그가 늘 쓰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에서 '사랑하는'이 빠져 있다. 그것은 우연일까. 아니다. 김대중은 치밀하다. 그렇기에 일부러 뺏을 것이다.
그토록 다가갔지만 끝내 마음을 열지 않은 '무정한 국민'이었다. 용공 조작과 지역 감정 조장에 넘어간 유권자들이 야속했을 것이다. 그날만큼은 그런 유권자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면 그건 정녕 빈 말일 것이다. 김대중은 선거 후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떠난 후 그곳에서 이런 메모를 남겼다.
"가장 큰 슬픔은 낙선보다도 지역 감정과 용공 조작에 좌우되는 우리 국민, 미래를 위한 변화보다도 이기적 안전에 집착하는 국민에의 실망이다."
국민에게 늘 버림을 받아도 다시 믿는 것은 국민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김대중의 숙명이었다.
김대중의 정계 은퇴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비탄에 빠뜨렸다. 낙선보다 은퇴가 더욱 서러웠다. 그날 남녘엔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누구는 김대중 선생이 아직도 웃고 있는 선거 벽보에 볼을 부비며 울었다. 누구는 떨어져 나간 포스터를 다시 붙이며 울었다. 밤 9시 텔레비전 뉴스에 초췌한 김대중이 절뚝거리며 나타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누구는 "에이 몹쓸 양반"이라며 울었다. "선거는 쪽수니까 새끼들 많이 낳자"며 소주를 털어 넣는 사람도 있었다. 술에 취해 하늘에 욕을 하는 사람, 티브이를 부숴버린 사람, 가슴을 쥐어뜯는 사람…….
그래도 누군가에게 해코지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 약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속으로 삼켜야 했다. 그것이 김대중과 김대중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비극이었다. 이런 남루한 모습을 남에게 들켜서는 안 되었다. 희희낙락하는 저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아니 되었다. 약자들은 그렇게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어느 날 나타나서 마음만 설레게 해놓고 이제 또 가버리면 우리는 어떡하란 말인가."
"당신이 있어 숨을 쉬고 꿈을 꾸었는데 이제 어쩌란 말인가."
"생전에 당신 대통령 되는 것 보는 것이 소원인데 이렇게 무정하게 가버리면 이제 어쩌면 좋은가."
"대통령 안 되도 좋으니 그냥 곁에 계시면 안 되겠는가."
그날 눈이 내렸다. 그래도 슬픔은 덮을 수 없었다. 선거는 축제라지만 김대중을 보내야하는 그 해 겨울은 참으로 잔인했다. 동교동 사저에 전화와 편지가 쇄도했다. 모두 울부짖고 있었다. 비록 패배했지만 김대중은 지지자들의 사랑을 확인했다.
언론들은 온갖 화려한 수사를 쏟아냈다. "정치 거인" "현대사 거목" "지조의 정치인" "민주 외길 40년" 등 영웅으로 띄워 올렸다. 후보일 때는 온갖 독설을 동원하여 매도하더니 떠난다니 찬양 일변도였다. 그러나 속 깊이 들여다보면 '지난날은 위대하다고 할 테니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정치인 김대중의 '매장'은 극히 화려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떠나지 않았다. 김대중에게 정계 은퇴는 가장 효율적인 정치 행위였다. 한국에서 패배를 곱씹는다는 것은 근천스러운 일이었다. 지지자들을 볼 염치도 없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서서 세 번 떨어졌으니 국민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국내에서는 운신의 폭이 너무도 좁았다. 동교동 자택으로 당원과 시민들이 날마다 수백 명씩 찾아왔지만 그들에게도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정치판을 떠나 있어야 했다. 그래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김대중은 그 절망의 시간에 다시 자신을 점검했다. 김대중은 이렇게 술회했다.
ⓒ프레시안(손문상) |
'나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버릇처럼 내 안의 문제점과 가능성을 점검했다. 백지에 가운데 줄을 긋고 오른쪽에는 내가 안고 있는 문제점, 왼쪽에는 아직 남아있는 가능성들을 적어 비교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해보니 왼쪽에 많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우선 800만이라는 국민들의 지지가 있었다. 또 항상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 주는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나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수많은 동지들이 있었다. 나는 또 건강을 지니고 있었다. 험한 대통령 선거를 세 번이나 치르고 40년 동안 가시밭길을 헤쳐 왔지만 건강했다. 그리고 내 안에는 열정이 남아 있었다.'
은퇴한 사람이 이렇게 철저히 자신을 분석할 수 있는가. 그것은 지지자, 가족, 동지, 건강에 열정까지 있으니 후일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김대중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초청을 받아 유학을 떠났다. 말이 좋아 유학이지 정치적 유배였다. 1993년 1월 26일 출국하기로 했다.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기 전에 떠나야 했을 것이다. 공항에는 수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도 의미심장한 인사말을 했다.
"저는 정치는 떠났지만 국민 여러분 곁까지 떠난 것은 아닙니다. 생의 마지막까지 국민에게 봉사하겠습니다.
역사는 한때 좌절은 있어도 영원한 후퇴는 없습니다. 절망하지 않는 국민에게 패배는 없습니다. 국민 여러분이 바라는 자유와 번영과 복지의 나라, 그리고 통일된 조국의 꿈은 반드시 실현되고 만다는 굳은 믿음 아래 좌절 없는 전진을 계속해 주실 것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앞으로 새로운 희망 속에 여러분과 다시 뵙기를 기약하겠습니다."
김대중은 국민 곁은 떠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새로운 희망 속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것은 듣는 사람마다 해석을 달리 할 수 있었다. 여건이 숙성되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이었다. 김대중은 은퇴한다고 해서 비(非)정치인이 될 수 없었다. 그것 또한 숙명이었다. 그는 영원한 정치인이고 또 정치인이어야 했다. 김대중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도 대선 국면을 돌아봤다. 단순한 후유증이라 하기에는 패배의 상처가 너무도 참혹했다. 2월 27일에 쓴 육필 메모엔 이런 내용이 있다.
'대선 이후 기도가 잘되지 않는다. 80년 고난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그러면서 생각을 벼렸다.
'어떻게나 이대로 죽을 수도 포기할 수도 없다. 그래도 하느님을 믿고, 역사를 믿고, 국민을 믿고, 나를 믿고 역사 속에 승부를 걸면서 나가 보자. 무엇이 되는 것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신념을 견지하면서.'
또 언론에 대해서도 섭섭함을 넘어 한탄을 하고 있다.
'우리의 정치, 아니 나라 일을 망친 가장 큰 책임자는 언론이다. 그러나 그들은 막강의 힘이 있다. 바꿔볼 길도 고쳐볼 길도 없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다시 희망을 품고 있었다. 육필 메모에는 또 이런 내용이 보인다.
'하루에는 밤이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전부가 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김대중은 이국땅에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 일흔이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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