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노태우와 야당 총재 김영삼과 김종필이 청와대에서 긴급 기자 회견을 가졌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는 두 사람을 양 옆에 세우고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을 선언했다. 노태우는 "역사의 사명", 김영삼은 "하나님의 뜻", 김종필은 "구국의 결단"이라고 했다.
3당 합당은 민의에 대한 쿠데타였다. 투표로 모아준 국민의 뜻을 저버린 패륜이었다. 노태우는 '여소야대' 정국이 출현하자 "하늘의 뜻으로 알고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하늘의 뜻을 팽개쳐버렸다.
김대중은 김영삼이 노태우와 야합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무슨 영화가 보장되었는지는 몰라도 멀리 보면 역사에 죄를 짓는 행위가 분명할진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김영삼은 개인만 투항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당원들을 이끌고 군부의 소굴로 들어갔다.
김영삼 곁에는 민주 투사들이 즐비했기에 이들에게도 몹쓸 짓을 한 셈이었다. 이후 우리 정당사는 정체성 혼란을 겪어야 했고, 독재와 반독재 세력의 결합으로 부작용이 속출했다. 그의 집권욕은 벌써 역사의 버림을 받았다.
노태우는 사실 김대중에게도 합당을 제의했다. 1989년도가 저물 무렵, 대통령과 야 3당 대표가 회담을 가졌을 때였다. 회담이 끝난 후 노태우는 김대중에게 따로 얘기할 게 있다고 했다. 둘만 남게 되자 노태우가 말했다.
"김 총재, 이제 고생 그만 하시지요. 나하고 같이 갑시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하고 당을 같이 합시다. 그래서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같이 겪읍시다."
김대중은 깜짝 놀랐다. 한참 생각을 정리한 후 답했다.
"나는 군사 정부를 반대하고 또 5·17 쿠데타를 반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과 같이 당을 할 수 있겠습니까."
"김 총재, 그런 걸 따지지 말고 나라를 구한다는 생각으로 동의해 주십시오."
"오늘의 여소야대는 국민이 선택한 것입니다. 민정당과 평민당이 합치는 것은 민의를 배반하는 엄중한 사건입니다."
노태우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김대중은 그렇게 통합 제의를 뿌리쳤다. 그러나 노태우는 3당 통합을 강행했다. 전라도를 고립시키며 지역주의를 조장하는 최악의 카드였다. 김영삼은 노태우의 후계자로 권력을 탐냈고, 김종필은 내각제 개헌을 통한 집권을 꿈꾸었을 것이다. 노태우도 훗날 김영삼에게 버림을 받았으니 결과적으로 제 발등을 찧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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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이 통합하여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299석 중 221석을 차지하는 공룡정당이었다. 야당은 평민당과 의원 8명의 '꼬마 민주당'이 있을 뿐이었다. 민주당은 이기택, 김정길, 노무현, 김광일 등이 합당을 거부하고 남아 있었다. 정국은 민자당의 독주가 이어졌다.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보상법을 여당 단독으로 처리했다. 또 여야 합의로 통과된 지방자치법을 어기고 지방자치제 선거를 연기하려 했다. 김대중은 지방자치제 실시, 정치 사찰 중지 등을 내세우며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지방자치제는 김대중의 평생의 소원이었다. 김대중은 스스로를 '미스터 지방 자치'로 불렸으면 했다. 박정희가 살해된 후 김대중을 만난 하버드 대학 교수 라이샤워는 이런 충고를 했다.
"우선 과제가 지방자치제 실시입니다. 민주화는 지방자치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김대중의 생각도 같았다. 중앙 정부가 지방 권력까지 장악하고 있으면 평화적 정권 교체는 요원했다.
단식 8일째가 되자 탈수 현상이 나타났다. 주변 사람들이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겼지만 김대중은 단식을 멈추지 않았다. 소속 의원들은 총회를 열어 '단식중지 결의안'을 채택하고, 동조 농성을 벌였던 당원들도 총재의 단식 중단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듣지 않았다.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으로 변신한 김영삼이 병실을 찾아왔다. 김영삼은 여러 가지 말로 김대중을 달랬다. 김대중이 말했다.
"여러 말이 필요 없소. 3당 합당을 다시 깨겠다는 것이 내게는 가장 기쁜 위로의 말이오."
"비록 여당에 가담했지만, 나는 민주주의를 잊은 적이 없는 사람이오. 후광, 나를 너무 욕하지 마시오."
"3당 합당 자체가 민주주의를 배반한 것입니다. 민주주의와 가장 먼 곳으로 가 있으면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김영삼은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웃어 넘겼다. 김대중은 다시 진지하게 말했다.
"이보시오 거산(김영삼 아호), 나와 김 대표가 민주화를 위해 싸웠는데 민주화란 것이 무엇이요. 바로 의회 정치와 지방자치제가 핵심 아닙니까. 지방 자치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를 놓칠 수도 있소. 여당으로 가서 다수 의석을 가지고 있다 해서 어찌 이를 외면하려 하시오."
김영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노태우 정권은 지방자치제 실시를 약속했다. 36년 만에 지방 자치 시대가 열렸다. 김대중은 13일 만에 단식을 풀었다. 김대중은 그 때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지 않으면 결코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듯 풀뿌리 민주주의는 오로지 김대중의 신념과 용기로 이뤄졌다. 지방자치제 도입으로 주민들이 주인이 되었다. 지방자치체장들은 권력보다 주민들을 살피게 되었다. 자연 지방 행정은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함평 나비축제, 청도 소싸움, 광주 비엔날레 등 성공한 사업들도 지방자치제의 산물들이다. 김대중이 없었다면 이명박 서울 시장도, 박원순 서울 시장도 없었다. 그런 사실을 요즘 사람들은 모르거나 너무 쉽게 잊고 있다.
김대중은 민주당 총재 이기택과 만나 '꼬마 민주당'과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1991년 9월 16일 두 당의 통합 전당 대회가 열렸다. 당명은 민주당, 김대중·이기택이 공동 대표를 맡았다. 야권 통합을 이룬 후 1992년 3월 총선을 치렀다.
민자당과 민주당의 대결에 재계 원로 정주영이 만든 통일국민당이 끼어들었다. 총선 결과는 민자당의 참패였다. 민자당은 기존의 219개 의석에서 149개로 줄었다. 민주당은 63개 의석에서 97개로, 국민당은 31개 의석을 차지했다. 언론은 '민자당 참패, 민주당 약진, 국민당 돌풍'이라 보도했다. 3당 야합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다.
정국은 다시 '제14대 대통령 선거' 속으로 들어갔다. 김대중, 김영삼, 정주영의 3파전이었다. 그런데 돌연 안전기획부가 대형 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1992년 10월 발표한 '이선실 간첩단 사건'은 누가 봐도 대통령 후보 김대중을 겨냥한 것이었다.
북한 권력 서열 22위인 이선실이 남한에 잠입하여 공작 지도부를 구축하고 재야 단체, 정계, 노동계, 학계 등 400명을 조직원으로 포섭했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북풍이었다. 안기부는 간첩 이선실이 동교동 김대중 자택에서 이희호와 기념사진을 찍었다는 소문까지 퍼뜨렸다.
민자당 대변인 박희태가 논평을 냈다.
"이번에 적발된 북한 간첩단의 지령문을 보면 민주당 후보를 단일 후보로 밀어 반드시 당선시키라는 내용이 있다."
그러면 안기부는 북에서 간첩단에게 그런 지령을 내린 것이 사실이라고 확인을 해주었다. 당직자, 선거대책본부 간부들이 돌아가면서 김대중을 때렸다. 그럼에도 중반 판세가 김대중에게 유리하자 다시 거짓 정보를 흘렸다.
"북한 김일성 주석이 이번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도록 대남 방송을 하고 있다."
언론이 이를 받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민자당 선거대책위원장인 정원식이 나섰다.
"북한은 민민전 방송을 통해 민주당과 전국연합이 정책연합 형식으로 김대중 후보를 범민주 단일 후보로 추대키로 합의한 데 대해 환영의 뜻을 표한 바 있다."
그렇게 거품을 물던 간첩단 사건은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홀연 사라졌다. 아무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없었다. 김대중은 당시 그 허구성을 지적하며 반격을 했지만 언론은 딴청을 부렸다. 매체마다 여론을 조작하여 부풀려 보도하는데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김대중 지지자들은 가슴을 쳤다. 정부 여당은 다시 가장 손쉬운,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김대중 죽이기'에 나섰다. 김대중이 겨우겨우 추슬러 민심 앞에 서면 또 여지없이 빨갱이로 몰아버렸다. 김대중을 싫어하는 자들은 다시 이죽거렸다. 김대중의 실체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면 귀찮았다. 양심에 부대껴야하기 때문이었다. 누구는 핏대를 세워서, 누구는 무언으로 이에 동조했다.
세상은 다시 김대중의 사상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약자는 빨갱이로 몰리는 김대중 쪽이었다. 항상 쪽수에서 밀린 가난하고 힘없는 사투리는 숨을 곳이 없었다. 빨갱이 논쟁이 벌어지면 어느 시인의 말처럼 '말없이 눈물을 찬밥에 말아 거칠게 씹어 삼키곤 했'다.
'그해 여름, 서산남부농협 신축공사장에는 아침부터 뜨거운 햇볕이 섭씨 30도를 오르내렸는데요, 새참으로 나온 컵라면과 소주잔을 앞에 두고 철근팀과 목수팀들이 한바탕 붙은 적이 있었습니다. 예덕리 장씨와 홍천리 김씨가 멱살까지 붙잡고 험악하게 싸운 이유가 다름 아닌 김대중은 빨갱이다, 아니다였어요.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한 언쟁이 결국 예덕리 장씨 아저씨가 에이 씨발놈의 세상! 하면서 망치자루를 던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어이, 자네는 음료수도 해태걸로만 먹는다메, 묻더군요. 할 수 있다면 3미터가 넘는 장빠루로 세상 천장을 피 터지게 한번 뚫고 싶었습니다.' (유용주의 시 '뜨거운 사투리' 중에서)
다시 통탄할 일이 벌어졌다. 민주화 동지라는 대통령 후보 김영삼이 색깔론공세를 폈다. 군사 정부의 수법 그대로 흑색 선전을 했다. 유세장마다 김대중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최근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이 김영삼이를 낙선시키고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키라고 지령했습니다. 북한이 원하는 대통령을 뽑아야 합니까,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합니까."
그러면서 "사상이 의심스런 후보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거품을 물었다. 언론은 이러한 흑색선전을 아주 보기 좋게 포장하여 안방에 전달했다. 30년 민주화 동지의 입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30년 만에 민간인 후보끼리의 대결이었지만 그 수법은 군사 정권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은 충격을 받았다. 오직 선거에 이기려고 동지를 용공으로 모는 김영삼, 그는 옛날의 동지가 아니었다. 적의만 번득였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선거가 끝난 후 김대중은 그런 김영삼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고야 마는 김영삼 씨가 부럽지는 않지만 외경스럽다."
김영삼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동지를 짓밟으며 권력을 좇았다. 그 후 김대중의 마음속에서 민주화 동지 김영삼은 사라져 버렸다. 자서전 구술을 할 때 김영삼에 대한 인물평을 묻자 김대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긴 침묵이 흘렀지만 그날은 입을 열지 않았다.
김영삼은 용공 발언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선거 후 민주당이 그토록 집요하게 요청했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임종을 앞둔 김대중을 문병 와서는 "우리는 화해했다"고 말했다. 언론도 '병상 화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 생각일 뿐이다. 김대중은 김영삼과 화해 할 수가 없었다. 가해자가 사죄하지 않는데 어찌 피해자 혼자 화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김대중은 김영삼을 그냥 용서했다. 역사에 버림받을 그가 측은했기 때문에.
김영삼 후보 측은 천문학적인 선거 자금을 살포했다. 김영삼이 스스로 "이러다가는 나라가 망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대통령 노태우는 "3000억 원을 선거 자금으로 김영삼에게 줬다"고 회고록을 통해 19년 만에 폭로했다.
그리고 김대중에게는 20억 원을 줬다. 김대중은 그 20억 원 때문에 두고두고 발목을 잡히며 곤욕을 치렀다. 결국 사과까지 했다. 김영삼은 노태우에게서 받은 3000억 이외에도 선거 자금을 무차별 끌어 모았다. 선거 캠프나 자신이 직접 받은 선거 자금까지 합치면 상상할 수도 없는 액수였을 것이다. 원 없이 쓰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승리를 확신하며 표밭을 누볐다. 그런 김대중이 오죽 측은했으면 노태우가 당시를 떠올리며 회고록을 통해 미안해했겠는가.
'김(대중) 총재가 상황을 유리한 것으로 오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연민의 정마저 일었다.'
김대중은 노태우와 김영삼이 추악한 거래를 했던 사실을 모르고 서거했다.
김영삼 측의 공세는 계속됐다. 찬조 연사, 홍보물, 당직자들을 총동원하여 붉은 물을 끼얹었다. 김대중 측에서도 당할 수만 없었다. 특단의 대책을 마련했다. 김영삼의 자질과 여자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를 말렸다.
선거 막판에 이르러 '초원복집 사건'이 터졌다. 부산 지역 기관장들이 김영삼 당선을 위해 지역 감정을 조장하자는 모임이 발각된 것이었다. 그날 모임의 녹취록은 더러워 귀를 씻어야 할 지경이었다.
언론인들을 돈으로 매수·회유할 것을 논의하고,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 혁명적 상황을 맞을 것이라는 망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전 법무부 장관 김기춘은 민간에서 지역 감정에 불을 지르라고 독려했다. 참으로 소름 돋는 일이었다.
김대중은 '초원복집 사건'이 호재로 작용할 줄 알았다. 경상도 유권자들도 지역 감정을 선동하는 무리들에게 격분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김대중에게는 초대형 악재였다. 엄청난 역풍이었다. 경상도 지역에서 김영삼의 몰표가 쏟아졌다. 12월 18일 선거가 끝났다. 김대중은 다시 경악했다.
'김영삼 997만여 표, 김대중 804만여 표, 정주영 388만여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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