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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대선, DJ는 '빨갱이'라서 진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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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대선, DJ는 '빨갱이'라서 진 게 아니라…

[김대중 평전 '새벽'·26] 다시 떨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다시 떨어지고 다시 일어서고

김영삼 측과 단일화 협상은 계속 겉돌고, 김대중은 출마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그때 출마를 결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동교동 측 대표인 양순직, 최영근, 이중재 등이 상도동 측과 협상을 하고 와서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다.

"군부가 빨갱이라고 비토하니 DJ가 후보가 돼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만일 김대중 후보가 되면 군부가 그날로 죽여 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김대중은 귀를 의심했다. 민주화 동지들이 독재자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군정 종식과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린 사람들이 할 얘기는 아니었다. 함께 뭉쳐서 싸웠던 공동의 적은 바로 '군사 정권'이었다. 그런데 정작 군부의 비토를 겁낸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함석헌, 문익환, 안병무 등 재야 인사들도 개탄했다. 김대중이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제 더 이상 협상은 의미가 없습니다. 뜻을 세우시오."

시민 단체와 재야 인사들이 속속 김대중 지지를 선언했다. 그중에서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지지 결정은 김대중을 더욱 고무시켰다. 민통련은 김대중, 김영삼을 초청하여 정책 세미나를 열었다. 두 사람의 식견과 비전 그리고 주요 정책을 알아보는 후보 검증 작업이었다. 예상대로 김대중은 모든 면에서 김영삼을 압도했다. 민통련은 야당 단일 후보로 김대중을 추천하기로 결정하고 결의문을 발표했다.

"민통련은 이 시점에서라도 두 지도자가 희생적 양보를 통해 후보 단일화를 이루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보지만,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김영삼 총재가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으로 김대중 고문의 손을 잡으면서 망국적인 지역 감정을 해소하고 이번 선거에서 범국민적 후보가 압승하여 군사 독재를 끝장내는 데 협력할 것을 진심으로 촉구한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담판까지 벌였지만 후보 단일화는 겉돌았다. 결국 김대중과 김영삼은 갈라섰다. 김대중은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당명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인 민주와 평화를 합쳐 만들었다. 1987년 11월 12일 중앙당 창당 및 대통령 후보 추대 전당 대회를 열었다.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고, 또 생애 처음으로 정당 대표인 총재에 취임했다. 선거전은 1노(노태우)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의 각축이었다.

김대중은 한복을 입고 유세장을 누볐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청중이 열광했다. 여의도와 보라매공원 유세에는 기록적인 인파가 몰렸다. 130만, 200만 명이 모였다. 평화민주당의 상징색은 노랑이었다. 유세장은 온통 노랑 물결이었다. 특히 선거 사흘 전에 열린 보라매공원에는 선거 사상 가장 많은 청중이 모였다. 김대중과 지도부는 감격했다. 내뱉는 말은 감탄사뿐이었다.

ⓒ프레시안(손문상)

그것으로 선거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김대중도 압승을 의심치 않았다. 연설회가 끝난 후 10만여 명은 서울시청까지 행진을 했다. 참석자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내일이면 세상이 바뀔 것 같았다. 거리는 넘치는 인파로 교통이 마비되었다. 그때 오도 가도 못한 버스 속 승객들은 눈을 흘겼다. 다른 무리들은 흡사 점령군처럼 행진하는 사람들을 노려봤다. 참석자들에게는 신명난 축제였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한풀이'로 비쳐졌다. 전인권도 이렇게 지적했다.

왜 김대중의 연설은 위험해 보였을까? 그것은 일단 그의 연설회장에 많은 사람이 모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우리가 미워하는 전라도 놈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가 미워하고, 잘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그것 자체로도 위험해 보이기 마련이다.

내가 끼고 싶지 않은 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저희들끼리 뭐라고 떠들고 있으면, 그 자체로 나에 대해서 큰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얘기하지만, 김대중의 대중 연설 회장은 커다란 교실에 지나지 않았다. 애통한 전라도 학생들이 모여 있는 커다란 교실이었다.

교실에 모여 있는 학생들, 배우러 또는 보고 싶어 올 사람만 오는 교실의 학생 수를 따져보고 '선생님'이 감격했으니 허망한 일이었다.

천하의 김대중도 선거판을 읽지 못했다. 김대중은 당시에 흥분하고 있었다. 김대중을 연호하던 1971년의 유세장 열기가 재연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16년 동안 세상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국민들의 눈에 김대중은 '71년 대통령 후보'가 아니었다.

김대중은 어느덧 빨갱이, 거짓말쟁이, 대통령 병 환자, 위험한 과격분자로 바뀌어 버렸다. 군사 정부의 지속적인 공작에 속속 속아 넘어갔다. 처음에는 설마 하다가도 지속적인 세뇌 작업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국민이 야속하겠지만 국민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김대중이 입고 있던 '한복'에도 거부감을 가질 정도였다.

김대중은 당시 떠돌던 '4자(者)필승론'에도 기댄 것처럼 보인다. 1노 3김이 모두 지역을 기반으로 했으니 수도권에서 이기는 후보가 승자가 될 수 있고, 그런 면에서는 김대중이 가장 유리하다는 것이 4자필승론의 실체였다. 그러나 그것도 허상에 불과했다. 우선 돈과 조직에서 앞선 정부 여당의 후보를 간과했던 것이다.

정부 여당은 여론 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는 김대중을 무차별 공격했다. 용공 음해와 과격 이미지 조장에 집중했다. 노태우 측이 내세운 "안정이냐 혼란이냐"는 구호는 실상 김대중을 겨냥한 것이었다. 김대중의 유세장에는 '좌경후보 김대중, 붉은 행동 열 가지'라는 유인물을 뿌렸다.

거기에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범으로 지목됐던 김현희가 선거 전날 압송되어 입국했다. 우연을 가장한 선거 공작이었다. 국민들은 이내 '안보 무드'에 젖어들었고, 선거 기간 내내 이념 공세에 시달려야 했던 김대중에게는 절대 불리한 상황이 전개됐다. 내일이 투표일인데도 언론은 김현희만 대서특필했다. 그것은 또 다른 김대중 낙선 운동이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전국 곳곳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1987년 대선 때 경북 문경군 마성면 하내리에
공정선거감시단으로 귀향했을 때
어머니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군청 강당에서 개표를 하는데
서성초등학교 투표함에서 김대중 표 석 장이 나오자
마치 반공 궐기 대회처럼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울그락불그락 관료들 앞에서 새마을 지도자가 소리쳤다.
빨갱이 세 놈이 있었구만, 내 안 봐도 다 안다카이!
비밀 투표였지만 공개적인 비밀이었다.
후배 재국이와 나, 그리고 나머지 한 표는 누구일까
찬바람에 깡소주를 마시면서도 내내 궁금했었다
이른 새벽 술 냄새라도 풍길까봐 막 돌아눕는데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내는 안다, 저 선상님은 간첩이 아니라카이, 그렇제?'

(이원규, '말 안 해도 알제, 잘 알제?'에서)

김대중은 유일하게 불온한 후보였다. 호남과 수도권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는 빨갱이 후보였다. 4자필승론은 결국 '4자필패론'이었다.

12월 16일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득표율은 노태우 36.6퍼센트, 김영삼 28.0퍼센트, 김대중 27.1퍼센트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믿기지 않는 패배였다. 2등도 아닌 3등이라니. 석 달 전에 실시한 여론 조사(<중앙일보> 1987년 9월 22일자)에서는 김대중 지지가 22.7퍼센트인데 김영삼은 고작 6.1퍼센트였다. 그런데 이런 참담한 결과가 나올 수 있는가.

김대중은 선거 결과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당시의 공황 상태를 한 월간지에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여의도나 보라매공원에서 보여준 엄청난 국민의 함성과 나와 함께 서너 시간씩 카퍼레이드를 할 때의 열기 등등 여러 가지 상황에 비추어 선거의 결과가 저렇게 되리라곤 생각지 않았어요. (…) 하나님이 이번에는 나에게 기회를 주시리라 믿었는데, 결과가 그렇게 못 돼서 내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냐는 반성을 했습니다."

유세장의 열기로 봐서는 선거 결과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보라매공원과 여의도에 모인 엄청난 군중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렇다면 다소 과장을 해서 유세장에 온 사람들만 찍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선거 결과에 억울한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2등도 아닌 3등이 따질 수는 없었다. 선거는 김대중의 오판에 의한 완패로 끝나고 말았다.

선거가 끝나자 온 나라가 깊은 침묵 속에 잠겼다. 선거 후유증은 깊었다. 특히 김대중과 김영삼이 갈라서자 지지 세력들도 양패로 나뉘어 싸웠다. 그러나 6월 항쟁으로 쟁취한 직접 선거에서 독재자의 후계자에게 양쪽 모두 패했다. 야권은 최악의 상황이 연출되자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넋을 놓고 있었다. 언론은 패인을 후보 단일화 실패로 돌렸다. 비난이 들끓고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김대중은 회한에 젖은 채 이렇게 후회했다.

"나라도 양보했어야 했다. 너무도 후회스럽다. 국민들에게 분열된 모습을 보인 것은 분명 잘못됐다."

그러나 언론은 김대중을 나무라지만 실상은 '호남 때리기'였다. 김대중이 왜 김영삼에게 양보했어야만 했는가. 그것은 여론이 만들어낸 김대중은 안 된다는 우리 사회에 은밀히 퍼져있는 '김대중 불가론'을 바탕에 깔고 있음이었다. 애초부터 후보 단일화 논의는 김대중에게는 권력욕, 김영삼의 당선 가능성을 부각시킨 불공정한 것이었다.

그렇게 민주 진영의 단합을 외쳤던 김영삼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군부세력과 야합, 3당 합당으로 다시 호남을 고립시켜 버렸다. 소위 민주 투사라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독재의 소굴로 들어가 버렸다. 이쯤 되면 '후보 단일화가 바로 김대중의 양보'라는 저들의 숨은 속셈을 알 수 있다.

영남 사람들에게 '호남 대통령'은 생각만 해도 불쾌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그런 불쾌함을 넘어 두려운 존재였기 때문에 '김대중 죽이기'에 나선 것이다.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김대중은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쏟아진 비난 여론이 턱없이 부당하지만 김대중은 사과를 해야 했다. 왜냐면 정치를 계속해야 했기에, 다시 대통령에 나와야 했기에. 여전히 소수이고 그래서 소외받는 전라도 출신이기에.

선거 패배의 책임은 김대중에게 돌아왔다. 김영삼은 패장임에도 머리를 세우고 김대중에게 연일 삿대질이었다. 다시 야권 통합을 하라는 여론이 고개를 들었다. 김영삼은 아예 평민당을 민주당으로 흡수 통합하겠다고 나섰다. 똑같은 패자인데 유독 김대중에게만 비난의 화살이 촘촘히 박혔다.

평화민주당은 존폐의 기로에 놓여버렸다. 이 때 김대중은 다시 승부수를 던졌다. 1988년 2월 각계 재야 인사 91명을 영입했다. 박영숙, 이길재, 문동환, 성래운, 임채정, 이해찬, 이상수, 고영근 등이 김대중이 마련한 새 옷을 입었다. 재야 인사들의 제도권 진입은 정치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총선일은 4월 26일이었다. 개정 헌법에 따라 17년 만에 소선거구제로 치르는 선거였다. 김대중은 총재를 사퇴하고 전국구 11번으로 등록했다. 민심이 김대중을 버린다면 정치 인생을 마감하겠다는 어찌 보면 대국민 호소요, 어찌 보면 벼랑 끝 승부수였다.

다시 고단한 유세 장정에 돌입했다. 평민당 후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총선 결과 평민당은 70석(지역구 54, 전국구 16)을 얻었다. 김대중도 당선의 기쁨을 누렸다. 자신의 당선이 눈물겨웠다. 민정당은 125석, 민주당은 59석, 공화당은 35석을 차지했다. 평민당은 일약 제1야당으로 도약했다. 또 사상 처음으로 국회는 '여소야대'가 되었다.

김대중은 그해 5월 7일 임시전당대회에서 총재로 다시 추대되었다. 국회는 5월 30일 개원했다. 김대중은 16년 만에 의원배지를 달았다. 제1야당 총재가 되어 여의도 의사당에 들어갔다. 모두 "김대중은 끝났다"고 했지만 다시 우뚝 일어섰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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