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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는 '대통령 병' 환자? 그 진실은…

[김대중 평전 '새벽'·25] 6월 항쟁, 불멸의 시간들

6월 항쟁, 불멸의 시간들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 군이 치안국 대공분실의 취조 중 고문에 의해서 사망. 분노와 슬픔을 금할 길이 없다. 언제까지 이 악(惡)의 정권이 계속될 것인가.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겠다. 내일 긴급 의장단 소집. 악한 정부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지만 그 악한 정권과 싸우지 않고 방관하는 사람들의 책임은 호랑이의 재난보다 더 크다. 박 군의 부모의 심정을 생각하고 아버지가 불과 20만 원의 월수입으로 자식을 가르쳤던 일을 생각할 때 슬픔과 애잔한 심정을 금치 못하겠다. (1987년 1월 16일, 김대중의 육필 메모)

박종철이 사망했다. 경찰은 사인을 쇼크사라고 했지만 부검을 담당한 의사는 "물고문을 의심한다"는 소견을 냈다. 온 나라의 시선이 박 군의 죽음에 쏠렸다. 여론의 압박에 당국은 물고문 혐의를 인정하고 경찰관 두 명을 구속했다. 그러나 물속에 가라앉았던 사건은 4개월 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5월 18일 밤 명동성당에서는 '5·18 광주 항쟁 희생자 7주기 추모 미사가 열렸다. 김수환 추기경이 강론을 했다.

"광주의 한, 그것은 민족의 한이요, 역사의 한입니다. 민족의 가슴에 칼을 질러 깊은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게 한 그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민족 앞에 나서서 죄를 고백하고 속죄해야 합니다. 아마도 이 길만이 한을 덜고, 우리 겨레로 하여금 광주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 자신을 구하는 길이요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

정확히 전두환 정권을 겨냥한 질책이었다. 미사가 끝난 후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김 신부는 "사건 및 범인의 조작 책임은 현 정권 전체에 있다"며 사건 축소·은폐에 연루된 사람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검찰은 재수사를 벌여 고문에 직접 가담한 경관 세 명을 추가로 구속했다.

민심은 극도로 악화됐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전두환은 전면 개각을 단행했다. 국무총리 노신영, 안전기획부장 장세동, 내무부 장관 정호영, 검찰총장 서동권을 경질했다. 반면 재야 단체와 종교계, 여성계 대표들이 모여 '호헌 철폐 민주 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했다. 국본은 함석헌,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김지길, 윤공희, 홍남순 등을 고문에 추대했다. 김대중은 연금 중이라 결성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국본은 6월 10일 '고문 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 철페 민주 헌법 쟁취 국민 대회'를 열기로 했다.

6월 10일 정오,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는 민정당 전당 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가 열렸다.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선출했다. 그것은 계속해서 체육관 대통령을 뽑겠다는 선포였다. 이에 앞서 전두환은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열망을 깔아뭉개며 호헌을 선언했다. 이른바 4·13 조치였다.

잠실체육관은 흥이 넘쳤다. 유명 연예인들이 총출동했고 노태우의 애창곡 <베사메무초>가 춤과 함께 넘실거렸다. 전두환은 노태우의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들만의 축제였다. 장충체육관은 민심의 바다에 외롭게 떠있었다. 그날 국민들의 위대한 승리, 6월 항쟁의 막이 올랐다.

거의 같은 시각 성공회 대강당에서는 호헌 철폐 범국민 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옥외방송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지금 이 시각 진행되고 있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방송은 도심을 흔들었다. 전국 주요도시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오후 6시가 되자 차량에서 일제히 경적이 울렸다. 시위대가 도심으로 향했다. 사무직 노동자들이 사무실을 박차고 거리로 쏟아졌다. '넥타이 부대'였다. 이날 시위는 전국 22개 도시 514곳에서 30만 명이 넘게 참가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난사했다.

서울 시내에서 경찰에 쫓긴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공안 당국은 농성중인 시민, 노동자, 학생들을 '체제 전복 국기 문란 행위자'로 몰아 공권력을 투입을 서둘렀다. 이 때 신부들이 나섰다.

"도덕성과 정통성을 잃은 현 정권에 대한 투쟁은 정당하며 사제의 양심으로 농성대를 끝까지 보호할 것이다."

또 김수환 추기경이 '최후'를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그 사람들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나를 보게 될 것이고, 나를 쓰러뜨려야 신부님을 볼 것이고, 신부님을 쓰러 뜨려야 수녀님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 다음에야 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공권력을 투입할 수 없었다. 미국 정부도 주한 대사 제임스 릴리(James Lilley)를 외무부 장관에게 보내 폭력 진압에 반대할 뜻을 분명히 했다.

김대중은 집에서 비서들의 보고를 받았다. 비서실장 권노갑과 비서 한화갑, 이협은 실시간 상황을 전했다. 김대중은 넥타이 부대가 합세했다는 것에 매우 놀랐다. 그것은 중산층이 움직이고 있음이었다. 시위는 김대중의 바람대로 비폭력, 비용공, 비반미(非反美)로 흘러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전두환 정권의 종말이 어른거렸다.

ⓒ프레시안(손문상)

6·10 대회가 열리기 전날인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연세대학교 교문을 사이에 두고 전경 및 백골단과 학생들 사이에 격렬한 공방이 있었다. 이 때 날아온 최루탄 하나가 이 군의 뒷머리를 때렸다. 이 군은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뇌사 상태였다. 언론은 최루탄을 맞아 피를 흘리는 이한열과 그를 뒤에서 다른 학생이 껴안고 있는 사진을 일제히 보도했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4·19의 꽃 김주열을 연상케 했다. 그 한 장의 사진이 곧 6월 항쟁의 상징이 되었다. 이한열은 '6월의 꽃'이었다.

국본은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행사를 열었다. 전국에서 150여 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이날의 시위는 정권의 넋을 빼버렸다.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은 기로에 섰다. 시위대에 정면으로 맞설 것이지, 아니면 민주화 요구를 수용할 것이지 결정해야 했다.

바로 이 때 민정당 대표 노태우가 기자 회견을 열었다. 직선제 개헌과 함께 김대중을 사면·복권한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전두환 정권을 구하기 위한 '6·29 선언'이었다. 시국 사범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기본법 신장, 언론 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 8개항을 제시했다. 이는 대통령 전두환에게 건의하는 형식이었다.

전두환은 이를 즉각 수용했다. 전두환은 더 이상의 강공책이 불가능해진 국면에서 모든 공을 노태우에게 돌렸다. '각본과 감독에 전두환, 주연은 노태우'였다. 정권의 치밀한 각본임에는 틀림없지만 6월 항쟁으로 얻어낸 귀한 결과물이었다. 1987년 6월, 그 치열했던 시간들은 역사 속에서 불멸할 것이다.

정치권은 대통령 임기를 5년으로 하고 재선은 금지하는 데 합의했다. 대통령의 비상 조치권과 국회 해산권도 없앴다. 김대중은 정·부통령제와 대통령 4년 중임을 주장했지만 여당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대통령과 부통령 후보로 나서는 것은 막아야 했을 것이다. 새 헌법은 국민투표에서 93.1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

곧바로 대통령 선거전에 돌입했다. 야권은 후보 단일화가 최대 현안이었다. 김대중과 김영삼 중 누가 단일 후보로 적합한가. 김영삼 측은 "김대중은 작년 11월 불출마 선언을 했다"며 약속을 지키라고 했다. 그 '불출마 선언'이란 대체 무엇인지 살펴보자.

1986년 10월 '건국대 사태'가 일어났다. 26개 대학 2000여 명이 시위를 하다가 건국대학교 건물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전 정권은 이들을 '친북 공산 혁명 분자'로 몰아 진압했다. 무려 1274명을 구속했다. 그 와중에 다시 '금강산댐 사건'이 터졌다.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고 있으며 이를 터뜨리면 서울은 물바다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언론은 "63빌딩 절반이 잠긴다" "원폭 투하 이상의 피해" "100미터 물기둥이 강타"와 같은 속보를 연일 쏟아냈다. 훗날 금강산댐은 완전히 조작된 정보로 안기부가 꾸며낸 허구였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파괴력으로 정국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시국은 참으로 엄중했다. 김대중이 상황을 살펴보니 1980년 서울의 봄 끝자락과 비슷했다. 위기를 조장하여 다시 군부가 나설 수도 있었다. 제2의 쿠데타설이 떠돌고, 김대중에 대한 체포설이 사실인 냥 나돌았다. 김대중은 당시 이런 메모를 남겼다.

나의 피체(被逮)설이 나돌아 증시의 주가가 크게 하락했으며 집에 전화가 걸려와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이들이 있었다. (1986년 10월 14일)

김대중은 깊이 고민했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난국을 헤쳐 나가는 데는 대선 불출마 선언이 가장 유효해보였다. 11월 5일 민추협 사무실에서 성명서를 읽었다.

"최근에 일어난 건국대학교에서의 사태에서 오늘의 현실을 가져오는 데 아무 책임도 잘못도 없는 우리 젊은 자식들이 무더기로 희생되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앞으로 이러한 사태가 다시 일어날 수도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나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심정이다.

현 난국을 수습하는 길은 국민의 절대 다수가 원하는 대통령 중심 직선제로의 개헌에 의한 조속한 민주화의 실현밖에 없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이러한 국민적 열망에 귀를 기울일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제 나는 여기서 대통령 중심제 개헌을 전두환 정권이 수락한다면 비록 사면·복권이 되더라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을 천명한다."

김대중의 불출마 선언은 이렇게 나왔다. 헌정 중단 같은 파국을 모면해 보려는 고육책이었다. 그런데 전두환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전제로 한 불출마 선언을 간단히 일축해 버렸다. 전제 조건들이 즉각 거부당했으니, 불출마 선언 자체도 폐기된 셈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서독을 방문 중이던 김영삼은 현지에서 회견을 하며 중대한 얘기를 했다. 그 역시 당시 시국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김대중의 불출마 선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김(대중) 의장이 망명에서 돌아온 뒤 나는 김 의장에게 '당신이 나이도 5세나 위이고 하니 사면·복권이 되면 당신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겠다'고 얘기했으며, 지금도 이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김영삼 측에서 불출마 선언을 지키라고 했다. 그리고 언론들은 불출마 선언을 '살아있는 약속'으로 연일 크게 보도했다. 언론은 발언의 배경을 따지지도 않았다. 나쁘고 불리한 것은 모두 김대중의 몫이어야 했다. 김대중의 자존심인 '행동하는 양심'에 비수를 꽂았다. 언론은 김대중에게 '뭔가 분명하지 않은 음험한 인물'이란 멍에를 씌우고 거기에 맞춰 기사를 생산했다. 김대중은 다시 언론에 깊게 찔렸다.

1987년 9월 김대중은 광주와 목포를 찾았다. 광주는 16년 만이었다. 광주 역 광장과 시내의 모든 도로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김대중은 엄청난 환영 열기에 고무되었다. 수많은 현수막 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시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김대중은 잘 알고 있었다. 김대중은 곧바로 망월동 5·18 묘역으로 이동했다. 묘역 주변에도 수만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중은 5·18 희생 유가족과 부상자들을 껴안고 울었다. 무슨 말이 필요할 것인가. 끝없이 흐느꼈다. 유족도 김대중과 함께 울었다. 그 울음은 채록되어 지금 김대중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김대중은 울면서 추도사를 읽었다.

"영령들이시여! 무등산이 어머니의 품처럼 너그럽고 인자한 눈길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들의 고향 광주를 아직은 노래하지 않으리라고 절규한 시인의 다함없는 고통의 깊이를 나는 이해합니다. 광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며, 광주를 우회해서는 민족사의 바른 전개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평화와 자유와 민주의 찬가가 울려 퍼지는 그날, 광주는 구원의 상징으로 영원한 별빛이 되어 민족의 앞길을 인도할 것입니다."

다시 금남로 입구에서 도청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환영인파는 6차선 도로를 가득 메웠다. 수십 만 명이 김대중을 외치고 있었다.

다음 날 목포와 하의도를 찾아갔다. 김대중은 다시 고향 사람들의 환대에 감격했다.

목포, 하의도 너무도 기대 이상의 성공. 목포와 하의(도)는 나의 어머니,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 (1987년 9월 9일 육필 메모)

귀경길에 대전역 광장에서 연설을 했다. 청중들은 5만 명도 넘었다. 열기로 광장이 터질 듯했다. 김대중은 저것이 민심이라고 생각했다. 저렇듯 간절하게 정권 교체를 바라는 민심을 외면해서는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굳혔다. 김대중의 광주·대전 방문은 계산된 행보였다. 자신의 지지 열기를 내외에 과시함으로써 출마 명분과 당위성을 획득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다른 무리들은 이를 간파하고 대통령 병 환자의 정치적 쇼로 치부해버렸다. 김대중의 지지자들이 그렇게 열성적으로 뭉쳐 있는 것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끼는 무리도 있었다. 소리 낼수록, 다가갈수록 멀어져가는 사람들. 열광하는 지지자들은 결국 소수였고, 멀리서 보고 있는 관망자들은 다수였다.

그것은 김대중의 슬픈 운명이었다. 당시 김대중은 그것을 몰랐던 것 같다. '1971년 대선의 열기'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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