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발족 선언을 했다. 그리고 6월 14일 결성 대회를 가졌다. 지도부는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철저히 반분했다. 김영삼은 공동의장에, 김상현은 김대중을 대신하여 공동의장 대행에 취임했다. 망명 중인 김대중은 고문을 맡았다. 민추협은 민주화 여정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독재 타도의 선봉에 섰다.
그 해 여름 김대중은 귀국을 결심했다. 한국에는 민주화 동지들이 있었고,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들이 있었다. 그들의 고난에 동참해야 했다. 또 김대중 자신의 귀국이 민주화 운동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제는 '80년대에는 한국에서 민주화가 이뤄질 것'이란 자신의 예언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정면승부를 해야 했다.
사실 김대중은 향수에 시달리고 있었다. 망명지의 향수는 지독했다. 어언 이국에서 환갑을 맞고 있었다. 한국, 그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 때 남긴 육필메모로 절절한 심경을 엿볼 수 있다.
"요즘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너무도 간절하다. 돌아만 간다면 감옥도 달게 받겠다. 우리 국민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나 바치고 싶다. 바칠 것이 너무 적은 것이 한이다." (1984년 4월 15일)
미국 국무장관 조지 슐츠(George Shultz)에게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며칠 뒤에는 대통령 전두환에게도 등기 우편을 보내 귀국을 통보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한국에서 안전기획부 요원이 찾아왔다. 귀국을 강행하면 신변의 안정을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가 면담을 요청했다.
"미국 정부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귀국을 미루시면 좋겠습니다."
미국 정부까지 나서서 만류하니 일단 보류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역시 돌아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타임스> 기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한국에서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당신이 귀국하면 투옥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귀국을 하실 겁니까."
김대중은 어떤 위협이나 박해가 있어도 귀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자신이 귀국해야하는 이유와 한국의 실상 등도 알렸다. 이 같은 내용이 보도되자 엄청난 반향이 있었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여론은 한가지로 모아졌다.
"김대중을 제2의 아키노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상황은 역전되었다. 미국 정부가 여론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급기야 한국 정부에 김대중의 안전 귀국을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1985년 1월 18일 동교동과 상도동계가 주축을 이룬 신당이 탄생했다. 민추협을 모체로 한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창당한 것이다. 국회의원 선거일이 2월 12일로 잡혀있었다. 선거에 도움이 되려면 그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잡은 날이 2월 8일이었다.
1월 19일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별 강연을 했다. 그랜드 올림픽 오디토리엄에 5000여명이 모였다. 김대중은 외쳤다.
"한국 정부가 나를 다시 투옥시킨다면 전 세계 여론과 인류의 양심, 그리고 우리 국민이 결단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나를 제2의 아키노로 만든다면 그들도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을 쫓는 거대한 의식과도 같았다.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서독 대통령 폰 바이츠제커, 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 일본 사회당 당수 이시바시 등이 귀국을 축하하는 전문을 보내왔다. 그것은 김대중의 안전을 보장하라는 국제 사회의 압력이었다.
귀국일이 다가오자 김대중은 극도로 초조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저명인사 37명이 귀국길에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모두 인간방패를 자처했다. 에드워드 페이건(Edward Feighan)과 토머스 포글리에타 하원의원, 퍼트리샤 데리언(Patricia Derian) 전 국무부 인권 담당 차관보, 토마스 화이트(Thomas White) 전 대사, 퇴역 해군 대장, 가수, 패리스 하비 목사, 브루스 커밍스 교수, 인권운동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장 등이 그들이었다.
목숨을 건 여행이 시작되었다. 노스웨스트 항공기가 워싱턴 내셔널 공항을 이륙했다. 2월 6일 오전 10시 15분이었다. 탑승객들은 긴장감을 쫓으려 애써 큰 소리로 떠들거나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기내는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떠나 올 때는 한밤중에 가족들만 있었지만 돌아갈 때는 대낮에 수많은 동지들이 곁에 있었다. 그런데도 표정들이 어두웠다.
일본에 내렸다. 숙소인 나리타 공항 근처의 홀리데이인 호텔에 보도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 기자만 100명이 넘는 듯했다. 회견장에서 귀국의 당위성을 얘기했다. 그것은 전두환 정권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내일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 나의 귀국은 필요합니다. 나는 특별한 사건을 일으킬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비겁한 짓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 날 마침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김대중은 동행한 사람들에게 당부했다.
"아키노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 요원의 안내를 받고 가다 살해당했습니다. 나는 절대 특별 안내는 받지 않겠습니다. 일반인들과 출입 심사 창구로 가겠습니다. 내가 다른 곳으로 끌려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저들이 살해 의도를 지녔으면 어디서 어떻게라도 죽일 것이다. 그래도 김대중은 그렇게 당부했다. 정말이지 두려운 길이었다.
2월 8일 오전 11시 40분 김포공항에 내렸다. 공항 인근은 사람물결이었다. 오직 김대중을 보려고 모인 30만 명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런 인파를 볼 수 없었다. 일행이 공항 빌딩에 들어서자 사복경찰이 뛰쳐나왔다. 동행 인사들이 얼른 김대중과 이희호를 에워쌌다. 경찰들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러자 경찰이 폭력을 휘둘렀다. 공항은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경찰들은 김대중과 이희호를 대기 중인 마이크로버스에 강제로 태웠다. 김대중은 호주머니 속에 든 귀국 성명을 꺼내지도 못했다.
세계 언론은 공항에서의 폭력을 타전했다. <뉴스위크>는 '폭풍의 귀국'이라는 표지 기사를 실었다.
지난 주 수천 명의 군중이 깃발을 흔들며 "김대중"을 외쳤다. 군중들은 서울 김포국제공항 밖의 회색빛 대로변에 줄지어 서 있었다. 한국의 야당 지도자가 탄 NWA 191편은 공항에 무사히 안착했다. 그는 군중들에게 인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김대중 씨와 부인, 그리고 미국인 고관들을 비행장의 출입 제한 구역으로 몰고 갔다. 거기서 50여 명이 넘는 사복 요원들이 이 야당 지도자를 수행원들과 분리시켜 끌고 갔다. 그들은 미국인 몇 사람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고 땅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김대중 씨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처박았다. 김대중 씨와 부인은 백색 마이크로 버스에 실려 공항 뒷길을 통해 자택으로 압송되었고, 자택에 도착 즉시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폭풍의 귀국'은 선거 정국에서도 폭풍을 일으켰다. 나흘 후에 치러진 선거에서 그 위력이 입증됐다. 신민당은 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을 얻어 무려 67석을 차지했다. 서울·부산·광주·인천·대전 등 5대 도시에서는 전원이 당선됐다. 민심을 가뒀던 둑이 터져 전두환 정권을 덮쳤다. 선거 혁명의 가운데에 김대중이 있었다. 제1야당인 민한당은 81석에서 35석으로 줄어들었다. 민심의 물줄기는 관제 야당인 민한당을 쓸어버렸다.
집에 돌아온 김대중은 수시로 가택 연금을 당했다. 마포 경찰서장이 통보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주요 행사나 초청 모임이 있으면 어김없이 연금을 당했다. 김대중 집에 몰린 경찰 숫자를 헤아리면 그날 열릴 행사의 의미와 규모를 알 수 있었다. 연금은 짧으면 하루, 길면 두 달도 넘었다. 어떤 때는 대문 앞에서 길을 막기도 했다. 그럴 때면 "차라리 교도소에 보내라"며 일갈했다. 연금이 계속되자 비서들은 김대중의 집을 '동교동 교도소'라 불렀다.
김대중이 남긴 육필 메모를 보면 '박종철 군 추모준비회'의 참석을 가로막는 연금 조치를 당하며 이렇게 한탄했다.
"우리 국민에게 최대의 불행은 절망감이다. 국민은 그들이 직면한 문제들 즉 인권 유린, 부패, 사회적 불의를 어디에도 호소할 길이 없다. 언론도, 국회도, 사법부도 모두 정부의 어용이요 시녀다. 이런 문제를 국민에게 호소하고 싶어도 집회의 자유도, 시위의 자유도 없다. 국민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이것이 가장 두렵고 위험한 문제다." (1987년 1월 26일)
당원과 시민 및 학생들이 집 근처에서 연금 해제를 외치며 기습 시위를 벌였다. 집 안에서도 시위를 벌였다. 김옥두, 남궁진 비서가 벌인 '지붕 위의 시위'였다. 두 비서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기왓장을 밟고 플래카드를 펼쳐 들었다.
"김대중 선생 불법 감금 해제하라."
이불 광목 호청을 뜯어서 만든 플래카드였다. 그리고 "불법 감금 해제하라"고 외쳤다. 두 사람의 외침이 얼마나 멀리 가겠는가. 하지만 이 위험한 시위는 외신을 타고 세계로 퍼져나갔다. 김대중은 그 광경이 너무 아파서 차마 볼 수 없었다. 귀국 이후 1987년 6·29 선언으로 사면·복권이 될 때까지 무려 55차례나 가택 연금을 당했다.
ⓒ프레시안(손문상) |
남쪽의 독재 국가 필리핀에서 의미 있는 혁명이 일어났다. 독재자 마르코스가 피플 파워(민중의 힘)에 굴복했다. 1986년 2월 25일 권좌에서 쫓겨났다. 필리핀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집권했다. 김대중은 일주일 전 독재자 마르코스의 퇴진을 예견하며 이런 메모를 남겼다.
"레이건 대통령이 전일의 태도를 바꾸어 필리핀 선거의 부정을 비난하고 나섰다. 마르코스는 결국 필리핀 국민과 세계 여론의 규탄 앞에 머지않아서 쓰러질 것이다. 한국에도 민주주의가 80년대 후반에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1986년 2월 17일)
필리핀에서의 민주 정권 탄생은 낭보였다. 봄바람이 되어 한국에 상륙했다. 직선제 개헌 서명 운동이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개헌추진위 지부 결성식이 속속 열렸다. 부산에는 4만, 광주에 10만, 대구에 2만 명이 모였다. 김대중은 연금을 당해 녹음 연설을 해야 했다. 얼굴 없는 연설임에도 국민들은 환호했다.
전두환 정권은 허둥댔다. 정권 말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김대중은 '1979년 유신 말기'를 떠올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터지는 최루탄 속에는 뭔가 다른 게 들어있었다. 1980년 안개 낀 '서울의 봄'과는 달랐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봄바람을 맞으면 '힘'이 느껴졌다. 바로 민중의 힘이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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