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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망명 DJ, 전두환 '용돈'을 받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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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망명 DJ, 전두환 '용돈'을 받았나?

[김대중 평전 '새벽'·23] 2차 망명, 다시 길 위에 서다

2차 망명, 다시 길 위에 서다

이명(耳鳴) 현상이 나타났다. 왼쪽 귀였다. 오랜 독방 생활에 김대중의 몸은 무너지고 있었다. 고관절 장애는 고통 자체였다. 다리가 붓고 곧잘 쥐가 났다. 1982년 12월 10일 안전기획부 간부가 김대중을 찾아왔다.

"몸도 불편하신데 미국에서 치료받지 않으시겠습니까."

뜻밖이었다. 하지만 혼자 미국으로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민주화 투쟁을 하다 갇힌 동지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다 수감된 광주 시민들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뜻이 그러하다면 나를 풀어주고 국내에서 치료받게 해주시오."

안기부 간부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돌아섰다. 그런데 얼마 후 아내가 찾아와 미국 출국을 간곡하게 권했다. 이번에는 김대중이 답을 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왜 저들이 미국행을 권하는지 따져보았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정치인과 민주 세력을 탄압하며 철권을 휘둘렀다. 정통성이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국내외의 역풍은 만만찮았다. 또한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국제 사회의 압력은 갈수록 거세졌다. 김대중 석방은 국내외 국면 전환을 위해 필요했다.

며칠 후 다시 아내가 면회를 왔다. 이번에도 이희호는 간곡하게 미국행을 설득했다. 가족들과 안병무, 예춘호 등도 출국을 권유했다고 전했다.

"해외에서도 우리가 할 일은 많을 것입니다. 또 당신이 미국으로 떠나가야 구속된 분들이 나올 수 있답니다."

그 말에는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김대중은 결국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러자 안기부 간부가 찾아와 각서를 써 달라고 했다. 이런 요지였다.

'병 치료에만 전념하고 정치 활동은 안하겠으니 선처해 달라.'

김대중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출국을 위해서 필요한 절차일 뿐 절대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기부장 노신영은 이희호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절대 발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인격을 믿으세요."

김대중은 각서를 썼다. 그러나 저들에게 '인격'은 없었다. 각서는 문공부 장관 이진희가 기자 회견을 하면서 즉각 공개해 버렸다. 김대중은 신군부 쿠데타 세력에게 선처를 구걸하는 비루한 정치인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알릴 사람도, 방법도 없었다. 어쩌면 김대중은 저들에게 속아 주었는지도 몰랐다. 인격에 오물을 투척하고 이미지를 구겨서 정치생명을 끊으려는 수법을 김대중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김대중은 12월 16일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

출국을 앞두고 이희호는 비서들을 동교동으로 불러 모았다. 정표나 기념물이 될 만한 김대중의 물건을 나눠주었다. 누구는 담배 파이프를, 누구는 김대중이 덮었던 담뇨를, 누구는 반지를 받았다. 언제 다시 만날 지 알 수 없었다. 이희호가 말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다보면 반드시 다시 만날 날이 올 것입니다. 무엇보다 건강을 지키세요."

모두 고개를 숙였다. 비서들은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김대중 없는 동교동, 김대중 없는 야당 그리고 대한민국을 떠올렸다. 간절히 뵙고 싶었다. 그 앞에서 절이라도 올려야 했다. 성치 않은 몸을 끌고 다시 망명길에 오른다니……. 정권은 무도했고, 시절은 여전히 수상했고, 현실은 서러웠다.

12월 23일 밤 김대중은 아내, 두 아들(홍업, 홍걸)과 함께 극비리에 김포공항으로 실려 갔다. 가로등은 모두 꺼져 있었다. 공항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비행기 트랩 앞이었다. 노스웨스트 항공이었다. 김대중이 막 자리에 앉았을 때 청주교도소 부소장이 나타났다.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읽었다.

"형 집행 정지로 석방한다."

김대중은 그 누구의 배웅도 받지 못했다. 이희호가 눈물을 훔쳤다. 그 시간 서울 밤거리에는 캐럴이 나뒹굴고 있었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비행기는 어둠을 걷어차며 이륙했다. 그리고 이내 어둠에 잠겼다. 1973년에는 납치당해 모국 땅으로 끌려왔는데, 9년 후에는 이국땅으로 쫓겨나고 있었다. 다시 망명객으로 떠돌아야 했다. 고단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프레시안(손문상)

'9년이란 세월의 간극에서 변한 것은 무엇인가.'
김대중은 시상(詩想)을 더듬었다.

잘 있거라 내 강산아 사랑하는 겨레여
몸은 비록 가지마는 마음은 두고 간다
이국 땅 낯설어도 그대 위해 살리라

인제가면 언제 올까 기약 없는 길이지만
반드시 돌아오리 새벽처럼 돌아오리
돌아와 종을 치리 자유종을 치리라


새벽처럼 돌아오고 싶겠지만 앞날은 알 수 없었다. 자유의 종을 미친 듯이 치고 싶겠지만 현실은 너무도 냉혹했다. 김대중은 다시 자신을 일으켰다.

'살아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사망의 골짜기에서도 내일을 준비했던 김대중, 그가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칠흑의 어둠 속을 뚫고 새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노스웨스트 항공기는 12월 23일 밤 10시 45분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 도착했다. 깊은 밤에 김대중이란 망명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300여 명이 김대중을 연호했다. 최성일, 한완상, 이근팔, 패리스 하비(Pharis J. Harvey) 목사 등이 보였다. 김대중의 사진과 '행동하는 양심'이란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문동환 목사가 환영사를 했다.

"다니엘을 사자굴 속에서 건지신 하나님은 김대중 선생을 악랄한 독재자 전두환의 손에서 건지셨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김 선생께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큰 역할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 목사가 큰 눈에 눈물을 담았다. 문동환은 김대중의 앞날이 험난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내 이희호가 연신 눈물을 찍어냈다.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가 보낸 그의 수석 비서관은 환영 메시지를 읽었다.

망명객 김대중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회와 대학, 인권 단체와 협회에서 김대중을 초청했다. 미국에 머물던 2년 1개월 동안 150회가 넘는 연설을 했다. 주제는 거의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이었다. 김대중은 늘 길 위에 있었다. 어디서 누가 불러도 달려갔다. 수십 명이 모여 있는 연설회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물론 수천 명이 모인 집회도 많았다.

그해 9월부터 하버드 대학 국제문제연구소(CFIA, Center for International Affairs)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에즈라 보겔(Ezra Vogel), 제롬 코언, 에드 베이커, 벤저민 브라운(Benjamin Brown), 쿠퍼(Cooper) 교수 등을 만나 의견을 교환했다. 하버드 수학 중에도 강연 요청은 끊임없이 들어왔다. 하버드 대학 '아시아법률센터' 강연에서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지금 망명까지 하면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민주주의는 서구 사회의 산물입니다. 한국의 전통에는 민주주의 요소가 없지 않습니까."

사실 김대중은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주한 미군 사령관 위컴도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돼도 따를 것이고, 체질상 민주주의가 맞지 않다."

주한 미 대사 리처드 워커는 이런 폭언을 했다.

"한국 국민은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

한국에 파견된 고위 관리들의 생각이 저럴진대 일반 미국인들의 의식은 어떨 것인가. 김대중은 미국인들의 조소 섞인 질문이 아팠다. 한민족의 역사를 뒤져 의구심을 걷어내려 최선을 다했다.

"첫째, 단군 신화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건국 설화들 속에서 민주주의의 근본정신의 하나인 민본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단군 신화에 나오는 홍익인간 사상은 백성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는 전제로 이뤄졌습니다. 신라나 가야의 건국 설화를 보면 백성이 모여 왕을 추대합니다. 어떤 나라 건국 설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예입니다.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것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기본 사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둘째, 최근 100년의 역사가 곧 권위주의에 맞서 싸운 투쟁의 기록입니다. 조선 왕조가 망한 지 9년 만에 일어난 3·1 운동에서 왕정복고를 주장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프랑스가 대혁명 후에도 근 200년 동안 끈질긴 왕정복고의 역사를 거듭했던 것과 비교해 보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60년 4·19 혁명, 1979년 부산·마산 항쟁, 1980년 광주 항쟁 등이 민주 정신에 입각한 투쟁이었습니다.

셋째, 조선 왕조 500년을 지배하던 유교의 근본정신은 민본주의였습니다. 따라서 흔히 유교적 전통을 가진 나라가 민주주의에 친숙하지 않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맹자의 주장입니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임금은 하늘의 아들이다. 천자는 하늘을 대신해서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 사명을 받았다. 그런데 천자가 하늘의 뜻을 어기고 백성에게 학정을 한다면 백성은 들고일어나 임금을 쫓아내고 새로운 임금을 들여올(易姓革命)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넷째, 우리나라는 국민의 교육 수준이 세계 정상급입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교육 수준 없이는 창출될 수 없으며, 교육받는 국민만이 주권 의식과 책임 의식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하지 못한다면 어느 나라에서 민주주의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김대중은 망명 생활 내내 형편이 어려웠다. 망명일지와 같은 김대중의 육필 메모를 보면 돈에 관련한 얘기들이 빈번하게 나온다.
'요즘은 경제 문제로 고민이 크다. 사무실의 집으로의 철수를 고려 중.' (1984년 3월 8일)
'가구 렌트에 2500불이 들어서 아파트 얻는 것은 포기해야할 형편.' (5월 5일)

그런데도 국내에서는 김대중이 미국에서 호화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고급 아파트에서 잘 먹고 잘 입는다. 손가락에는 커다란 루비 반지를 끼고 다닌다."

"수많은 경호원들을 데리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김대중이 서울을 떠나올 때도 "대통령이 제공한 특별 전세기를 타고 갔다." "이희호가 이순자에게 20만 달러를 받았다"는 등의 얘기가 사실처럼 굴러다녔다. 모두 안기부가 생산해낸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국내 언론은 그런 내용을 양념을 쳐서 슬쩍슬쩍 보도했다. 용서 못할 행태였지만 김대중에게는 방어할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김대중은 틈틈이 그간 주창해온 '대중 경제론'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유종근 박사의 도움을 받아 '대중 참여 경제론'으로 발전시켰다. 뉴저지 주정부에 근무하는 유종근은 김대중의 논리를 정확하게 간파하여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 논문집은 하버드 대학 측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부교재로 채택했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지식뿐만 아니라 사람도 얻었다. 필리핀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Benigno Aquino)도 만났다. 김대중과 아키노는 조국을 떠나와 이국땅에서 똑같이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친해졌다. 현실을 보는 눈과 가슴에 품은 이상이 같았기 때문에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아키노는 소탈하고 호방했다. 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는 상대적으로 과묵하고 차분했다. 어느 날 아키노가 말했다.

"우리가 아예 모임 하나를 만들면 어떻겠습니까."

"좋지요. 우리 아시아의 민주주의를 위한 공동의 조직체를 만들어서 함께 일합시다."

언젠가는 '아시아 민주 전선' 같은 민주화 운동의 구심체를 만들기로 했다. 아키노는 명석했고 친화력이 뛰어났다. 그런 아키노가 갑자기 귀국을 서둘렀다. 김대중은 불길했다. 아키노는 세계의 비상한 관심 속에 귀국길에 올랐다. 예감은 적중했다. 아키노는 마닐라 공항에서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다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비극적인 장면은 긴급 뉴스로 종일 방영됐다.

김대중은 큰 충격을 받았다. 즉각 아키노 피살 관련 성명을 발표했다. 재미 필리핀인들의 집회에도 참석, 추모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키노의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김대중도 귀국을 서두르고 있었다. 역시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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