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곁에 있는데도 김대중은 '자신을 죽일' 사람들을 용서하고 있었다. 사형 선고를 받고 감방에서 쓴,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용서>라는 수상을 보자.
'우리가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내가 선하고 의롭기 때문이 아니다. 나도 용서 받아야할 죄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말을 몹시 싫어하고 어리석은 소심자(小心者)의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사고방식을 가졌던 나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몰지각(沒知覺)을 범했던 것인가!
나는 나의 지난 일생을 돌아볼 때 제일 내가 남몰래 저지른 가지가지의 수치스러운 일들, 악한 행위들 그리고 마음에 품었던 수많은 사악하고 부끄러운 것들을 생각할 때 만일 그것들을 모두 극장의 스크린에다 그대로 비추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지켜보라 한다면 과연 나는 나의 가족으로부터 조차 현재의 믿음과 존경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하다. 나는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남을 용서해야하고 기꺼이 용서한다.
용서는 따지고 보면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의로워지고 정신적으로 건강해진다. 용서하지 않고 남을 증오하고 저주한다는 것은 자기를 괴롭히고 고독하며 편협(偏狹)하게 만들 뿐이다.
용서만이 진정한 대화와 화해의 길이다. 타인의 결함(缺陷)과 과오(過誤)에 대한 용서 없이 어떻게 합의에 이르는 대화와 공동의 목적을 위한 화해가 가능할 것인가?
용서 없이는 사랑이 없다. 부부 간이건 부자 간이건 벗과의 관계건 용서할 때만 사랑의 문은 열린다. 우리는 용서하고 또 용서해야한다. 그리고 용서받고 또 용서 받는 것이다.' (1980년 11월 25일)
사형수 김대중은 죽음 앞에서도 용서를 얘기하고 있다. 훗날 군사 쿠데타의 머리인 전두환·노태우를 용서한 것은 이렇듯 감옥에서 이미 결심했다. 김대중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아우와 자식, 비서, 동지들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갔지만 가해자들을 용서했다. 참으로 비범한 일이다.
그렇지만 전두환·노태우의 중죄를 용서한 것에는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용서를 넘어 대통령 재직 시에 전두환과 만찬을 가졌다. 광주 시민들을 집단 학살한 무리의 수괴와 함께 밥을 먹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희생자 중에는 "김대중 석방"을 외치다 숨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용서가 신념이라고 하지만 쿠데타 주범들을 처벌하지 않음은 또 다른 죄가 될 수도 있었다. 국민의 동의 없이 개인의 신념으로 국사범을 용서해도 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김대중을 보는 눈이 정확했던 서남대학교 교수 김욱마저도 매우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영남 패권주의 세력과의 타협에 불과하다며 질타했다.
김대중은 "우리 민족이 3·1 운동, 8·15 해방, 4·19, 10·26, 그 어느 때도 독립과 민주화의 목적만 추구했지 정치적 보복은 결코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큰 교훈과 용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모두 반동 세력에 의해 반격 당한 역사다. 그 반격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넓은 의미에서 말한다면 지금도 우리는 역사의 잘못을 단죄하지 못한 역사적 후유증을 앓고 있다. 마찬가지다. 김대중 역시 전두환과의 만찬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얻는 데는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지만 단죄 없는 역사라는 오류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단죄는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김욱의 질타가 아니더라도 쿠데타의 머리인 전두환을 용서한 것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지금까지도 김대중의 '개인적 신념'으로 역사의 죄인들이 풀려나 활보하고 있음을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김대중은 '옥중에서의 다짐' 외에도 주목할 만한 '용서의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지닌 '한(恨)'에 대한 김대중의 생각이었다.
'한은 민중의 좌절된 소망이다. 한은 민중의 그 좌절된 소망이 어느 땐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민중의 기다림이다. (…) 한은 패배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안고 전진해야 한다. 한은 또한 원망이나 복수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나의 일생을 회고하더라도 한에 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행동하는 양심>에서)
김대중은 일찍부터 우리네 한은 목적을 달성해야 풀리지 보복으로는 풀리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춘향의 한은 사랑하는 낭군 이 도령을 만나서 풀었지 변 사또에 대한 보복으로 풀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흥부의 한은 배고픈 것이 해소됨으로써 풀렸고, 흥부는 오히려 그토록 박해했던 형 놀부를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광주 시민들이 비록 억울한 죽음을 당했지만 이를 보복으로 갚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광주의 한은 광주 시민들이 그토록 바라던 민주 회복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대중은 또 우리 민족은 패자들에게 관대했음을 들었다. 1985년 한 월간지에 실린 김대중의 기고문을 살펴보자.
'사실 우리 민족은 패자에게 언제나 관대하다. 해방 후 그토록 우리를 박해했던 일본 사람들에게 우리 국민은 얼마나 관대했던가. 일인들이 패전 후 만주나 북한에서 소련군에게 겪었던 그 무시무시한 박해의 이야기를 들어볼 때 우리는 얼마나 관대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이 글로 미루어 김대중은 우리 역사와 민족에게서 '용서'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찾아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침략자 또는 지배자들에게 관대했다.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숱한 악행을 저질렀지만 이들에게 보복을 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대륙에 혹처럼 붙어있는 한반도'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다. 그처럼 작은 나라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용서의 힘'이었다고 본 것이다. 결국 용서는 수상에서 밝힌 것처럼 '자기 자신을(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이를 공론화하지는 않았다. 자칫 패배의식으로 해석되어 논란을 불러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치인이 입에 담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
김대중은 '용서의 힘'을 믿었던 것 같다. 한 발짝 더 나가면 그 많은 외침(外侵)이 있었고 이에 굴복했지만 이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많은 침략 국가들 중 상당수가 멸망했거나 쇠락했지만 우리 민족은 굳건히 살아남았음에 주목했다. 김대중은 망명 시절인 1983년 3월 12일 워싱턴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우리는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 제국주의적인 발상에서 온 민족에 대한 가치평가를 버려야 합니다. 만일 위대한 민족이 남의 나라에서 짓밟고 침략하고 남의 것을 빼앗고 나 혼자만 살기 위해서 이웃이야 어찌됐든 좋다는 식으로 밀고나가는 그런 나라가 위대한 민족일 것 같으면 한국은 위대한 민족이 아닙니다."
김대중은 서양의 역사에서도 '용서의 힘'을 찾아냈다. 영국이 프랑스나 러시아보다 먼저 의회 정치의 꽃을 피운 것은 '용서의 결단'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렇게 설파했다.
'영국은 1649년 청교도 혁명 때 국왕 찰스 1세를 처형했습니다. 그 같은 정적(政敵)에 대한 극한적 처벌과 보복은 극심한 혼란과 내분을 초래했습니다. 그 결과 크롬웰이라는 더욱 지독한 독재자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 경험을 값진 교훈으로 삼은 영국 국민들은 그 후 1688년의 명예혁명 때는 찰스 1세의 왕권지상주의를 그대로 답습한 그의 둘째 아들 제임스 2세를 축출할 때, 그가 프랑스로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 제임스 2세는 프랑스에 머물며 망명 정부를 세우고 그의 아들, 그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무려 3대에 걸쳐 왕권을 수복하겠다며 영국 정부를 괴롭혔습니다. 영국 정부는 그러한 사태를 예상했지만, 정치 보복을 함으로써 입게 될 정치 사회적 후유증에 비하면 오히려 그 편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
용서는 과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용서 받은 자들의 반격과 보복 당한 자들의 또 다른 형태의 보복, 그것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제 우리는 '김대중의 용서'도 역사에 묻어야 한다. 훗날 이 땅의 눈 밝고 마음 어진 이들이 이를 평가할 것이다.
논란은 접어두고, 분명한 것이 있다. 김대중은 일찍이 가해자들을 용서하겠다고 다짐했고 대통령이 되어 마침내 이를 실천했다. 또 약속대로 재임 기간 동안 정치 보복은 일체 하지 않았다. 정부 수립 이후 대통령이 되어 정치 보복을 하지 않은 사람은 김대중이 처음이었다.
4월 어느 날 아들 홍일에게서 편지가 왔다. 발신지는 대전교도소였다. 교도소의 아들이 또 다른 교도소의 아버지에게 글을 올리고 있었다. 지난 해 5월 17일 아버지와 함께 잡혀 왔으니 거의 1년만이었다. 겉봉의 아들 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졌다. 내내 편지를 품고 있다가 밤이 돼서야 이불 속에서 편지를 읽었다. 누가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알전구를 이불속으로 끌고 들어가 한자 한자 읽었다. 편지는 '사랑하는 아버지께'로 시작했다.
'꿈속에서도 간절히 만나 뵙고 싶었던 아버지께 편지를 쓴다고 생각하니 먼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군요. 무엇보다도 먼저 저희 가족들과 많은 분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아버지의 생명을 지켜주신 주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 아이들이 식사 때와 잠잘 때 "할아버지와 아빠가 건강하게 지내고 빨리 우리들한테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는군요. 아이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글씨가 보이지 않아 눈물을 닦아냈지만 이내 또 눈물이 쏟아졌다.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이불 속에서 홍일이 이름을 불렀다. 아들은 편지가 검열당할 것임을 알고 추신을 달았다.
'이 편지를 취급하시는 분께-이 편지를 아버지께서 받아보실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편지를 가슴에 품고 누웠으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를 고문하고, 나를 죽이지 왜 아들에게 형벌을 가하는가.'
신군부 고문 기술자들은 "김대중이 빨갱이임을 인정하라"며 홍일에게 온갖 고문을 자행했다. 거짓 증언을 할 수도 없고, 고통을 이겨낼 힘도 없었다. 김홍일은 죽기로 했다. 책상 위로 올라가 머리를 시멘트 바닥에 찧었다. 그 때의 충격으로 평생 병마가 따라다녔다.
점차 감옥생활에도 '여유'가 스며들었다. 김대중은 독서에 몰두했다. 신학, 철학, 정치, 경제, 역사, 문학 등 모든 분야의 책들을 읽었다. 다시없는 배움의 시간이었다. 김대중은 "감옥이야말로 나의 대학이었다"고 술회했다. 아내 이희호는 600권의 책을 차입해 주었다.
김대중은 아널드 토인비가 지은 <역사의 연구>(12권)를 깊이 읽었다. 문명은 도전에 대한 응전의 산물이라는 탁견에 눈이 환해졌다. 특별한 영감과 용기를 얻었다. 앨빈 토플러가 쓴 <제3의 물결>을 읽고 농경과 산업사회 다음에는 지식정보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내면은 호기심으로 일렁거렸다. 이후 미래 사회를 예측하는 서적들을 탐독하며 만일 훗날 국가를 경영하게 되면 반드시 정보강국을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또 김대중은 '하느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신데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온갖 서적을 읽으며 번민을 거듭해도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프랑스 신부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의 저서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완전한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미완성의 세상을 만드셨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지금 완성을 향한 역사(役事)의 과정에 있다. 이 때문에 이 세상에는 완성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찰 현상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질병이요, 인간의 범죄요, 사회적 불의 등이다.'
왜 박정희, 전두환 같은 정치 군인들이 득세하고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이 박해를 받는지에 대한 답이었다. 김대중은 샤르댕 신부의 저서들을 모두 들여보내 줄 것을 이희호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국내 서점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희호는 천주교 측에 부탁을 했고, 서교 성당의 한 수녀가 지닌 것을 가까스로 구해서 넣어주었다.
김대중의 지적 호기심과 집중력은 놀랍기만 하다. 김대중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국민의 정부 부속실장 김한정은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깊은 인상을 받은 지식이나 논리, 철학 등은 자신의 것으로 육화될 때까지 탐구하며 성찰했다."
김대중은 무엇이든 깊이 빨아들였다. 김대중을 흠모했던 하버드 대학 교수 에드워드 베이커(Edward Baker)는 김대중에게는 상대방의 지식과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놀라운 흡인력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 씨는 지식을 마치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옥중에서의 또 다른 즐거움은 편지 쓰기였다. 편지는 한 달에 딱 한번 보낼 수 있었다. 법적 근거가 없는 횡포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연은 길고 봉함엽서는 달랑 한 장이니 글씨를 작게 써야 했다. 온 정신을 집중하여 쓰다 보니 깨알처럼 작게 쓸 수 있었다. 확대경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 김대중은 그렇게 29통의 편지를 보냈다.
김대중의 옥중서신은 훗날 책으로 묶여 나왔다. 1983년 미국에서 <민족의 한을 안고>라는 제목으로 먼저 출판되었고,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 등이 번역한 일어판이 출간되었다. 또 영문판으로도 나왔다. 국내서도 이듬 해 <김대중 옥중 서신>으로 출간됐다. 책은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김대중의 지식과 사상의 깊이에 독자들은 감탄했다.
진정 잘사는 것이 무엇인지, 역사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은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제시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옥중 서신에 언급한 책들을 찾아 읽는 이른바 '김대중 따라 책읽기'가 유행했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가 <옥중서신>을 읽기 위해 글을 깨쳤다는 감동적인 일화도 이때 만들어졌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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