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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DJ를 죽이지 못한 이유는…

[김대중 평전 '새벽'·21] 밤마다 밧줄이 목에 걸렸다

밤마다 밧줄이 목에 걸렸다

죽음이 곁에 있었다. 언제 사형장으로 끌려갈지 몰랐다. 밤이면 목에 밧줄이 걸리는 꿈을 꾸었다. 소스라쳐 깨어나면 온몸이 땀에 젖었다. 멀리서 교도관이 저벅저벅 걸어오면 온 신경이 곤두섰다. 사형을 집행하러 오는, 흡사 저승사자의 발걸음 같았다.

사형수였기에 죽이면 죽어야 했다. 법정에서는 의연했지만 감방에서는 공포에 떨었다. 아니 법정에서도 죽음의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했다. '주범' 김대중을 법정에서 처음 본 '종범' 설훈은 한복을 입고 법정에 들어서는 김대중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수많은 얼굴을 대했지만 그렇게 무심한 모습은 본 적이 없다. 화가 난 듯도 하고, 어떻게 보면 슬픔이 한껏 어려 있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겁먹은 모습 같은, 수많은 감정들이 뭉뚱그려져 합쳐진 얼굴! 내게 그 분의 첫 모습은 완벽한 '무표정' 그 자체였다."

김대중은 자택에서 끌려올 때 군인들의 광기 어린 표정과 언동에서 살기를 느꼈다. 언제든 명령만 떨어지면, 아니 명령이 없이도 얼마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김대중은 자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단할까봐 가슴을 졸였다.

훗날 자신의 수감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사실을 알고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재판 없는 죽임은 면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실로 백지 한 장 차이였다. 지난 네 차례의 죽을 고비에서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있음과 죽어버림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였다.

김대중은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텼다. 쿠데타 세력에 협조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지만 속으로는 살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김대중은 저들이 "함께 일하자"는 회유에 마음이 흔들렸음을 고백했다. '가족들과 함께 호주 같은 나라로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비록 밤에는 흔들렸으나 새벽에는 마음을 바로 잡았다.

몸무게는 하루가 다르게 줄었다. 얼굴에서는 표정이 빠져 나갔다. 사건에 연루된 다른 사람들은 가혹한 고문을 당했어도 사형만은 면했다. 감옥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 서로 만나 함께 떠들며 웃었다. 그러다 가끔씩 그들의 '만들어진 주범' 김대중과 마주쳤다.

김대중을 보고 역시 '만들어진 종범'들은 너무나 놀랐다. 김대중은 유령 같았다. 아무런 표정 없이, 어떤 동작도 없이, 시선을 고정시킨 채 걸어갔다. 종범들은 김대중의 죽음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김대중은 사후 세계를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하느님을 찾았다.

'내가 죽은 후 하느님이 없다면 이는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태어나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그런 것들이 바람에 티끌이 날리듯 사라진다면….'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은 존재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것은 부활이었다. 김대중은 그런 '믿음'을 아내에게 편지로 썼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다면 하느님의 계심, 죄의 구속, 성신의 같이 계심과 그 인도, 언제나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천국영복(天國永福)의 소망 등 모든 것이 믿어질 수 있다고 생각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의 신비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서도 근거가 상당히 객관적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수난 때 그분을 버리고 자기만 살기 위해서 도망쳤던 사도들이 그분이 그렇게도 비참하고 무력하게 돌아가신 후에 새삼스럽게 목숨을 건 신앙을 가지고 온갖 고난과 죽음을 감수하면서 복음 전달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예수의 체험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구나 예수 생존 시는 대면조차 없었으며 그 돌아가신 후에는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그리스도 교도를 박해한 사도 바울의 회심과 그의 초인적이며 결사적인 포교 활동, 그리고 마침내 겪은 순교는 그가 체험한 부활하신 예수 없이는 설명할 길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 그것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김대중의 힘이었다. 죽음 속으로 들어감은 얼마나 두려운가.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의 옷소매를 놓지 않아야 했다. 당시 김대중은 죽음을 맞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종의 체념이었다. 나는 자료를 정리하다 김대중이 감옥에서 쓴 수상과 촌상(寸想)을 발견했다. 김대중의 당시 심경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죽음 앞에서 쓴 글들은 또 다른 유언이었다.

'나의 유일한 개인적 욕망은 현실적인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과 국민 앞에 충실하게 삶으로서 먼 후일에 역사가가 이 시대를 기록할 때 그 어느 한 구석에 "그 당시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기 양심과 국민 앞에 충실히 살다가 죽었다"고 써짐으로써 우리의 후손들에게 조그마한 참고나마 되는 것이다.' (1980년 11월 26일)

'하나님은 나의 행적대로 심판하실 것이고 우리 국민도 어느 땐가 진실을 알 것이며 역사의 바른 기록은 누구도 이를 막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내가 어떻게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국민과 역사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나의 일생은 완전히 실패작이었다는 한탄 이외에 나의 입에서 나올 말이 무엇이겠는가.' (1980년 12월 3일)

'사람이 신념대로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디까지 내놓을 수 있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 가난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은 돈 앞에서 좌절된다. 권력에 연연한 사람은 지위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신념은 있으되 감옥살이까지는 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선에서 은퇴한다. 다 버릴 수 있으나 차마 목숨까지 내놓을 수 없다는 사람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당연히 굴복한다. 사람이 신념대로 산다는 것과 어디까지 내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밀접한 함수관계가 있다. ' (1980년 12월 21일)

김대중은 죽음 앞에서 하느님 그리고 역사와 국민을 찾았다. 언젠가는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바르게 평가할 것이라고 믿었다. 또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며 지킨 신념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은 또 '눈물'이라는 일기 같은 수상을 썼다. 자신은 남 앞에서는 울지 않으려 애쓰지만 원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라며 이렇게 쓰고 있다.

'요즘 이 절박한 순간을 앞두고 애써 눈물을 참지만 아무래도 모레 있을 홍걸과의 대면에서는 눈물을 참지 못할 것 같다. 지난 5월 17일 구속된 이래 처음 만나는 것이다. 몹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마지막 한 번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제발 나와의 슬픈 대면이 사춘기의 그에게 큰 상처를 안 주기를 빌고 빈다.

손녀들과의 면회는 단념했다. 정화는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괜찮지만 지영이는 만 다섯 살에다 아주 예민한 아이인데 요즘 아버지도 오래 못 본 데다 나를 만나서 할아버지의 우는 꼴을 보이면 그 애의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아서 보고 싶기는 한이 없지만 참아야겠다.' (1980년 11월 27일)

ⓒ프레시안(손문상)

나는 이 수상을 읽으며 가슴이 아팠다. 김대중이 말하는 '절박한 순간'이란 사형 집행을 말함일 것이다. 그 순간을 앞두고 막내아들을 '마지막 한번 보지 않을 수 없는' 사형수 김대중. 손녀들도 간절히 보고 싶지만 우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단념하는 사형수 김대중. 감방 안에서 홀로 울고 있는 김대중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김대중에 대한 사형 선고 소식은 삽시간에 세계로 퍼져 나갔다. 미국 국무장관 에드먼드 머스키는 "미합중국은 김대중 씨에게 극형이 내려진 것에 대해 심히 우려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백악관 안전보장회의 일원이었던 도널드 그레그는 국방장관 해럴드 브라운(Harold Brown)과 함께 서울로 건너와 대통령 전두환을 만났다.

만일 김대중을 처형한다면 국제사회에 그 여파가 심각할 것이라고 전두환을 설득했다. 서독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의장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총회에서 '김대중 구명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서독의 외무장관 겐셔는 유럽공동체 모든 국가가 한국 정부에 항의할 것을 제안했다. 일본 정부는 차관 제공을 보류했다.

옥중의 김대중은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을 수상했다. 전 오스트리아 총리 브루노 크라이스키(Bruno Kreisky)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이 상을 수감 중인 김대중에게 주기로 한 것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김대중이 민주 투사임을 세계가 알고 있으니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는 압력이었다. 세계 주요 언론은 일제히 한국 신군부를 비난하는 논평과 해설을 내보냈다. 오로지 한국 언론만 침묵하고 있었다.

이런 국제적인 노력 외에도 '김대중을 살려 달라'는 민초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밤을 새워 울며 기도했다. 누구는 산 속에서, 누구는 골방에서 금식 기도를 했다. 교회와 사찰에서 이름 없는 이들이 김대중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 김대중을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대중은 핍박받는 시대의 의인이었다.

원로 정치인 정일형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중병에 걸려 누워있으면서도 오로지 김대중만을 생각했다. 문병을 간 강원룡 목사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우리 대중이를 살려줘, 대중이를 살려줘."

강 목사의 손등에 눈물이 떨어졌다. 강원룡도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얼마나 애틋한 장면인가. 훗날 김대중은 정일형·이태영 부부의 헌신적인 사랑을 눈물로 회고하곤 했다. 정일형은 결국 김대중을 보지 못하고, 석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교황 바오로 2세도 주한 교황청 대사를 청와대에 보내 사형 집행을 보류해달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것도 세 차례나 보냈다. 1980년 12월 11일에는 대통령 전두환에게 감형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 씨에 대해 순수하게 인도적 이유로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사형수 김대중에게는 또 다른 악재가 생겼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덕성과 인권을 강조했던 지미 카터가 패했다는 소식이었다. 보수파인 공화당 후보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된 것이었다. 김대중은 하늘이 무너졌다. 감옥에서 발을 뻗고 소리 내어 울었다. 이제 김대중의 운명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실제로 저돌적인 쿠데타군의 대령 급들인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은 책상을 두드리며 환호했다. 김대중을 처형시켜야 한다고 수뇌부를 압박했다. 그러나 신군부의 머리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새로운 보수 정권이 들어섰다고 해도 미국의 눈과 귀는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 카터는 당선자 레이건에게 김대중을 챙겨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김대중을 잊지 않았다. 마침 한미 정상 회담에 목을 매달던 신군부에게 통보했다.

'김대중을 살려야 당신네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올 수 있다.'

이듬 해 1월 김대중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세계 여론에, 미국의 요구에 신군부가 굴복했다.

1월 31일 청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저녁을 먹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내 눈물이 났다. 죽음을 면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이불을 둘러쓰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의 눈물을 오직 하나님만이 지켜봤을 것이다. 역시 살아있어야 뭣이든 할 수 있었다.

청주교도소 김대중 감방은 세 칸이었다. 가운데 칸이 김대중의 감방이고 양 옆은 비어 있었다. 복도는 콘크리트 벽으로 막아버렸고 감방 둘레에 담장을 새로 쌓았다. 그러고서도 낮에는 3명이, 밤에는 2명이 지켰다. 감옥 속의 또 다른 감옥이었다.

김대중은 추위를 무척 탔다. 감방 안은 전기난로를 켜 놓아도 물이 얼었다. 추위에 벌벌 떨면서 아침을 맞곤 했다. 한줌 햇살이 너무도 그리웠다. 그럼에도 무기수 김대중의 얼굴엔 사형수 때 지워진 표정들이 하나씩 돋아났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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