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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판사'가 "김대중 사형" 외치자 DJ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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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전두환의 판사'가 "김대중 사형" 외치자 DJ는…

[김대중 평전 '새벽'·20] 죽음보다 무거웠던 시간들

죽음보다 무거웠던 시간들

동교동 김대중의 집. 밤 10시가 넘어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검은 그림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경호원들이 막아서자 소총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경호원들이 쓰러졌다.

다시 우르르 응접실 쪽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김대중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합수부에서 나왔습니다. 잠깐 가셔야겠습니다."

김대중은 탁자 위의 담배를 챙겨들고 일어났다.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겨누며 뒤따랐다. 아내 이희호가 소리쳤다.

"가자는 말 한마디면 나설 분인데 왜 총을 겨누는가."

그리고 다시 말했다. 울음이 섞여 있었다.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갇혔다. 김대중은 저들의 기세로 보아 아무데나 끌려 가 그냥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군인들은 연행 과정에서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는 명령을 받았다.

지하에는 취조실이 붙어 있었다. 비명 소리가 시도 때도 없이 들려왔다. 그들이 누구인지 처음에는 몰랐다. 나중에 조작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란 것을 알았다. 김대중에게도 잠을 재우지 않았다.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물었다. 수사관도 수시로 바뀌었다.

전남대생 정동년에게 돈을 주고 반정부 운동을 사주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가 기억에서조차 없었다. 정동년은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진술을 했다. 훗날 정동년은 그 일이 괴로워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

김대중은 주범이고 다른 사람들은 종범이었다. 종범들에게 가해진 고문은 상상을 초월했다. 연행 때부터 집에서 죽도록 맞은 김종완은 고문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다.

"고문과 악형이 며칠 동안 잠을 재우지도 않고 계속되었다. 잠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나는 그때 알았다. 앉아 있다가 졸면 그들은 나를 세워놓았다. 세워놓아도 졸음이 쏟아졌다. 나는 서서도 잤다. 서서도 자면 그들은 옆으로 다가와서 갑자기 걷어차거나 벽으로 밀어 쓰러뜨렸고, 펜대 같은 날카로운 물건으로 이마와 옆구리 등을 사정없이 찔렀다."

김종완은 죽을 결심을 했다. 동맥을 끊으려 깡통 뚜껑을 숨겨 놓았다. 하지만 발각되었다. 지하 감방에서는 죽을 수도 없었다.

시인 고은도 죽으려했다. 처음에는 혀를 깨물려 했다. 그보다는 이마를 철문 모서리에 찧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했다. 뇌를 파괴시켜 단 번에 죽기로 했다. 화장실 입구의 쇠모서리를 눈 여겨 보아 두었다. 그런데 그날 밤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 "죽지 마라"고 일렀다. 고은은 자살을 포기했다.

태어나서 처음 따귀를 맞은 이택돈도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자신은 매 맞는 짐승에 불과했다. 치료를 하러 온 의사에게 간청했다.

"저승 가서도 원망을 하지 않을 것이니, 나를 주사로 죽여 달라."

지역 감정은 지하 감방에까지 따라 들어왔다. 경상도 사람인 예춘호와 한완상에게는 이렇게 윽박질렀다.

"야 이 새끼야, 경상도 놈이 왜 전라도 놈을 돕나."
"이 자식은 국가관도 없고 전라도 놈만 따라다니는 한심한 경상도 놈 아닌가."

나는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지하 감방에서 취조를 받는 영상을 봤다.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희귀 영상물이었다. 화면은 흐릿했지만 김대중은 군복을 입었고 간간히 담배를 피웠다. 수사관의 말투는 비교적 공손했고, 김대중을 선생님이라 칭했다. 어차피 죽일 대상이었으니 김대중에게는 가혹한 고문을 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김대중은 수사관에게 함께 잡혀갔던 아들 홍일이가 잘 있는지 물었다.

"우리 얘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얘가 아버지 잘 못 만나 가지고……."
"우리 아버지 건강은 어떠시냐, 저는 아무 일 없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려 달라, 저 대신 보살펴 달라 이렇게 얘기합디다."

김대중은 많이 말랐고, 수척한 모습에 표정이 없었다. 사형을 앞에 둔 아버지가 자식을 걱정하고 있었다.

'서울의 봄'은 점차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광주로부터는 무서운 소문들이 날아왔다. 거리는 살벌하고 누구도 내일을 알 수 없었다. 일시에 잡혀간 사람들의 가족들은 그들이 왜, 어디로 끌려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생사조차 알지 못했다.

걸핏하면 남편이 잡혀가는 박용길(문익환의 아내), 김석중(이문영의 아내), 이종옥(이해동의 아내)은 운동권 3총사였다. 그들에게는 감시자들이 2중, 3중으로 따라붙었다. 3총사는 용감했고, 그 분야의 선수들이었다. 감시망을 뚫고 외신 기자, 선교사들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한 번은 잡혀간 사람들의 부인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그리고 전세 버스를 불러 강릉 경포대로 떠났다. 감시를 피해 서로를 보듬는 서러운 여행이었다. 하지만 김대중의 아내 이희호는 가택 연금을 당해 동참할 수 없었다. 모두 드넓은 백사장에서 바다를 향해 남편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는 사랑한다고 외쳤고 누구는 비명만 질렀다. 대답 대신 파도만 밀려왔다. 마지막은 울음이었다. 참으로 억울했다.

돌아오는 길에 오죽헌 대나무 숲에 내렸다. 다시 울며 악을 썼다. 대나무들이 놀라 제 몸을 비볐다. 관광객들은 영문을 모른 채 이들을 지켜봤다. 버스에 올라타서도 함께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이내 눈물에 젖었다. 뱉지 못하고 삼켜야했다.

세월은 무심했다. 서울의 봄을 빠져 나온 나무들이 검푸른 잎을 달고 있을 때쯤이었다. 가족들은 잡혀간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앙정보부에 갇혀 조사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7월 10일 육군교도소로 이송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부인들은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남편이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이때 언론은 온통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정작 잡혀간 사람들은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김대중이 '5월 광주'를 알게 된 것은 항쟁이 일어난 지 50여일 만이었다. 7월 10일 합동수사단장 대령 이학봉이 찾아왔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 간다면 대통령직만 빼고 어떤 자리도 드리겠습니다. 만일 우리의 요구를 거부하면 살려둘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죽이겠습니다. 재판은 요식 행위에 불과합니다. 협조하면 살고 거부하면 죽는 것입니다."

김대중은 가혹한 취조에 지쳐 있었다. 제안이 너무 의외라서 정신이 아득했다. 이 대령은 나중에 다시 오겠다며 나갔다.

조금 있으니 수사관이 신문 뭉치를 던져 주었다. '광주 사태'를 보도한 신문들이었다. 검은 바탕에 고딕체의 흰 글씨가 눈을 찔렀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했다.

"시민 100명도 넘게 사망……김대중 석방·계엄령 해제 요구"

김대중은 정신을 놓아 버렸다. 깨어 보니 링거 주사를 맞고 있었다.

'김대중을 외치다 죽어간 사람들을 어찌한단 말인가. 의로운 시민들을 짓밟은 무리들이 감히 나와 손을 잡겠다고 하다니…….'

그들이 가증스러웠다. 김대중은 죽기로 했다. 사흘 후 이학봉이 다시 찾아왔다.

"협력 할 수 없으니 당신들이 나를 죽인들 내 어찌 하겠소."

8월 14일 오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대한 첫 계엄보통군법회의가 열렸다. 비로소 이 사건에 연루된 2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군 검찰은 김대중에게 '내란 음모, 내란 선동, 계엄법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외국환 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했다.

'내란 죄'는 최고 형량이 무기징역이었다. 그래서 국가보안법 '반국가 단체 수괴' 혐의를 추가했다.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고 김대중이 한민통 의장에 취임했다고 조작했다. 재판은 결과를 정해 놓고 각본대로 일정에 맞춰 진행되고 있었다. 김대중은 이제 죽어야 했다.

9월 13일 군법회의에서 변호사의 최후 변론이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의 최후 진술이 있었다. 김대중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김대중 내란 음모'의 거짓을 지적했다. 또 민주주의를 해야 하는 이유와 그럴 능력이 우리 국민에게 있음을 설파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정리했다.

"나는 아마도 사형 판결을 받고 또 틀림없이 처형당하겠지만 내가 처형당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이 기회를 빌려 공동 피고 여러분께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 판단으로는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 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내 마지막 유언입니다."

ⓒ프레시안(손문상)

최후 진술이 끝나자 방청객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법정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헌병들이 달려왔다. 그래도 노래는 끊이지 않았다. 다시 <우리 승리하리라>를 불렀다. 방청객들은 하나씩 끌려 나갔다. 누구는 헌병의 손을 깨물었다. 모두 울부짖었다.

"민주주의 만세" "김대중 선생 만세"

피고들도 울었다. 단 한 사람 김대중은 울지 않았다. 한완상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공동 피고 24명이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아마도 DJ의 최후 진술 때가 아닐까 한다. 그날 우리는 애국가를 불렀다. 법정 소음죄에 해당하지만 끓어오르는 의분심을 가눌 길 없어 정말 평생 처음으로 창자로 애국가를 불렀다. 아니, 애국가가 우리 속에서 저절로 터져 나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DJ는 1시간 40분 가까운 긴 시간 동안 당당히 자기의 의견을 개진했다. 그의 침착함에 나는 놀랐다. 이른바 세인트(saint)의 경지에 들지 않고서는 사형 구형을 받았던 피고인이 그토록 태연하고 침착하게 자기 심경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설훈은 재판정에서 김대중을 난생 처음 보았다. 그는 김대중의 뒷좌석에 앉아 김대중의 숨소리까지 정확히 들었다. 설훈은 이렇게 회상했다.

"신군부가 그분을 두고서는 대한민국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꼭 죽이겠다고 작정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대중 선생은 자신이 죽더라도 역사에서는 승리자가 될 것이라는 순교자적 결심으로 타협을 거부하고 투쟁했던 것이다. 그는 우리의 지도자였고, 희망이었고, 적어도 나에게는 나를 헌신해야할 대상이었다. 나는 재판 받는 동안 수도 없이 '이 분이야 말로 지도자구나'하고 경탄할 수밖에 없었다.

헌병들의 태도가 먼저 변해갔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젊은 그들도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리들을 동정하게 되었다. 형이 확정되어 순천교도소로 이감되어 갈 때 길 안내를 하던 전남 출신 헌병은 내가 고속도로 변에서 무등산을 보고 '저게 무등산이냐'고 묻고 울어버리자 나와 함께 울었다. 그때 우리들은 광주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설렜다."

선고를 내릴 시간이었다. 김대중은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방청석에는 김대중 가족만 없었다. 아내 이희호는 떨려서 법정에 들어설 수 없었다. 김대중은 살고 싶었다. 제발 사형만은 면하기를 바랐다. 재판관의 입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입술이 옆으로 찢어지면 사, 사형이고 입술이 앞으로 튀어나오면 무, 무기징역이었다.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었다. 재판관 문응식의 입이 찢어졌다.

"김대중 사형."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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