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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5·17 쿠데타' 배후에는 누가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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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5·17 쿠데타' 배후에는 누가 있었나?

[김대중 평전 '새벽'·19] 독재가 스러진 자리

독재가 스러진 자리

"간밤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했답니다."

27일 새벽 4시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바다를 건너온 소식은 새벽처럼 서늘했다. 김대중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물었다. 거실로 나와 담배를 찾았다.

'박정희가 없는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박정희는 18년 동안이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독재 정권이었지만 국민들은 '대통령 박정희'에 익숙했다. 박정희가 없는 한국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았다. 다시 마당에 내려와 하늘을 보았다. 한반도에 독재자 박정희가 없는 하루가 밝아오고 있었다.

1979년에 들어서면서 박정희는 이미 위험한 지도자였다. 하는 일마다 앞뒤가 맞지 않고 상식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국민을 적으로 돌렸다. 국내 현안은 물론이고 외교도 난마처럼 얽혀 있었다. 민심이 떠난 유신 체제는 절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김대중이 보기에 예전의 박정희가 아니었다. 나라 전체가 위험했다.

박정희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또 앞으로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 위기의 실체를 제대로 전해주고 싶었다. 1979년 4월에 측근이며 동지인 예춘호, 양순직, 박종태를 청와대로 보냈다.

세 사람은 경호실장 차지철을 만나 면담을 주선해주도록 요청했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눈을 보면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면담은 거부당했다. 차지철이 대통령의 심리 경호를 위해서 내린 결정인지, 아님 실제로 박정희 자신이 거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김대중은 딱 한 번 박정희를 만난 적이 있었다. 1968년 새해 청와대로 세배를 가서 5분쯤 얘기를 나눴다. 박정희는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했다. '목포의 전쟁'(196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앙금이 있었겠지만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당시 좋은 인상을 받았다. 만나면 박정희를 설득시킬 자신도 있었다. 진심을 내보이면 마음을 얻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시대에 풍운을 불러오던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은 생전에 딱 5분 동안 만났다. 비극이었다.

박정희가 남긴 가장 큰 해악은 지역 감정 조장이었다. 그것은 이승만이 친일파를 비호하며 중용한 것과 거의 같은 무게의 잘못이었다. 박정희는 경상도를 품고 전라도를 내쳤다. 전라도에 대해서는 세 가지 차별을 했다. 문화적 차별, 지역 개발 차별, 인재 등용의 차별을 했다. 지역 감정을 집권의 도구로 활용했다.

박정희는 평생 일본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살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방되기 전까지 일본 관동군에 배속되어 장교로 복무했다. 박정희는 국정 전반을 일본식으로 따라하려 했다. 한일 관계 정상화에 일정 부분 공헌한 것이 사실이지만 호혜의 한일 관계를 정립하지는 못했다. 일제 강점에 대한 피해 보상 청구도 구걸하다시피 했다. 정통성이 희박한 쿠데타 세력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김대중은 목숨을 걸고 독재에 맞서 싸웠다. 그건 박정희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박정희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김대중을 세 번이나 죽이려 했다.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중앙정보부는 세상 끝까지 따라 다녔다. 박정희는 김대중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위협했지만 또 김대중을 두려워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를 가난을 몰아 낸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그러면서 그의 행적을 '개발 독재'라며 미화하기도 한다. 하지만 독재를 해야만 경제 발전이 용이하다는 견해에 김대중은 동의하지 않았다. 군사 정권의 경제 개발 5개년계획은 장면 정권이 마련한 것이었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던 장면 정권이 이를 추진했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역사에는 가정이 없기에 알 수 없지만 김대중은 우리 민족의 저력으로 보아 군사 정권보다 경제를 더 부흥시켰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박정희가 '우리도 하면 된다'는 긍정적인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준 것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그의 맏딸 박근혜가 김대중을 찾아왔다. 2004년 8월 12일, 박정희가 살해당한지 25년 만이었다. 그녀는 거대 야당(한나라당)의 대표였다. 박근혜는 아버지 일에 대해서 사과했다.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입고 고생하신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 드립니다."

김대중은 그 말이 너무도 고마웠다. 박근혜의 손을 잡았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김대중은 박정희가 환생하여 화해의 억수를 청하는 것 같았다. 사과는 독재자의 딸이 했지만 정작 김대중 자신이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김대중을 세계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박정희였다. 박정희의 무자비한 핍박과 끝없는 증오가 없었다면 김대중은 그렇게 일찍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희가 김대중을 키웠는지 모른다. 가해자 박정희, 피해자 김대중. 역사는 어떻게 두 사람을 기록할 것인가.

나는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당장에 내려질 수 없다고 본다. 더욱이 국민들에게 전·현직 대통령의 호감도 따위를 묻는 것은 더욱 의미 없는 일이다. 왜냐면 지역 감정과 알맹이는 없고 구호만 남은 이념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 훗날 이 땅에서 미움과 증오가 사라졌을 때, 우리 후세들은 누가 우리 민족에게 바른 길을 제시했는지 알 것이다.

10·26 사태 후 김재규에 대한 평가가 분분했다. 확실히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는 김재규의 말은 그럴듯했다. 여론은 온정적이었고, 일각에서는 그의 행동을 영웅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뉴스위크>와의 회견 중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김재규를 민주주의의 영웅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민주주의는 쿠데타나 암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의 힘으로 이뤄져야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

모두 민주주의가 앞당겨 질 것이라 낙관하고 있을 때 김대중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민중이 독재를 응징하지 않고 독재자가 부하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이 결코 민주주의에 이롭지 않다고 봤다. 우리 역사는 민족의 전환기에 예기치 않은 시련이 닥쳐왔다. 권력의 진공 상태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권력이 스러진 자리에는 필연적으로 목숨을 건 권력 다툼이 있게 마련이었다. 사실 당시의 유신 체제는 거대한 바람 앞에 작은 등불 같은 것이었다. 민주화 바람은 태풍이 되어 북상 중이었다. 내가 보기에 김재규의 총격으로 유신(독재)의 심장과 함께 태풍(민주화)의 눈까지 터져버렸다. '궁중 모반'으로 인해서 민주 세력이 결집하여 정국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었다.

실제로 김대중은 10·26 사태가 일어나기 1년 전쯤 서울대 병실(특별 감옥)에서 이런 메모(1978년 10월 21일)를 썼다.

'우리의 민주 회복은 우리 힘이 중심이 돼야 한다. 이것이 부동의 철칙이다. 우리는 또 그만한 민중의 각성과 참가도 얻어가고 있다. 우리의 투쟁이 선행하지 않으면 외부의 지원이나 간섭을 기대해도 소용없으며 옳지도 않다.'

'우리의 투쟁 방법은 비폭력 적극 투쟁이라는 간디나 킹 목사의 방법이 가장 적합하다. 자발적으로 줄을 지어 투옥하고 그리하여 감옥에서 법정에서 전국적으로 싸우면 전 국민의 호응은 명약관화하다. 지금 정부는 그걸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국민이 일어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민주 회복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최후의 승자가 국민이어야 했다. 김대중은 유신 체제의 종말이 어른거릴 쯤에서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런 바람을 외면해 버렸다.

대통령 대행 최규하가 '대행' 꼬리를 뗐다. 12월 6일 유신 헌법에 의해 다시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았다. 최규하는 긴급 조치 9호를 해제하고 김대중을 연금에서 풀어줬다. 그리고 불과 6일후 12·12 사태가 일어났다. 계엄령 하에서 계엄 사령관이 체포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일련의 정치군인들이 육군 참모총장 공관에서 계엄 사령관을 연행했다. 대통령 재가도 없이 저지른 하극상이었다.

10·26 사건 이후 힘의 공백에는 전두환이 있었다. 12·12 사태를 보며 김대중은 전두환과 그 주변에 있는 정치군인들의 힘이 느껴졌다. 정치군인들은 박정희에게 배운 대로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정치군인의 후계들이었고, 독재의 자식들이었다.

1980년 새해가 되자 정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나라의 권력은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안개 정국'이었다. 그런 가운데 2월 29일 김대중을 포함한 678명에 대한 사면·복권 조치가 내려졌다. 김대중은 7년 만에 정치를 재개할 수 있었다. 이날 이후 이른바 '서울의 봄'이 시작되었다.

ⓒ프레시안(손문상)

4월 14일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과 보안사령관에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추가로 맡았다. 나라의 모든 정보기관을 장악했다. 김대중은 전두환의 야심이 드디어 수면 위로 올라왔다고 보았다. 김대중은 대중 연설을 시작했다. 청중들은 다시 열광했다. 김대중은 과격 시위와 사회 혼란을 가장 경계했다. 그것이야말로 신군부가 노리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소문이 흉흉했다. 유신 잔당들이 군대를 동원해서 권력을 장악하려한다는 설, 이원 집정제 개헌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설 등이 떠돌았다. 시국은 김대중의 우려한 데로 흘러가고 있었다.

5월 7일을 전후해서 학생들이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물론 젊은이들이 '수상한 정국'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군인들은 시위를 전혀 막지 않았다. 5월 13일과 14일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대대적인 가두 시위가 벌어졌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유신 잔당 타도하자." "언론 자유 보장하라." "정부 개헌 중단하라."

서울역 앞에서도 연일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5월 15일에는 10만 명이 모였다. 경찰 버스 한 대가 불 타 올랐다. 얼핏 작아 보였지만 매우 큰 사건이었다. 안개 정국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고 있던 국민들은 매우 불길하게 여겼다. 사건은 신군부가 세상에 머리를 쳐드는, 이를 위해 여론 조작극을 벌일 수 있는 빌미가 되었다.

사실 '서울의 봄' 속 군부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설 명분이 없었기에 안개만 피우고 있었다. 반면에 민주 세력은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학생들의 과격 시위가 군부에게는 기회였다.

그날 밤 학생 대표들은 가두 시위 중단을 선언했다. '서울역 회군'이었다. 신군부에게 정변의 구실을 주지 말자는 이유였다. 김대중은 회견을 통해 이를 환영했다. 정말 16일에는 대학가가 조용했다. 거리는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그날 밤 신군부 세력이 총검을 쳐들었다. 이튿날 5월 17일 전군지휘관 회의를 열어 비상계엄 확대안을 의결했다. 그리고 밤 9시 50분 국무회의를 열어 이를 통과했다. 전두환의 5·17 쿠데타였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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