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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가 박정희를 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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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가 박정희를 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김대중 평전 '새벽'·18] 유신의 심장이 터지다

유신의 심장이 터지다

1976년 3월 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 신도 700여 명이 모였다. 미사가 끝나고 신·구교가 함께 기도회를 마련했다. 문동환 목사가 설교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온 모세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민족의 지도권을 여호수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랬기에 후에 가장 위대한 예언자라고 높이 찬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박정희도 이 시점에서 물러선다면 한국 역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 될 것입니다."

이어서 자그마한 체구의 여교수 이우정이 앞으로 나왔다. '민주 구국 선언서'를 읽었다.

"우리의 비원인 '민족 통일을 향해서 국내외의 민주 세력을 키우고 규합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전진해야 할 이 마당에 이 나라는 일인 독재 아래 인권은 유린되고 자유는 박탈당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 민족은 목적의식과 방향 감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잃고 총파국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다. 우리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여야의 정치적인 전략이나 이해를 넘어 이 나라의 먼 앞날을 내다보면서 '민주 구국 선언'을 선포하는 바이다."

장내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있던 공포와 두려움을 걷어내는 외침이요, 국민들을 깨우는 기도였다. 선언문 낭독에 이어 촛불 시위를 벌였다. 민주 구국 선언문에는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윤반웅, 이우정,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이문영 등 모두 10명이 서명을 했다. 김대중은 다시 감옥에 가야 했다. 대통령 박정희가 김대중을 그냥 둘리 없었다. 그날 오전 박정희는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신 읽은 3·1절 식사에서 '유신 체제의 정신은 3·1 운동 정신과 같다'고 했다. 궤변이었다.

관련자들이 하나둘씩 잡혀 들어갔다. 김대중은 3월 8일 새벽에 끌려갔다. 문익환 문동환 윤반웅 서남동 이해동 목사, 문정현 신현봉 함세웅 신부, 이문영 교수, 안병무 박사 등이 구속되었다. 긴급 조치 9호를 위반한 혐의였다.

재판이 열렸다. 그러나 법정은 피고들이 '유신 독재'를 재판했다. 민주주의 강의실에 다름 아니었다. 불구속 피고인 함석헌은 법정에 상복을 입고 나타났다. 신부 신현봉은 검사가 호명하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했다. 판사가 놀라서 물으면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죽어서 곡을 합니다."

피고들은 하나 같이 당당했다.

"많은 민주화 동지들과 같이 감옥 생활을 하는 특권을 받은 것에 감사합니다." (문동환)

"감옥에 있는 것이 예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쁩니다. 나에게 죄가 없기에 판사가 석방시킬까봐 오히려 걱정을 했습니다." (이문영)

오히려 검사와 판사가 죄인처럼 기가 죽어 있었다. 구속자들은 재판이 있는 매주 토요일 호송 버스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뜨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예전에는 본 적도 없었지만 오랜 친구처럼 느껴졌다. 같이 있음이 힘이었다. 그 후 이 땅의 민주화 운동은 이들로부터 줄기와 가지가 뻗어나갔다.

김대중은 이 사건을 통해 재야 지식인과 종교인들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재야 인사들과 거의 일면식이 없었다. 하지만 순수한 열정은 서로의 가슴을 열게 했다. 김대중은 감동했다.

"감옥에 오지 않았다면 어디서 이처럼 좋은 친구들을 만났을 것인가."

내가 보기에도 김대중은 이때 진정한 '평생 동지'들을 얻었다. 독재자 박정희가 맺어준 우정이었다. 이들과의 인연은 민주화 투쟁의 고비 때마다 동지애로 다시 피어났다. 김대중은 머나 먼 민주화 투쟁의 길에 소중한 길동무를 얻었다.

김대중은 5년형을 선고 받았다. 1977년 4월 진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서울에서 가장 먼 교도소였다. 김대중을 만나기 위해 경향 각지에서 민주 인사들이 몰려왔다. 그러나 교도소 측은 면회를 금지시켰다. 날마다 수십 명이 교도소 담 밑에서 찬송을 부르고 구호를 외쳤다.

감방에서 세상에 내보낼 수 있는 것은 편지뿐이었다. 편지를 쓰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간절해졌다. 김대중은 자신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음을 알렸다.

'오늘의 예수는 종이신 예수이며, 이것은 처음부터 그의 참모습인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 제일 낮은 자가 제일 높은 자라 한 예수, <누가복음> 1장 51절부터 53절에 기록된 예수, 죄인이며 억눌린 자들을 구원하고 해방하기 위해 찾아왔으며 그들을 위해 헌신하고 싸우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인 것입니다.'

이희호는 그런 남편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서 겸손을 새삼 터득하시며 깊은 신앙 생활을 하시는 오늘의 당신의 모습이 숭고하게만 보입니다. 당신 때문에, 특히 겪고 계신 그 어려움 때문에 내 생이 더 값지고 더 뜻있으며, 많은 사람을 참된 사랑으로 대할 수 있으며, 긍지와 소망으로 내일의 새 빛을 바라보면서 심의(深意)의 가시밭길을 뒤따라 나갈 수 있는 행복마저 느낍니다.'

이희호는 겨울에도 방에 불을 넣지 않았다. 남편이 감옥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따뜻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면회는 한 달에 한 번 밖에 할 수 없었다. 손수 짠 털장갑과 털옷을 넣어주었다. 속옷도 다림질해서 향수를 뿌렸다. 김대중은 그걸 받으면 바로 입지 못했다. 코에 대면 아내의 냄새가 났다. 가슴에 품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졌다.

1977년 12월 19일 김대중은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 저들은 인도적인 조치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은 입원이 아니라 '특별한 감옥'으로 이감시킨 것이었다. 서울대병원 201호실에 가두더니 교도소보다 더 엄중하게 감시했다. 20여 명이 늘 지키고 있었다. 모든 창문은 폐쇄하여 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종일 전등을 켜놓아 해가 지는지 또 뜨는지 알 수가 없었다. 특별한 감옥은 점점 지옥으로 느껴졌다. 단 하나 아내를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이희호는 식사를 챙겨서 점심과 저녁에 면회를 왔다.

아내가 들고 온 음식물과 휴대품은 철저히 검열을 받았다. 이야기조차 제대로 나눌 수 없었다. 면회할 때면 교도관들이 따라 들어와 대화 일체를 엿들었다. 편지도 쓸 수 없었다. 저들은 필기구 자체를 지니지 못하게 했다. 어느 날 아내가 작은 못 하나를 쥐어주었다. 그 후 껌 껍질이나 포장지에 못으로 꾹꾹 눌러 편지를 썼다. 저 유명한 '못으로 쓴 하얀 글씨'였다. 그 편지는 화장실 두루마리 화장지 가운데 구멍에 숨겨 두었다. 그러면 아내가 화장실에 들러 편지를 꺼내 양말이나 빈 밥그릇에 넣어 가지고 나갔다. 못으로 쓴 편지는 불빛에 비춰 다시 옮겨 적은 후 지인들에게 보냈다.

돌아보면 교도관 몰래 못으로 편지를 쓴다는 것은 얼마나 남루한 일인가. 처음에는 아내에게조차 부끄러웠다. 만일 교도관의 눈에 띄었다면 저들은 또 얼마나 조롱했을 것인가. 국민 46퍼센트의 지지를 받은 대통령 후보가 교도관 몰래 편지를 쓴 다는 것이 치욕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그렇게 살아있음을 알리고, 밖으로 소식을 전해야 했다.

김대중에게 하루는 너무도 길었다. 누워 있는 것 자체가 흡사 관 속에 들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왼쪽 귀에서 이명 증세가 나타났다. 한 줄기 바람이 그리웠다. 하늘 한 조각이라도 보고 싶었다. 단 몇 초라도 흙 위에 서있고 싶었다.

박 정권은 인도적인 조치라고 대외에 천명을 했지만 실상 김대중은 죽어가고 있었다. 제발 다시 교도소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9월 7일 단식에 돌입했다. 귀와 입을 막아버리고 손과 발이 묶여 있으니 할 수 있는 것은 단식뿐이었다. 단식 투쟁 소식이 전해지자 병원 앞에서는 날마다 집회가 열렸다. 3·1 민주 구국 선언에 연루된 인사들은 김대중을 제외하고 모두 풀려났다. 그들이 다시 뭉쳐 소리쳤다.

"김대중 선생을 석방하라, 아니면 우리를 다시 구속하라."

나중에는 참으로 기막힌 구호가 나왔다.

"김대중 선생을 다시 감옥으로 보내라."

재야 인사들은 성명을 발표하고, 동조 단식을 하고, 농성을 벌였다. 김대중은 일주일 만에 단식을 중단했다. 원래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장 출혈 현상이 나타났다. 가족들의 만류를 받아들여야 했다.

1978년이 저물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누워 있는데 누군가 깨웠다.

"오늘 석방합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꿈결 같았다. 박정희는 제9대 대통령 취임을 하며 김대중을 특별 사면했다. 12월 27일, 2년 10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가택 연금을 당했다. 이번엔 집이 감옥이었다. 언론에는 김대중이란 이름 자체를 쓰지 못하게 했다. '형 집행 정지 정치인' '원외의 모 인사' '당외 인사' '동교동 모 씨' 등으로 지칭했다.

박 정권을 흔드는 대형 사건들이 잇달아 터졌다. 대통령 박정희는 국가를 관리할 의욕마저 상실한 듯보였다. 다만 권력에 대한 욕심만이 남아 있었다. 민심을 살피기보다는 힘으로 찍어 눌렀다. 이런 가운데 'YH 노조 신민당사 농성 사건'과 '부마(釜馬) 항쟁'이 일어났다.

부당 해고로 일터를 잃은 여성 노동자들이 야당인 신민당사를 찾아가 농성을 벌였다. 그러자 경찰은 무력으로 진압했다. 여성 근로자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이들을 끌어냈다. 국회의원, 당원, 기자들도 두들겨 맞았다. 새벽의 유혈극이었다. 제1야당 당사는 폭격을 맞은 듯했다.

1979년 10월 부산에서는 학생 시위가 잇달았다. 17일에는 시민들이 시위대에 대거 합세했다. 박정희는 18일 부산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마산에서도 노동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이번에는 마산과 창원 일대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욕구가 분출하면 힘으로 눌렀다.

ⓒ프레시안(손문상)

'유신'은 대통령이 밤이 되면 찾아가는 안가에서만 겨우 숨이 붙어 있었다. 4·19처럼 국민 저항은 북상 중이었다. 측근 일부는 두려움에 떨었다. 모이면 술이었다. 술에 취한 박정희는 한갓 범부에 불과했다. 독재를 지탱할 모략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10월 26일, 그날 밤도 박정희는 안가에서 심복들과 술을 마셨다. 술상에 '부마 사태'가 올라왔다. 정보부장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했다. 경호실장 차지철은 "까불면 전차로 싹 깔아뭉개 버리자"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정보부장 김재규가 권총을 뽑았다.

"각하, 버러지 같은 자식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제대로 되겠습니까."

경호실장이 피를 흘렸다. 다시 총구는 대통령을 향했다. 총성이 안가의 어둠을 찢었다. 유신의 심장이 터졌다. 그러자 독재에 기생하며 박정희를 떠받들던 정치인, 학자, 고위 관리들은 연기보다 더 빨리 사라졌다. '유신'은 저자거리에 던져졌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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