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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납치, 박정희가 직접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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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납치, 박정희가 직접 지시했다

[김대중 평전 '새벽'·16] 역사에서 꺼낸 납치 사건

역사에서 꺼낸 납치 사건

식구들이 뛰쳐나왔다. 아내가 보였다. 가족과 비서들에 둘러싸인 김대중이 말했다.

"하느님께서 살아 계심을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살아왔어요. 모두 기도합시다."

김대중 뇌리에는 그때까지도 배 위의 예수님 모습이 또렷이 남아있었다. 아니 일생동안 떠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은혜롭고 신비로웠다. 훗날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물었다.

"추기경께서는 그런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 순간 기도하고 있었다면 환상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생각에 잠겨있을 때 예수님을 본 것이라면 실제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환상이냐 아니냐가 아니겠지요. 결국은 믿음의 문제일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고 살펴보니 온 몸에 상처투성이었다. 아랫입술은 곪았고, 두 손목과 발목은 피멍이 들어 있었다. 왼쪽 눈썹 위는 피가 맺혀 있었다. 김대중은 자신의 상처가 흡사 남의 것처럼 보였다. 그때까지 아프지도 않았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죽음과 삶 사이는 그저 한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아득하다가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회견은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김대중은 기자들 앞에서, 그 새벽에 울고 말았다.

ⓒ프레시안(손문상)

여러 기록과 증언들을 살펴 볼 때 김대중의 생환은 미국이 도왔기에 가능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은 8월 8일 오후 3시 경에 '납치 정보'를 입수했다. 미국 CIA가 필립 하비브(Philip Habib)대사에게 알렸다. 하비브는 즉각 청와대에 납치 사실을 미국이 알고 있고 한국 정부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통보했다.

그렇다면, 당시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난 비행기는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나는 어디에서도 단정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러 정황을 늘어놓고 이를 맞춰보면 일본 본토에서 날아온 일본 국적기가 거의 틀림없다. 미국은 납치 사실을 일본에 알렸고, 한국 정부도 '김대중 살해 계획'이 들통 나자 일본에 공작선 위치를 알려주며 후속 조치를 부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버드 대학 교수 제롬 코언(Jerome A. Cohen)도 마침 일본에 머물던 재미교포 임창영의 연락을 받고 미국 국무장관 키신저에게 전화를 했다. 키신저는 유엔총회 참석 중임에도 전화를 받았다. 코언이 그만한 무게와 명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신저 장관, 우리의 친구 김대중 씨가 일본에서 납치를 당했다고 합니다. 몇 시간 안에 그가 처형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를 살려야 합니다."

키신저는 모든 조직을 동원하여 진상을 파악하고 김대중을 구할 것을 지시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여러 증언과 문건을 통해서 범행의 윤곽이 드러났다.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지휘 아래 총 46명이 9개조로 나뉘어 치밀하게 계획한 공작이었다. 미국도 1998년 비밀 문건을 공개하며 중앙정보부의 소행임을 밝혔다. 대통령 박정희는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승인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박정희가 지시한 것임은 확실해 보인다. 미국에 망명한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도 1977년 6월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주목할 만한 증언을 했다. 납치 사건은 박정희의 재가 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고 단언하며 가담 인물들의 명단을 소위원회에 제출했다. 김형욱은 별도의 성명도 발표했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는 1971년 그와 대결했던 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 씨와, 미국의 대한 정책을 좌우하는 미국 국회였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개인인 김대중 씨의 문제를 이른바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해결하려 했다."

이후락은 1980년 '서울의 봄' 때 친구 최영근에게 대통령 박정희의 지시로 "납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 놓았다. "김대중을 없애라"는 지시를 받고 너무 놀라서 차일피일 미루자 한 달 쯤 뒤에 다시 불러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부하들이 모두 반대했음에도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김대중의 소재를 알린 통일당 총재 양일동은 납치 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는 것일까. 나는 양일동의 행적이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김대중을 만나 호텔에서 귀국을 권유했다는 사실도 뭔가 걸린다. 그러나 김대중은 양일동을 적극 변호했다.

"솔직한 사람으로 일부러 함정에 빠뜨릴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아내 이희호는 양일동이 일본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김대중에게 알리며 그를 너무 믿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다.

'양일동 씨, 김경인 씨 오늘 일본으로 떠난대요. 경인 씨가 (김)종충 씨 전화번호 가지고 갔으니까 연락될지 모르나 양 씨도 요즘 당신 말 많이 하고 있데요. 그러나 어느만큼 믿느냐는 생각할 필요 있어요. 양 씨도 오늘의 현실을 보고 당신 생각하는 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니까 생각하는 거지, 이 나라 생각보다는 자기 이해를 더 앞세워 생각함으로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1973년 7월 13일)

그리고 호텔에서의 행동에도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희호의 회고록을 들춰보자.

"나는 신문 보도를 통해 김 의원과 양 총재가 납치 당시 그곳에 있었던 것을 알고 매우 섭섭했다. 왜 곧 호텔 측에 알려서 괴한이 남편을 납치해 갔다고 전하지 못했을까. 왜 좀 더 소리 질러 옆방에 들리도록 못했을까."

이희호의 의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희호는 분명 양일동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아내의 직관이었을까. 납치를 당한 후 김대중의 경호원 김강수가 2211호 방문을 두드릴 때까지 두 사람은 호텔방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머물렀다.

그 40분 동안은 그들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혹의 시간이다. 어쨌든 김대중은 양일동 때문에 납치를 당했다. 소재를 알린 것이 단순 실수인지 몰라도 의혹의 시선을 명쾌하게 거둘 수는 없다. 지나간 순간들을 다시 역사 속에서 꺼낼 수는 없지만.

납치 사건을 수사하던 일본 경찰은 범행 현장에서 의미 있는 지문 하나를 발견했다. 주일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의 지문이었다. 이로써 한국 기관원이 범행에 관여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것은 한국의 공권력이 일본의 주권을 침해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납치 사건으로 한일 정부는 강경하게 대치했다. 일본 정부는 예정된 한일 각료회의를 무기한 연기했다. 국교 정상화 이후 최초의, 최대의 시련이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박정희는 사죄의 친서를 쥐어주며 국무총리 김종필을 일본으로 보냈다. 그리고 결착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거액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 소문에 의하면 3억 엔이 넘었다. 어쨌든 한일 정부는 납치 사건을 적당히 봉합했다. 이런 행태를 일본 <아사히신문>은 '허튼 연극'이라며 비난했다.

김대중은 납치 사건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용서했다. 누구나 위에서 시켰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김대중 납치에 깊숙이 관여한 주일공사 김재권(김기완)은 공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977년 6월 22일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미국 하원국제관계위원회(프레이저 위원회) 공청회에서 김재권의 역할에 대해 증언을 한 바 있다. 프레이저 위원장이 일본에서 납치의 책임자가 김기완이냐고 묻자 분명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그가 책임자입니다. 그가 제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세월은 흘러 2008년 그의 아들 성 김(김성용)이 6자 회담 대표로 한국에 왔다. 비서들은 그가 김재권의 아들이라고 보고했다. 김대중은 놀랐다. 하지만 이내 정색을 하고 말했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와 아들은 다릅니다. 그 아버지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마시오. 외부에 알리지도 마시오."

사람의 인연은 정말로 알 수가 없다. 아버지는 김대중을 죽이려는 공작에 가담했지만 그의 아들은 김대중의 햇볕 정책에서 비롯된 평화 회담에 참여했다.

악연이 선한 기운으로 다시 솟아났는지 모른다. 역사도 윤회의 회전문을 들락거리는 것일까. 김대중 납치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이민을 가지 않았을 것이고, 아들을 미국 외교관으로 키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빚을 아들이 갚는다면, 그것은 용서에 대한 응답일 것이다.

김대중은 늘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용서하되 죄는 밝혀야 합니다."

납치 사건이 발생한 후 34년 만인 2007년 10월 '국정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정부 차원의 첫 공식 결과를 내놓았다. 여기서도 "박 전 대통령의 직접 지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최소한의 묵시적 승인은 있었다고 판단된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이 사건과 무관했다면 사건 발생 후 이후락 정보부장을 처벌하는 게 당연한데도 그렇지 않았고, 사건 은폐를 지시한 점 등은 박 대통령이 사건의 공범 또는 주범임을 보여 준다"고 밝혔다.

사실 그런 정도라면 '박정희의 지시에 의한 살해 공작'이라고 명시해야 했다. 김대중은 공식 발표를 보고 낙담했다. 사람은 용서해도 죄는 밝혀 역사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김대중은 대통령으로 재직 시에 납치 사건을 파헤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참았다. 적어도 권력이 개입한 사건을 또 다른 권력으로 파헤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또 진상이 밝혀지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건을 대통령인 자신이 사과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김대중은 생전에 몇 번씩 단호하게 얘기했다.

"거듭 밝히지만 나는 '없애버리라'는 당시 대통령의 지시로 납치당했다. 나는 앞으로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 정부의 사과를 꼭 받고 싶다. 내 생전에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밝혀질 것이다. 나는 기다리겠다. 진실이 역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이제 이 땅에 없다. 언제 누가 진실을 밝혀 역사에 바칠 것인가.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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