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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어밥 될 뻔한 DJ, '납치 사건'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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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어밥 될 뻔한 DJ, '납치 사건'의 진실은?

[김대중 평전 '새벽'·15] 도쿄, 1973년 8월 8일

도쿄, 1973년 8월 8일

김대중은 일본에서 일어난 '김대중 납치 사건'을 2007년 1월 23일 구술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4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죽음을 앞에 둔 시간 속에서 느꼈던, 전신을 휘감던 당시의 공포들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김대중은 살아서 돌아온 8월 13일을 각별하게 챙겼다. 모임을 갖고 미사를 드렸다. 생과 사를 넘나 든 순간들을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그날 도쿄의 아침은 끈적거렸다. 1973년 8월 8일, 더위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김대중은 일본에 온 통일당 총재 양일동을 만나러 숙소를 나왔다. 비서 겸 경호원 김강수가 따라 나섰다. 김강수는 망명객 김대중의 신념과 인품에 매료된 청년이었다. 호텔 현관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11시가 넘어 그랜드팔레스 호텔에 도착했다. 김강수와 함께 22층으로 올라갔다. 김강수에게 로비로 내려가 기다리라 이르고 2211호실 문을 두드렸다. 양일동이 반갑게 맞았다. 소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국회의원 김경인이 들어왔다. 김대중과는 친척뻘이었다. 셋이서 함께 점심을 들었다. 그 때 양일동은 이런 말을 했다.

"주일 한국 대사관 김재권 공사가 문안을 왔네. 그런데 자네를 꼭 만나야 할 일이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금명간 자네를 만날 예정이라고 했네."
"아직 그 사람들과는 만날 일이 없습니다."

김대중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그러나 양일동은 김대중의 소재를 알린 셈이었다. 양일동 옆만 지키면 김대중은 오게 돼 있었다. 김대중은 일본 자민당 의원 기무라 도시오를 만나기 위해 2211호실을 나섰다. 오후 1시 15분경이었다. 김경인도 배웅차 따라나섰다. 바로 그때였다. 건장한 사내 대여섯 명이 어디선가 뛰쳐나왔다. 다짜고짜 김대중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고함을 지르며 맞섰지만 사내들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김대중의 입을 틀어막고 옆방인 2210호실로 끌고 갔다. 사내들은 김경인을 양일동이 있는 2211호실로 다시 밀어 넣었다.

"무슨 짓이야, 어디서 왔느냐."

양일동이 소리쳤다.

"양일동 선생님이시죠. 우리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금방 끝납니다. 조금만 이야기 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이리 대할 수 있는가."

김경인이 호통을 치자 사내 하나가 답했다.

"김경인 선생님인줄 알고 있습니다. 이건 국내 문제니까 조용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떠들면 한국인의 창피입니다."

분명한 서울 말씨였다. 두 사람은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 순간 다른 사내들은 김대중을 침대 위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마취제를 적신 손수건을 코에 들이댔다. 마취제가 약했는지 김대중은 정신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조용히 해,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

유창한 한국말이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공포가 엄습했다. 사내들은 배낭, 밧줄, 화장지 등을 준비했다. 김대중을 살해한 후 토막 내어 배낭에 넣어 운반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김경인이 나타나자 계획을 바꿨다.

사내들은 김대중을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춰서고 두 일본인이 탔다. 김대중은 일본말로 소리쳤다.

"살인자다, 구해 달라. 살인자다, 구해 달라."

그러자 두 일본인이 겁을 먹고 다음 층에서 황급히 내려버렸다. 사내들은 김대중을 사정없이 때렸다.

"새끼, 죽고 싶어 환장했나.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했잖아."

지하실 차고에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김대중을 뒷좌석에 밀어 넣고 사내 둘이 양 옆에 앉았다. 김대중의 머리를 좌석 바닥에 처박았다. 차가 움직였다. 지하 차고를 빠져나와 어디론가 달렸다.

2시까지도 김대중이 나타나지 않자 비서 김강수가 22층으로 올라갔다. 2211호실 방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김대중 선생님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어디 계십니까."

그제야 세 사람이 2210호로 달려갔지만 객실 문은 잠겨 있었다. 허겁지겁 객실 담당을 불러 2210호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약품 냄새만 났다. 한쪽 구석에 권총 탄창이 놓여 있었다. 김강수는 사색이 되어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그렇게 납치 사실을 처음 알렸다. 수석비서 조활준이 범죄 신고 전화인 110번에 연락을 취한 시각은 오후 2시 40분이었다.

연락을 받고 경찰과 기자들이 거의 동시에 들이닥쳤다. 두 개의 침대 사이에는 커다란 배낭 두 개, 색 한 개, 1.3미터짜리 밧줄이 놓여 있었다. 사이드 테이블에는 권총 탄창 한 개, 마취제가 들어있는 영양제 병, 대형 봉투 등이 놓여 있었다. 사건을 세상에 처음 알린 것은 NHK 속보 자막이었다. 오후 3시 50분이었다.

납치 차량은 고속도로를 달렸다. 김대중은 여전히 사내들의 다리 밑에 처박혀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발로 걷어찼다. 어디로 가는지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어느 빌딩 주차장 같은 곳에 차를 세웠다. 빌딩 사무실 안에서 묶인 끈들을 풀어줬다. 옷도 모두 벗겼다. 양복 주머니를 뒤져 현금과 신분증명서, 명함 등을 뺏어갔다.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히고, 신발도 운동화 같은 것으로 갈아 신겼다.

다시 끈으로 몸을 묶고 포장용 강력 테이프로 온 몸을 감았다. 얼굴은 코만 남겨 두었다. 밖은 어느새 어두워지고 있었다. 사내들은 김대중을 차 안으로 옮겼다.

30분 정도 달렸을까, 파도 소리가 들렸다. 김대중은 고향 하의도 앞바다를 떠올렸다. 목포와 부산에서 해운 회사를 운영할 때 늘 듣던 소리였다. 바다, 고향 같은 바다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흙으로 돌아가는데 나는 바다로 돌아가는가.'

해안 선착장에서 모터보트로 옮겨졌다. 보트 위에서 누군가 머리에 보자기를 씌웠다.

'내 인생도 이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묶인 손으로 십자가를 그었다. 그러자 사내 하나가 배를 걷어찼다. 김대중은 소리쳤다.

"때릴 것 없소.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오.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있는데 더 이상 때릴 필요가 없지 않소."

다음날 새벽 사내들은 김대중을 큰 배에 태웠다. 배는 파도에도 거의 흔들림이 없었다. 500톤급으로 1000마력이 넘는 듯했다. 김대중은 배의 흔들림만으로도 크기와 성능을 알 수 있었다. 사내들은 김대중을 갑판 쪽으로 데려갔다. 끈을 풀고 테이프를 떼어냈다. 그런 다음에 양손을 가슴에 모은 뒤 온 몸을 묶었다. 등에 널빤지를 대고 몸의 세 곳을 다시 묶었다. 입에는 나뭇조각을 물린 뒤 붕대로 감았다. 양 눈에는 스카치테이프를 다섯 번씩이나 붙였다. 그 위에 다시 붕대를 감았다. 작업 중에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양쪽 손목에 쇳덩이를 달았다. 그러고 나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던질 때 벗겨지지 않겠어?"
"글쎄, 이불에 묶어 던지면 떠오르지 않는다던데. 솜이 물을 먹어서."

사내들은 실제로 이불은 씌우지 않았다. 이야기 속에 가끔 "상어"라는 말도 튀어나왔다. 김대중은 바다 속에서의 최후 순간이 어른거렸다.

'바다 속에 던져지면 쇳덩이를 벗길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바다 속이니 몇 분이면 끝이 날거야. 그렇게 되면 고생도 끝나겠지. 그래, 이 정도 살았으면 된 것 아닌가.'

그러다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야, 살아야지. 어떻게 이리 허망하게 죽는단 말인가. 살고 싶다. 아직 할 일이 많다. 상어에게 하반신을 뜯겨 먹혀도 상반신만이라도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팔목에 힘을 주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죽음의 순간이란 이런 것인가. 김대중은 아득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프레시안(손문상)

그때였다. 김대중의 눈앞에 예수님이 나타났다. 기도도 드리지 못하고 그저 죽음 앞에 떨고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앞에 계셨다. 성당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김대중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렸다.

"살려주십시오. 아직 저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저를 구해 주십시오."

김대중은 예수를 영접한 후 '살려 달라'는 기도는 처음이었다. 순간 붉은 섬광이 일었다. 테이프가 감겨 눈을 뜰 수가 없는데도 또렷이 느꼈다. 그리고 폭음이 들렸다.

"비행기다."

선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배가 요동을 치며 미친 듯이 달렸다. 바다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배는 30분쯤 정신없이 달리다 속도를 줄였다. 사위가 조용했다. 김대중은 바닥에 처박혀 귀만 열고 있었다.

"김대중 선생 아니십니까?"

경상도 말씨였다. 김대중은 겨우 고개만 끄덕였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 선생님을 찍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살길이 열리는 것 같았다. 눈앞이 환해졌다.

"선생님은 이제 살았습니다."

입의 붕대를 풀어주더니 담배에 불을 붙여 물려주었다. 오랜만에 연기를 삼키니 머리가 핑 돌았다.

'내가 살아서 담배를 피우는구나.'

사내가 주스를 가져와 권했다. 김대중이 물었다.

"여기가 지금 어디요?"
"도쿠시마(德島) 근해입니다."
"그럼 이 배가 항구에 들리면 경찰에 연락을 해 주십시오. 일본 경찰은 나를 도울 것입니다."

사내는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배는 항구에 닿지 않았다. 9, 10일 이틀 동안 바다에 떠 있었다.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잠이 밀려왔다. 졸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눈을 가려 여전히 깜깜할 뿐이었다. 다시 배가 움직였다.

11일 새벽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배 밖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항구에 정박한 것 같았다. 그날 밤이 깊어서야 배에서 끌려 내려왔다. 미군들이 사용하는 스리쿼터에 실려 몇 시간을 가다가 다시 지프차에 옮겨졌다. 김대중은 한국 땅에서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8월 13일 납치 엿새째 되는 날 사내 하나가 말을 걸었다.

"김대중 선생, 이야기 좀 합시다. 선생은 왜 해외에 나가서 국가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니오. 내가 박정희 정권을 반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유민주주의와 반공 체제를 부인하거나 반대한 일은 없소. 대한민국에 반대한 적은 한 번도 없소. 내가 반대한 것은 독재 정권이지 국가가 아니오."
"국가가 정권이지, 국가와 정부가 다른 게 뭡니까."

사내가 볼멘소리로 되물었다. 김대중은 가만히 있었다. 사내가 말을 돌렸다.

"김대중 선생, 협상 좀 합시다."
"말해 보시오."
"지금부터 선생을 데리고 나가서 집 근처에 풀어드릴 작정입니다. 상부의 명령입니다. 차에서 내리시면 거기서 소변을 보십시오. 그 사이에 눈의 붕대를 풀어서도 안 되고 소리 쳐도 안 됩니다. 소변을 다 본 뒤에는 집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어떻습니까?"

김대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들은 서울 시내를 이리저리 한참 동안 달린 후에 김대중을 내려놓았다. 김대중은 소변을 보고 붕대를 풀었다. 한참 지나자 사물이 보였다. 낯이 익었다. 동교동 집에서 가까운 주유소 근처였다. 골목길에는 더위를 식히려 나온 주민들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온한 밤이었다. 달빛이 참으로 밝았다. 오래 전 목포 형무소에서 탈출했을 때처럼. 김대중은 살아서 돌아왔다. 세 번째, 네 번째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달빛은 김대중의 험한 운명을 비추고 있었다.

김대중은 걸음을 뗐다. 고관절 장애에다 오래 끌려 다녀서 그런지 다리가 아팠다. 절뚝절뚝 걸었다. 집으로 가는 골목길, 아침에 집을 나선 것 같았다. 일본과 미국을 오갔던 격정의 망명 생활이 불과 한나절의 일 같았다. 꿈만 같았다. 인생이란 이런 것일까. 김대중은 다시 집 앞에 서 있었다. 시간은 밤 10시를 막 지났다. '김대중 이희호' 문패 아래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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