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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언제 DJ를 죽이기로 결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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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언제 DJ를 죽이기로 결심했나?

[김대중 평전 '새벽'·14] "앉아 있어도 달리고 있었다"

"앉아 있어도 달리고 있었다"

1972년 10월 17일 김대중은 일본에 있었다. 고관절 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도쿄에 머물렀다. 오후 5시쯤 서울의 친구가 숙소인 제국호텔로 전화를 해왔다. 친구는 오후 7시 대통령 박정희가 중대 발표를 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매우 불길했다. 고향 친구인 김종충과 텔레비전을 지켜봤다.

"나는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평화적 통일과 한국적 민주주의를 위해 국회를 해산하고 계엄령을 선포한다니, 수사(修辭)가 가소로웠다. 박정희는 초법적 조치들을 쏟아냈다.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하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토록 했다. 대통령이 3권(權) 위에 군림할 수 있었고, 6년 임기에 연임 제한마저 철폐했다. 사실상 종신 집권이 가능한 총통제와 다름이 없었다.

정국은 김대중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리, 아주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 생각이지만 김대중은 박정희의 야욕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야당 의원들을 포섭하여 개헌을 단행하리라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박정희는 노골적으로, 어찌 보면 무식하게 일을 저질렀다. 박정희는 이때부터 민심에 길을 묻지 않았다. 여론을 살피거나 대화에 나서는 것을 귀찮아했다. 나라 안에 오직 박정희만 있어야했다.

수많은 장면들이 떠올랐다. 탱크가 깔려 있는 살벌한 서울 거리, 김대중을 연호하던 유세장,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측근과 동지들, 표정 없는 박정희 얼굴, 학생들의 시위와 그 앞을 가로막는 완장 두른 계엄군…….

호텔방은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도쿄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도쿄 시민들이 진정 부러웠다. 나라가 평화로워야 국민들이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독재의 살기가 없는 곳에서 잠들었으면…….'

중대 발표 직후 아내 이희호는 전화를 걸어 귀국을 만류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아요. 아무래도 서울에 오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가냘픈 목소리가 더욱 가늘어져 있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곧바로 잡혀 가 내일을 알 수없는 처지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귀국을 안 하면 아내와 자식, 그리고 동지들은 어찌 될 것인가. 그래, 돌아가자. 독재와 싸우다 죽는다면 민주주의는 김대중의 무덤에서부터 피어날 것이다.'

하지만 금세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돌아가서 갇히는 게 능사는 아니지 않은가. 다행히 나는 나라 밖에 있다. 독재 정권의 실상을 세계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

돌아가 함께 갇힐 것인가, 남아서 홀로 싸울 것인가.

번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김대중은 왜 자신이 한국에 없을 때 박정희가 '10월 쿠데타'를 일으켰는지에 생각이 멈췄다.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먼동이 틀 때 쯤 망명을 결심했다. 긴 밤이었다. 도쿄 주재 외국 보도진에 그 사실을 알렸다. 망명의 첫 아침, 첫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박 대통령의 행위가 세계 여론으로부터 엄중한 비판을 받음과 동시에 민주적인 자유를 열망하여 이승만 독재 정권을 타도한 위대한 한국민의 힘에 의해 반드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갈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프레시안(손문상)

같은 시각 한국에서는 군 수사관들이 동교동 집과 김대중 계파의 의원들 집을 일제히 덮쳤다. 김상현, 조윤형, 이종남, 김녹영, 조연하, 김경인, 박종률, 강근호, 이세규, 김한수, 나석호 의원이 군부대로 끌려갔다. 권노갑, 한화갑, 엄영달, 김옥두, 방대엽, 이수동, 이윤수 비서들도 잡혀가 고문을 당했다. 옷 벗기고 잠 안 재우기, 각목으로 때리기, 거꾸로 매달아 코에 물 붓기, 송곳으로 발바닥 찌르기……. 잡혀 들어간 사람들에게 김대중이가 빨갱이라는 것을 시인하라는 것이었다. 비서 김옥두의 증언은 실로 처참하다.

"몇 시간 동안 각목으로 사정없이 후려치고, 통닭구이 고문과 물고문을 한바탕 해댄 그들은 드디어 나를 의자에 앉혔다. 여전히 몸뚱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온몸은 이미 퉁퉁 부어올랐고, 푸르딩딩한 멍이 일직선을 긋거나 아니면 동그랗게 뭉쳐 있었다. 여기저기서 핏물이 조금씩 몸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어깻죽지는 빠질 것처럼 축 늘어져 버렸고 모든 게 귀찮고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심정이 앞섰다. (…) 어느 날은 의자에 앉히더니 펜치를 가지고 와 손톱을 뽑아버리겠다고 잡아당기기도 했다. 손톱이 정말 곧 빠져버릴 것처럼 아팠다. 손톱 밑에 금세 물집이 생겼다. 그러면서 또다시 머리카락을 한 묶음 잡아 뒤로 젖히더니 혀를 펜치로 잡아당기는 고문을 자행했다. 목구멍이 삽시간에 부어올랐고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통닭 바비큐처럼 몸뚱이를 또다시 매달더니 이번에는 고춧가루 물을 들이부었다.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정신없이 오줌을 싸는 날도 있었다."

김대중은 한국 독재 정권의 실상과 박정희의 야욕을 발가벗겼다. 일본 언론에 기고를 하고 인터뷰를 했다. 한국 국민들은 결코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는 민주 세력이 살아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망명의 무대를 미국으로 옮겼다.

미국에서 누구라도 만났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 제롬 코헨 교수, 마이크 맨스필드 민주당 원내총무, 휴스콧 공화당 원내총무 등을 만나 망명의 배경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12월 14일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는 첫 대중 연설을 했다. 김대중의 연설은 한국 교포는 물론 미국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이근팔도 큰 감동을 받았다. 대학에 다닐 때 신익희, 장면 후보의 선거 운동원으로 활동하며 거물들의 연설을 들었지만 김대중은 그들과 차원이 달랐다. 달변이라는 얘기는 소문으로 들어서 알았다. 하지만 김대중의 연설에는 호소력과 설득력이 있었다. 해결책과 비전이 들어있었다.

어느 날 김대중은 이근팔에게 비서가 돼달라고 부탁했다. 이근팔은 다섯 자녀를 둔 궁핍한 가장이었다. 김대중의 비서로는 도저히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망명객 김대중의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흡사 무엇에 감전된 듯했다.

망명객 김대중은 초조했다. 유세장 청중들의 환호가 아직도 귓전을 맴돌고 있는데 돌아보면 혼자였다. 현실은 외롭고 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마음이 급했다. 한시도 쉬지 않았다. 책 읽고, 글 쓰고, 사람 만나고, 전화하고, 편지를 썼다. 비서 이근팔은 그런 김대중을 이렇게 평했다.

"앉아 있어도 달리고 있었다."

주미 한국 대사관 공보관장 이재현이 미국에 망명했다. 독재 정권에 맞선 용기 있는 항거였다. 재외 공관장의 망명을 김대중은 비상하게 바라봤다. 박 정권이 흔들리고 있음이었다. 이재현을 만나 박 정권의 붕괴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김대중을 실망시켰다.

"박 정권은 단기에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상당히 갈 것입니다. 각오를 다져야 할 것입니다."

이 때 김대중 주변에는 살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연설장에 깡패들이 난입하고, 연설을 방해하려는 공작이 사전에 발각되기도 했다. 모두 중앙정보부의 사주로 일어난 일이었다. 중앙정보부원들은 김대중이 있다면 세상 끝가지 쫓아갔다. 아내 이희호가 인편에 편지를 보내왔다.

'정부에서는 당신이 외국서 성명 내는 것과 국제적 여론을 제일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박정희 씨만이 이 나라에 존재해 있고 그의 명만이 법이요, 모두 죽은 자의 묘지가 되어 있는 이곳에서 숨이라도 크게 쉬면 무슨 소린가 놀라서 벌을 내릴까 두려워하는 심정입니다. 특히 미워하는 대상은 당신임으로 그리 아시고 더 강한 투쟁을 하시고, 국민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호흡을 크게 쉴 수 있게 해 주기 위해서라도 급히 서두르지 마세요.'

1973년 7월 6일 워싱턴 메이플라워 호텔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김상돈, 문명자, 임창영 등이 참여했다. 김대중은 비로소 반독재 투쟁의 해외 거점을 만들었다.

7월 10일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한민통 일본지부를 결성하기 위해서였다. 김대중은 하루하루를 분주하게 보냈다. 한민통 창립 준비와 함께 언론과 도 활발하게 접촉했다. 그중 월간 <세카이>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와는 가장 솔직하게, 가장 깊이 있는 대담을 했다. 김대중은 신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에 떨어져도 신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은 역사입니다. 나는 역사에서 정의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또한 나의 유일한 영웅은 국민입니다. 국민은 최후의 승자이며 양심의 근원입니다. 나는 이런 신념으로 살고 있습니다."

불온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재일 한국인 야쿠자들이 김대중을 노리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수석비서 조활준은 분명 음모가 진행 중이라며 숙소를 날마다 옮기자고 했다. 조직적인 움직임들이 포착되었다. 내 생각이지만 김대중이 일본으로 건너오자 정보 당국이 곧바로 '김대중 제거' 계획을 구체화시켰던 것 같다. 미국에서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일본은 그래도 '해볼 만한 땅'으로 여겼음직하다. 그러나 방법을 싸고는 내부에서도 강·온이 엇갈렸던 듯하다.

국내에서는 중앙정보부 6국장 이용택이 이희호를 찾아와 김대중의 귀국을 종용했다. 편지 속의 이희호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에서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서 어떻게든지 귀국시켜 구속한다는 말이 들려요. 그리고 일본서도 당신 꼭 미행하는 줄 아시고 조심조심 하시고 몸을 제일 보호하세요.' (1973년 1월 5일)

'세간에서는 당신이 정부의 교섭을 받고 돌아와서 감투를 쓰게 된다는 낭설도 돌고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당신을 못 쓰게 만들려 갖은 짓을 다하고 있습니다.' (1973년 1월 11일)

'가능하면 당신을 경호하는 몇 사람과 늘 같이 다니도록 하세요. 그리고 당신을 후원하는 분들도 조직되어서 움직이면 더욱 힘 될 줄 믿습니다.' (1973년 2월 20일)

'이 국장(중앙정보부 6국장) 말이 동백림 사건도 자기가 그들 스스로 오게 만들었대요. 귀국하면 생명이 위험하다는 등 말하지만 일본이나 미국에 있어도 만일에 생명을 자기들이 노린다 가정한다면 감쪽같이 없앨 수 있다고 했어요.' (1973년 5월 15일)

'이 국장이 무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당신을 귀국하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그 자리에 오게 된 듯하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몸을 조심하셔서 끝까지 싸워 이기셔야 해요. 현재 한국의 정치인은 당신 한 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럴수록 당신의 책임은 더욱 중하고 당신의 몸은 귀중하니까 늘 몸을 지키세요.' (1973년 6월 20일)

'저들이 당신의 명성이 높아지고 외국에서의 인정이 굳어질수록 당신에게나 우리 가족들에게 화살을 보낼 터이니 더욱 더 조심하세요.' (1973년 7월 8일)

불온한 기운들이 뭉쳐서 기어이 김대중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운명의 날이 오고 있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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