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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상징이 된 지팡이, 그 안타까운 사연은…

[김대중 평전 '새벽'·13] 다시는 뛰지 못했다

다시는 뛰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은 국회의원 선거를 1971년 5월 25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 지 한 달도 안 되는 시점이었다. 야당이 대선 패배의 후유증을 추스르기 전에 국회를 장악하겠다는 일종의 기습이었다. 부랴부랴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이번에는 총재 유진산이 자신의 선거구인 서울 영등포 갑구를 포기해 버렸다.

자신은 전국구로 옮기고 대신 무명의 정치 신인을 공천했다. '진산 파동'이었다. 뻔뻔하고 교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진산의 '공천 장사'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 전체가 회복 불능의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야당에 대한 여론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다시 김대중이 나서야 했다. 당으로서도 믿을 사람은 김대중뿐이었다. 영구 집권의 음모를 막으려면 총의석의 3분의 1인 69석을 얻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김대중은 지역구를 포기하고 전국을 누볐다.

김대중은 여전히 번쩍거리는 스타였다. 청중들이 열광했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영구 집권 음모를 국민들에게 알렸다. 대통령 선거 때보다 더 많은 지역을 찾아갔다. 차 속에 먹고 자며 유세장에서 유세장으로 이동했다. 어디를 가도 뜨거웠다. 후보들이 김대중을 찾았다.

"제발 한 군데만 더 들려주시오. 대통령 선거 때 내가 김 후보를 위해 얼마나 애 쓴지 아시오. 제발 들렸다 가시오."

후보들은 또 이렇게 외쳤다.

"김대중 대통령이 보고 싶다면 나를 국회로 보내 주십시오. 김대중 동지를 도와 정권 교체를 이루겠습니다."

아예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차 앞에 드러누워 외쳤다.

"연설 한번만 해 주시오. 그냥 갈려거든 아예 우리를 죽이시오."

할 수 없이 차를 돌려 예정에 없던 연설을 했다. 그러니 다음 유세가 늦어졌다. 그래도 청중들은 흩어지지 않고 기다렸다. 김대중이 연단에 오르면 한목소리로 외쳤다.

"대통령 선거 다시 하라." "차기 대통령은 김대중."

민심은 다시 김대중을 부르고 있었다.

5월 24일 목포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전날 신안·목포 지역 유세를 마친 김대중에게는 서울에서의 마지막 지원 유세가 기다리고 있었다. 목포에서 비행기로 상경하려 했다. 그런데 예약한 비행기가 비 때문에 뜰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광주에서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광주를 향해 2차선 국도를 달렸다. 한참 가다보니 김대중이 탄 차와 경호차 사이로 택시가 끼어들었다. 김대중을 알아보고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멀리 대형 트럭이 나타났다. 김대중도 그걸 무심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

트럭이 거의 직각으로 꺾어들며 김대중이 탄 승용차를 향해 돌진해왔다. 놀란 운전사가 가속 페달을 밟았다. 트럭은 트렁크 쪽을 들이받았다. 승용차는 4미터 아래 논 위로 떨어졌다. 트럭은 이어 뒤를 따라오던 택시를 정면으로 받아 버렸다. 택시 안의 두 명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세 명은 크게 다쳤다. 승객 한 명이 병원으로 실려 가며 말했다.

"김대중 선생은 어찌됐습니까. 선생님을 먼저 살려주시오."

승용차 안의 김대중은 순간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차는 반듯하게 세워져 있었다. 누가 아래서 받은 듯했다. 그래도 팔의 동맥이 두 군데 잘렸고, 손목과 오른쪽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특보 권노갑도 손목을 다쳤다. 뒤따르던 경호차에서 비서들이 뛰쳐나와 김대중을 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서울의 유세장에서는 목 빠지게 김대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응급 치료만을 받고 함평 학교역에서 열차에 올랐다.

오후 3시로 예정된 영등포역 앞 유세는 김대중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대중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주최 측은 죄송하다는 사과와 곧 올 것이라는 안내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느덧 비에 섞여 어둠이 내렸다. 그래도 청중들은 마냥 기다렸다. 밤이 깊어 9시가 넘어서야 마침내 김대중이 나타났다. 목과 팔에 붕대를 감고 연단에 올랐다. 청중들은 환호하면서도 '붕대감은 모습'에 술렁거렸다. 김대중은 사고 경위를 설명하고 빗속에서 포효했다.

"나는 열 번 쓰러지면 열 한 번 일어나고, 백 번 쓰러지면 천 번 일어나서 이 땅에 민주주의를 이루고 대중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1만 여명이 내지르는 함성이 우레보다 컸다. 김대중은 이날 자정까지 서울 유세장 곳곳을 돌았다.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강행군을 했다. 그렇게 해서 야당을 살렸지만 김대중은 '건강한 다리'를 잃었다. 유년 시절 하의도에서부터 단련한 뜀박질을 할 수 없었다.

이날 사건은 의문투성이었다. 큰비가 아닌데도 목포에서 비행기가 뜨지 않았고, 사고를 낸 대형 트럭의 소유자는 공화당 비례 대표 8번을 부여 받은 변호사였다. 야당은 의혹들을 들춰 세상에 알렸다. 이때부터 정치인 김대중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김대중은 목포형무소에서 집단 학살의 위기를 넘긴 후 다시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다. 이날 사고로 정치 인생에 손실이 너무나 컸다. 후유증은 깊고도 깊었다. 고관절에 장애가 생겨 평생을 고생해야 했다. 정적들은 끊임없이 건강에 시비를 걸어왔다.

ⓒ프레시안(손문상)

선거 결과는 야당의 대약진이었다. 204석 중에 89석을 얻었다. 여당은 과반이 넘는 의석을 차지했지만 야당은 개헌을 저지할 수 있었다. 국회를 통한 영구 집권의 음모는 저지 할 수 있었다. 서울은 19개 선거구에서 18개를, 부산에서는 8개 선거구 중에서 6개를 차지했다.

선거 결과는 좋았지만 김대중에게는 신산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의 한국은 박정희의 명을 받아 중앙정보부가 다스리고 있었다. 정보부의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포 정치의 진원지였다. 그들의 비수는 김대중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요원들이 미행하며 감시했다. 집 전화를 도청했고, 출입자들은 일일이 사진을 찍었다. 언론에 등장했던 '동교동', 그 동네 풍경은 살벌했다. 이웃집들을 통째로 빌려 주변 전체를 감시했다.

어느 날 언론에서 홀연 '김대중'이 사라졌다. 정보부원들은 모든 언론을 샅샅이 뒤져 김대중을 지웠다. 강연을 하려해도 장소를 구할 수 없었다. 어렵게 장소를 빌려도 곧바로 해약 전화가 왔다. 저들은 박정희와 맞서는 길을 원천 봉쇄하려 했다.

'실미도 특수군 사건' '광주 대단지 폭동 사건' '한진빌딩 노동자 난입 사건' 등이 잇달아 터졌다. 그럼에도 민심이 떠난 독재 정치는 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 때 공화당의 '4인방 항명 사건'이 터졌다. 야당이 제출한 각료 해임안을 공화당 의원들이 합세하여 통과시켰다. 박정희는 펄펄 뛰었다. 박정희의 명을 받은 요원들은 4인방을 색출해서 정보부로 끌고 갔다. 번개처럼 빨랐다. 실세를 자처했던 공화당 중앙위 의장 김성곤, 정책위 의장 길재호는 벌거벗겨져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고이 기르던 김성곤의 카이저수염도 뜯겨나갔다. 자신을 향한 도전에 박정희는 철저하게 응징했다. 제법 견고해 보였던 4인방의 아성은 모래성보다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공화당의 내분으로 돌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백주에 벌어진 박정희의 입법부에 대한 테러였다. 법과 질서를 능멸하는, 민의에 대한 패륜적 몽둥이질이었다. 하지만 신민당은 야성(野性)을 잃어가고 있었다. 김대중은 중앙정보부의 불법 행위를 규탄하자고 했지만 야당은 움직이지 않았다. 김대중은 10월 23일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의를 통해 정보부를 정면으로 질타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중앙정보부는 만능의 폭군입니다.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선거 때 필요하면 정당을 만들어 조작하고, 부정 선거를 자행하고, 여당의 공천에 개입하고, 야당의 분열 공작을 자행하고……공산당을 잡으라는 중앙정보부가 이 나라 정치를 완전히 지배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국민들이 또는 정치인들이 국무총리의 욕을 하거나 대통령에게 욕을 할망정 중앙정보부는 무서워서 비판을 못합니다. 중앙정보부는 완전히 지금 무소불능의 권한으로 이 나라의 3권 위에 올라섰습니다. 국회에 대해서는 중앙정보부가 3선 개헌에 반대한 사람들을 구타하고 협박을 하더니 이번에도 또 그랬어요. 입법부가 완전히 중앙정보부에 의해서 유린당하고 있어요.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중앙정보부의 노예가 될 판입니다.

우리들은 이제 사생활의 자유도 없어요. 나는 바로 이런 중앙정보부에 대한 규탄을 하다가 비록 내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정보 정치의 제물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 소신으로는 믿는 바를 이야기 안 할 수 없다, 이것입니다."

박정희는 점점 밀실을 좋아하게 된다. 옳은 소리에 귀를 막으니 민심이 떠났다. 그 빈자리에 간신배나 아첨꾼이 들끓었다.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자 곧바로 1971년 10월 15일 위수령을 발동했다. 대학 안에 무장 군인들을 풀었다. 그리고 12월 6일 비상 사태를 선포했다. 이유는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박정희는 야욕의 발톱을 드러냈다. 그것은 장기 집권이었다.

김대중의 예언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다시 박정희와의 목숨을 건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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