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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고백 "DJ는 ○○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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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고백 "DJ는 ○○ 정치인이다!"

[김대중 평전 '새벽'·11] 쇠처럼 그리고 바람처럼

쇠처럼 그리고 바람처럼

40대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정책 선거를 천명했다. 상대 후보 박정희에 대한 인신공격은 하지 않기로 했다. 정책으로만 승부하기로 했다. 향토예비군 폐지, 미·중·소·일 4대국의 한반도의 전쟁 억제 보장(4대국 안전 보장론), 남북한 화해와 교류, 공산권과의 관계 개선과 무역 추진, 대중 경제 노선의 추진, 사치세 신설, 학벌주의 타파, 2중 곡가제 실시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당시 한국은 병영 국가나 다름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안보를 내세워 끊임없이 국민을 위협했다. 그런 시점에 향토예비군 폐지, 4대국 안전 보장론, 남북한 화해와 교류 등을 주장하자 정부 여당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연일 안보의식이 결핍된 위험한 정치인으로 매도하며 공약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물러서지 않았다. 모든 공약은 아침저녁으로 매만지며 소중하게 품어온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김대중은 왜 숱한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대북 정책들을 구상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정치에 입문하면서 품었던 김대중의 초심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한국 전쟁에서 온몸으로 체득한 것들을 실천하려 했다.

세상에 '착한 전쟁'은 없다. 김대중에게 전쟁은 의식 저 편의 막연한 것이 아니고 늘 죽음이 뒤를 따르던 구체적인 것이었다.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불처럼 생생한 것이었다. 국가가, 지도자가 전쟁을 결정하면 국민들은 그냥 죽어야 했다. 정치권력의 거대한 폭력에 민초들은 그냥 스러져야 했다.

더욱이 한국 전쟁은 우리가 원해서 싸운 것이 아니었다. 강대국의 대리전이었다. 남과 북은 전쟁이란 최악의 폭력에 내몰려야 했다. 김대중은 정전 체제가 아니라 평화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화해 협력을 통한 남북 공존을 모색했다. 당시에는 급진적인 정책이었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가장 현실적인 포용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이후 끊임없이 사상 검증에 시달렸고, 포용 정책도 위기를 맞곤 했다.

김대중은 망명객, 야당 총재, 대통령이 되어서도 이때의 정책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형수로 갇혀 있을 때도 연구하며 다듬었다. 더욱 세련되게, 정교하게, 현실성 있게.

향토예비군 폐지 공약은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그러자 박정희가 직접 나서서 공격했고 관변 단체들이 일제히 가세했다.

"북한의 남침을 유도하는 발언이다. 즉각 철회하라."

향토예비군은 북한 게릴라의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생겨났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를 악용하여 국민을 군사 조직으로 묶어 관리했다. 예비역들은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가 노역과 훈련을 해야 했다. 향토예비군은 본래 취지를 벗어나기 일쑤였고 그만큼 원성이 높았다.

혹자는 이렇듯 예비군 폐지를 주장했으면서도 대통령이 됐을 때는 왜 예비군 제도를 존속시켰느냐고 따져 묻곤 했다. 김대중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안했다. 하지만 그 속내를 알 것 같다. 아마 더 큰 것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남북 정상 회담의 걸림돌은 북쪽보다는 오히려 남쪽에 더 많았다. 예비군을 폐지하면 국론을 분열시킬 수 있었고, 자칫 남북 관계 개선에 동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 협상하기에 따라 예비군 제도 자체를 북한의 노동적위대 같은 조직을 해체하는 조건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4대국 안전 보장론'에도 여권은 길길이 뛰었다. 나라의 국방을 외국에 맡기려는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공격해왔다. 박정희는 "우리의 적인 소련과 중공에게 자국의 안보를 맡기자니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그러나 김대중의 구상은 4대국에 국방을 맡기자는 것이 아니었다. 핵심은 4대국에게 한반도에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자는 것이었다. 일종의 불가침 조약을 맺게 하자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유세장에서 이렇게 꾸짖었다.

"이 나라에서 제2의 청일 전쟁이나 러일 전쟁은 하지 말라, 이 나라에서 다시 6·25 같은 것은 제3국을 조정해 가지고 획책하지 말아라. 이런 나의 주장이 어째서 잘못이라는 것인가."

4대국에 남북한을 합하면 훗날 '한반도 핵 위기'를 해결하려고 만든 6자 회담의 당사국들이다. 김대중은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논리를 간파하고 평화의 요건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정부 여당은 남북 화해와 교류, 평화 통일론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와는 어떤 화해도 있을 수 없다며 김대중을 용공주의자로 몰아갔다.

"김대중이 피리를 불면 김일성이 춤을 추고, 김일성이 북을 치면 김대중이 장단을 맞춘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후 불과 1년 후에 박 정권은 김대중의 공약과 똑 같은 내용의 대북 정책을 추진했다. 남쪽의 제의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채택한 것이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는 통일이라는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병영 국가에서 하늘 높이 쌓아올린 '안보'라는 이름의 금기를 깨뜨렸다. 그 때부터 통일을 입에 올릴 수 있었다.

김대중은 정책으로 박정희를 압도했다. 정부 여당이 정책을 선보이면 야당이 공격하던 과거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공화당은 방대한 행정 기관과 당내의 정책 심의 기구가 있었지만 주목할 만한 정책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정책선거에서는 김대중의 완승이었다. 국정 전반을 7개 항목으로 정리한 선거 공약은 압권이었다.

'1인 독재에서 제2의 해방으로(법제정치), 폐쇄 전쟁 지향에서 적극 평화 지향으로(통일), 예속 외교에서 자유 실리 외교로(외교), 정권 안보에서 민족 안보로(안보), 특권 경제에서 대중 경제로(경제), 불신과 절망에서 희망의 대중사회로(사회·복지), 질식·압박에서 자유·창조로(교육·문화)'

이렇게 세련되면서도 명징한 공약은 일찍이 없었다. 그보다 더 놀랄 일은 이 모든 정책들이 김대중 개인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야당인 신민당은 정책을 입안하는 기구가 아예 없었으며 대통령 후보를 보좌하는 정책 기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스스로 깨친 것들을 꾸준히 숙성시켰다. 김대중의 공약에는 남북통일과 사회 변혁을 향한 꿈과 희망이 들어 있었다.

훗날 대통령 노무현은 정치인 김대중을 천재라며 머리를 숙였다. 퇴임 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청와대 들어와서 보니 정부의 구석구석에 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가 남아있었습니다. 내가 창조적인 것이라고, 내가 처음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들어가 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발자취가 있더란 말입니다. 정부 혁신 부문에도 그런 것이 있고, 내가 가치 있게 생각하는 모든 것에."

짐짓 큰 뜻을 세우고 미답의 산봉우리에 올랐더니 김대중이란 인물이 오래 전에 다녀갔다는 얘기다. 그것도 그 봉우리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오래 생각하고 그 소감까지 남겨 놓았으니 노무현은 퍽이나 놀랐을 것이다. 그 놀람을 이렇게 전했다.

"정치의 천재 DJ가 아니라 정책에 있어서도 천재성을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양반은 총체적인 능력, 역량이 천재급 정치인입니다."

김대중은 1971년 새해 미국을 방문했다.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대선 정국에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젊은 정치인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김대중은 자신의 구상을 거침없이 설파했다. 미국 정부의 관리들과 정당지도자들은 한국에서 온 젊은 지도자에게 매료되었다. 에드워드 케네디(Edward Kennedy) 상원의원은 최상의 격려를 해주었다.

"당신은 '한국의 케네디로 불리고 있던데, 우리 케네디 집안은 지금까지 선거에서 패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김대중 후보도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지금 미국 정부는 한국의 독재 정권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를 우려하며, 한국의 사태를 주의 깊게 보고 있으니 안심하고 선거에 전력을 다하십시오."

제임스 풀브라이트(James William Fulbright) 상원외교위원장과의 대화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풀브라이트는 김대중을 만나자마자 대뜸 물었다.

"당신은 한국과 같은 군사 독재 국가에서 정권 교체가 가능하다고 보고 출마했습니까?"

풀브라이트는 한국의 독재 정권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질문이라지만 한국에서는 정권 교체가 극히 비관적이라고 단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김대중이 내심 기다리고 있던 질문이었다.

"당신네 조상은 200년 전에 독립과 자유를 위해 영국과 싸웠습니다. 그때 미국인들은 그 싸움에서 반드시 독립이 되리라는 보장을 받고 전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자유를 얻겠다는 일념으로 싸웠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위대한 건국의 지도자 토머스 제퍼슨은 민주주의는 인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 당장 성공할지 그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올바른 일이라고 믿습니다. 제퍼슨이 말한 대로 피와 눈물을 흘리며 싸워 나가면 반드시 자유와 민주주의를 획득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우리는 계속 싸울 것입니다."

박 정권은 돈과 언론을 철저히 통제했다. 중앙정보부는 야당으로 흘러들어가는 돈은 전 방위로 감시했다. 아무 기업인이나 연행하여 "왜 김대중에게 돈을 주느냐"고 윽박질렀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곤욕을 치렀고, 이를 전해들은 기업인들은 김대중이란 이름만 들어도 저만치 달아났다.

반면에 후보 박정희는 나라 돈을 마음대로 썼다. 날마다 기공식을 가졌다. 어느 곳이나 대통령의 '특별한 관심 구역'이었다. 공무원은 대통령의 종업원이었고,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사장이었다.

ⓒ김대중도서관

하지만 민심은 변화를 원했다. 유세장은 어디를 가도 뜨거웠다. 청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김대중은 정권 교체에 대한 열망이 느껴졌다. 부산에서는 50만, 대구에서는 30만 명이 모였다. 하루에 열 차례도 넘게 연설을 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전국을 누볐다.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참겠다 갈아 치자"

김대중은 바람처럼 달려갔다. 청중들은 열광했다. 김대중은 철인(鐵人)이었고, 선거는 접전 양상을 보였다. 박정희는 초조해졌다. 심복들을 불러 판세를 묻는 시간이 잦아졌다. 부하들 대답은 한결 같았다.

"김대중 인기는 거품입니다. 어림없습니다. 어찌 감히 각하의 영도력과 업적에 비하겠습니까."

그래도 불안했다. 1967년 '목포의 전쟁' 때도 비슷한 보고를 받았지만 결과는 김대중에게 졌다. 박정희는 정보 책임자를 하나씩 은밀히 불러 두 번 세 번 얘기했다.

"임자가 나를 구해야 해."

선거는 집권 공화당과 야당 신민당의 대결이 아니었다. 또 김대중과 박정희의 후보 간 다툼도 아니었다. 후보 김대중과 박정희의 지상명령을 받들고 있는 중앙정보부와의 싸움이었다. 김대중은 거침없이, 두려움 없이 유세장을 누볐다. 한반도의 반쪽, 남쪽이 들끓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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