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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YS 제치고 대통령 후보 된 DJ, 그 비결은?

[김대중 평전 '새벽'·10] 마침내 갑옷을 입다

마침내 갑옷을 입다

기회는 천사의 얼굴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악마의 모습으로도 찾아왔다. 목포의 전쟁에서 이긴 김대중은 이미 정계 거물이었다. 정국을 보는 눈은 더욱 예리해졌다. 국회에서의 활동 또한 빼어났다.

한 번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을 국회에서 호되게 꾸짖었다. 동백림 사건이 일어났을 때였다.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조작하여 우방국들과 외교 마찰을 빚고 있었다. 조윤형 의원이 "동백림 사건으로 국가 체면이 말이 아니다"라고 따지자 김형욱이 발을 구르고 책상을 치며 의원들을 노려봤다.

"공산당 잡는 것이 죄입니까. 이것이 어느 나라 국회입니까."

여당 의석에서는 "공산당은 당연히 잡아야 한다"고 동조했다. 심지어 야당 중진 의원들까지 이를 거들었다. 김대중이 나섰다.

"여기 계신 여야 의원 여러분, 당신들 국회의원 맞습니까. 정보부장이 무서워서 동료 의원 발언에 그리 비난을 하는 겁니까. 같은 의원으로 부끄럽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보시오, 김 부장! 여기가 어딥니까. 국민을 대표하는 의사당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 국가이고, 우리는 주권자를 대변하는 사람이요. 그런데 어디다 대고 호령입니까."

의사당은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법 위에 군림했던 무소불위의 집단이었다. 한 참 후 김형욱이 앞으로 나왔다.

"존경하는 김대중 의원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의원님들 죄송합니다. 질책을 듣고 나니 제가 경솔했던 것 같습니다."

김대중은 부당한 것을 참고 넘기지 않았다. 무엇이든지 정면으로 돌파했다.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 그날 이후 김형욱은 "제대로 된 정치인은 김대중 밖에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 게릴라들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일어났다. 게릴라들은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해 왔다. 총격전 끝에 차례로 사살됐고, 한 사람만 붙잡혔다. 김신조라는 이름의 게릴라는 텔레비전에 나와서 거침없이 내뱉었다.

"박정희 멱을 따러 왔수다."

그러나 무장 게릴라들은 결과적으로는 박정희의 정치적 목숨만을 연장시켰다. 북한 도발을 안보 위기로 포장하여 장기 집권을 획책했다. 우선 독재자 박정희 주변에서 3선 개헌 이야기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여당 간부들은 비상시국이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다. 비상시국의 끝은 당연히 3선 개헌이었다. 지난 제7대 총선에서 대대적인 부정 선거를 통해 개헌 의석을 확보한 목적이 바로 3선 개헌이었다. 어쩌면 올 것이 오고 있었다.

김대중은 지난 선거 때 이미 박정희의 3선 개헌 음모를 폭로했다. 박정희는 강력하게 부인했지만 결국 본인 입으로 3선 개헌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김대중은 어떻게 그런 일들을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관찰과 성찰'이었다.

훗날 김대중은 사안이 엄중할수록 "현미경 같이 세밀하게 검토하고, 망원경 같이 넓고 크게 생각하라"고 말했다. 관찰할 때는 현미경을, 성찰할 때는 망원경을 동원했다. 박정희를 예단하기 위해서 이승만을 비롯하여 국내외 독재자들을 살폈다. 그중 박정희와 유사한 과거와 성격을 지닌 독재자의 행적을 들여다보고 '미래의 박정희'를 알아 맞췄다.

실제로 김대중은 1994년 7월 북한 주석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도 북한 내부를 정확히 들여다봤다. 단적인 예가 아들 김정일이 주석 직을 승계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견한 것이다. 세계 모두가 김정일의 주석 직 승계를 예상하며 그 시기만을 재고 있을 때 김대중만은 이를 부정했다.

결국 김대중의 예상은 적중했다. 김정일은 인민들이 굶주리고 있는 판에 행정부 전체를 책임지는 주석 직이 부담스러웠고, 주석 직을 폐지하여 인민들에게 아버지를 숭모하는 모양새를 갖췄던 것이다. 어떻게 그걸 예견했냐고 물었다. 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북한을 깊게, 침착하게 들여다봤습니다."

정국은 3선 개헌을 둘러싸고 날 선 공방을 거듭했다. 신민당을 중심으로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7월 19일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시국 연설회가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김대중은 그날 연사였다. 연락을 끊고 호텔에 머물며 원고를 작성했다. 밤새 읽고 또 읽고, 고치고 다시 고쳤다.

효창운동장 일대는 청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김대중은 '3선 개헌은 국체의 변혁이다'는 주제의 연설을 했다. 우선 황소 이야기부터 꺼냈다. 황소는 공화당의 상징이었다.

"조간 신문을 보니까 경기도 안성에서 미친 황소 한 마리가 주인 내외간을 마구 뿔로 받아 중상을 입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황소를 때려잡으려고 몽둥이를 들고 나섰지만 잡지 못해서 마침내 지서 순경이 와 가지고 카빈총을 다섯 방이나 쏘아서 기어이 때려잡았습니다. 나는 이 신문을 보고 '과연 천도가 무심치 않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왜? 대한민국에서 황소를 상징으로 한 공화당이 지금 미쳐 가지고 국민 주권을 때려잡을 3선 개헌 음모를 하니까 미물 짐승인 황소까지 같이 미쳐서 주인한테 달려든 것이다, 이것이에요.

3선 개헌을 반대하는 데모가 지난 방학 전에 전국에 퍼졌습니다. 데모를 제일 치열하게 한 데가 어디냐, 서울이 아닙니다. 경상도, 정권의 본고장인 경상도에서 데모를 제일 치열하게 했어요. 그것도 박정희 씨가 나온 경상북도라 그 말이여. 대구서는 대학교뿐만이 아니라 모든 고등학교가 총동원됐어요.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박정희 씨가 대통령 그만두고 나면 그 대학교 총장을 할 것이라는 영남대학교 학생들의 데모 구호가 재미있다 그 말입니다. 무어라 했느냐? '미친 황소가 갈 길은 도살장뿐이다' 그랬다 그 말입니다."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연설은 과연 김대중"을 확인시키는 명연설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국 집회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공화당은 3선 개헌을 서둘렀다.

당시 공화당은 개헌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지만 개헌안 통과는 불확실했다. 야당의 거센 저항도 부담이었지만 3선 개헌에 대한 여론이 워낙 나빠서 당내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야당 의원까지 돈으로 매수했지만 개헌안 처리는 자신할 수 없었다. 비밀 투표를 하면 통과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1969년 9월 14일 새벽, 공화당 의원들이 속속 국회 제3별관 특별위원회실로 들어섰다. 실내는 깜깜했다. 국회의장 이효상이 들어서자 비로소 불이 켜졌다. 공화당과 무소속 의원 122명이 모였다. 이효상은 제4차 본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개헌안을 상정하고 제안 설명은 유인물로 대체했다. 의원들 투표가 이어졌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새벽에 그림자극이 연출되고 있었다. 국민을 속이고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사기극이었다.

이날의 '거사'는 25분 만에 끝났다. 새벽 2시 53분, 5·16 쿠데타가 일어난 시각과 거의 같았다. 이 역시 '헌정 쿠데타'였다. 의장은 의사봉이 없어 주전자 뚜껑으로 책상을 쳤다고 한다. 늦게 이를 알아챈 신민당 의원들이 별관으로 몰려갔다. 공화당 의원들은 뒷문으로 도망쳤다. 야당 의원들은 마이크와 집기를 집어던지며 울부짖었다.

별관에서 여당 의원만의 날치기 처리는 국회법을 완전히 위반한 것이었다. 야당에는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에서, 기자들도 없이 안건을 처리해 버렸다. 3선 개헌안은 다시 국민 투표에 부쳐졌다. 그리고 압도적 지지로 통과되었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지 않는 나라에서 국민 투표의 결과가 뻔했다. 공무원이 총동원되어 부정을 저지르니 하나마나였다.

박정희의 3선을 향한 길이 닦였다. 야권은 다시 뭉쳐서 싸워야 했다. 신민당의 잠재적 대통령 후보는 유진오 총재였다. 그런데 갑자기 유 총재가 뇌동맥경련증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총재직을 사임했다. 신민당은 임시 전당 대회를 열어 유진산을 총재로 선출했다.

원내 총무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갈수록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젊은 후보가 나서서 야당의 체질을 바꾸고 새바람을 일으키길 기대했다. 당내에서 '기수'로 등장할 사람은 김영삼 외에 김대중과 이철승이었다. 김영삼은 주류인 진산계가 밀고 있었다. 총재 유진산은 자신이 출마하고 싶었지만 여론이 워낙 좋지 않자 후보 지명권을 달라고 했다. 유진산은 당연히 주류인 김영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김대중은 이에 단호히 반대했다.

대통령 후보는 결국 대의원 투표로 결정 나게 되었다. 김영삼은 대세론으로 김대중을 압박했다. 언론은 일찌감치 김영삼의 승리를 점쳤다. 투표는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당내 우호적인 인사들도 후보 사퇴를 권할 정도였다. 그러나 비주류 김대중은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당내 계파의 세 싸움 보다는 직접 표밭을 파고들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았다. 대의원들은 김대중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정희와의 전쟁에서 이긴 무용담은 아직 살아있었다.

'김대중이라면 박정희의 기를 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당내의 밑바닥은 전혀 다른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민심이기도 했다. 김대중은 투표 전날 밤까지 숙소를 돌며 대의원들의 손을 잡았다.

ⓒ프레시안(손문상)

1970년 9월 29일 전당 대회가 열렸다. 그 날 아침 이색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김대중 측은 애드벌룬을 띄우고 대회장 벽면에는 김대중 포스터를 촘촘히 붙였다. 어깨띠를 두른 수백 명이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을 에워쌌다. 그리고 김대중을 외쳤다. 그 맨 앞에 원로 의원 정일형이 피켓을 들고 있었다.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김대중은 그런 정일형의 모습을 평생 반추했다. 그날의 풍경은 욕설과 폭력으로 얼룩졌던 과거 전당 대회의 모습이 아니었다. 신명이 묻어나오는 축제였다. 김영삼 측에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유쾌한 사건이었다. 주류 측은 이미 승리에 취해 있었다.

투표 직전 이철승은 사퇴 선언을 하고 퇴장해 버렸다. 1차 투표 결과가 발표됐다. 재적 885명 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였다. 장내가 술렁거렸다. 무효표가 82표였으니 2차 투표는 알 수 없었다. 무효표는 모두 이철승 계였다. 그 표들을 흡수해야 했다. 이철승 측에서 사람을 보내와 '다음 총재 선출할 때 이철승을 지지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주면 김대중을 밀겠다고 했다. 김대중은 명함에 각서를 써줬다. 2차 투표 결과 역전극이 벌어졌다.

"재적 884명 중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무효 16표."

김대중은 과반을 넘어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었다. 40대 대통령 후보였다. 김대중은 박정희와 대결을 펼치게 됐다. 박정희가 피하고 싶었던 단 한 사람, 그가 갑옷을 입고 나타났다. 운명이었다. 풍운이 몰려오고 있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펴낸 책으로는 산문집 <뿔난 그리움>(꿈엔들 펴냄), 동화집 <벌거벗은 수박도둑>(사계절 펴냄). 도법 스님 순례기 <사람의 길>(들녘 펴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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