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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김대중 콤플렉스', 그 근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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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김대중 콤플렉스', 그 근원은…

[김대중 평전 '새벽'·9] 김대중 대 박정희

김대중과 박정희는 1958년 만날 뻔했다. 김대중은 인제 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 등록도 못하고 쫓겨났고, 하도 억울해서 인제군청 근처에 있는 사단장 관사를 찾아갔다. 누군가 붙들고 호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단장은 외출하고 없었다. 발길을 돌리며 당번병에게 물었다.

"사단장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박정희 장군이십니다."

두 사람은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만일 두 사람이 만났다면, 만나서 34세 김대중과 41세 박정희가 술 한 잔 했다면, 더러운 세상이라며 의분을 나눴다면 우리 현대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육군 소장 박정희는 정치 신인 김대중을 어떻게 맞이했을 것인가. 그러나 운명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두 사람은 쫓다 쫓기고, 물다 물렸다. 한 사람이 능동이면 한 사람은 수동이어야 했다.

소문이 이상했다. 대통령 박정희가 김대중을 낙선시키려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야가 공천에 부심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소문은 갈수록 구체적이었다.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와 내무부 간부들을 모아놓고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여당 후보 20명이 낙선을 해도 좋으니 김대중만은 떨어뜨리라."

그러자 주변은 물론이고 동료 의원들까지 걱정을 했다. 일부 신민당 간부들은 전국구를 배정받거나 아예 지역구를 옮겨 야성(野性)이 강한 서울 지역에서 출마하라고 권했다. 처음엔 김대중도 겁이 났다. 그러나 깊이 생각할수록 회피할 일이 아니었다. 김대중은 도깨비가 나올까봐 무서웠지만 가야할 길은 담대하게 걸어갔다. 목포에서 보란 듯이 출마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여당 후보로 육군 소장 출신 김병삼을 내세웠다. 체신부 장관을 지낸 그는 지역 사회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진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의 대항마로 박정희가 직접 낙점했다. 대통령이 이토록 김대중을 꼽아 낙선 공작을 지시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김대중은 6대 국회에서 가장 열심히 의정활동을 했다. '말 잘하는 김대중'은 사실 이때 완성되었다. 정부가 새로운 정책을 입안하면 반드시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국회도서관을 가장 많이 활용한 정치인이었다. 김대중이 발언을 하면 휴게실에서 바둑을 두던 의원들도 회의장에 들어왔다. 다 진 바둑을 던지지 않고 버티면 "김대중 말이나 듣자"며 돌을 거두라고 재촉했다.

김대중의 질의는 깊이가 있으면서도 매서웠다. 발언을 할 때면 철저하게 준비했다. 여론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면밀히 검토했다. 장관들은 쩔쩔 맸다. 그때마다 박정희는 탄식하며 다그쳤다.

"그 많은 장관들이, 그 많은 인재들이 어찌 김대중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하는거요. 한두 번도 아니고 어찌된 일이오."

김대중은 국회에서 일문일답을 선호했다. 김대중이 나서면 장내는 긴장했다. 일문일답으로 진행하면 '적당히'가 통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군사 정권의 실정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그럴 때마다 박정희는 곤경에 빠졌다.

박정희는 김대중을 구체적으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박 정권에게 김대중의 '입'은 실로 두려웠다. 김대중은 거침이 없었고 매사에 당당했다. 박정희는 사람 보는 눈이 비교적 정확했다. 그리고 동물적인 정치 감각을 지녔다. 머리를 들면 그 누구든 응징했다. 철저한 견제로 그 밑에 2인자가 없었다. 박정희에게는 김대중을 언젠가는 정적으로 맞아야 한다는 불안감이 밀려들었을 것이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다 역시 버림을 받은 김형욱은 미국 망명 중에 이런 말을 했다.

"김대중 씨에 대한 박정희 씨의 감정은 단순한 정적 관계가 아니라 깊은 열등의식을 바탕으로 한 증오에 가까운 것이다."

박정희에게 대중적 인물은 여와 야를 가리지 않고 위험했다. 박정희는 정당을 떠나 나라를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은 그런 박정희에게 너무나 똑똑했다. 빼어난 대중 연설과 해박한 지식은 '불온한 무기'로 보였을 것이다. 박정희의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그물에 김대중이 걸려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을 대국민 선동술에 능한 요사스런 정치꾼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영구 집권을 획책했던 박정희, 그에게 '김대중 죽이기'는 열등감에서 뿜어져 나온 본능적 자기 방어였을 것이다.

지방자치제도가 없었기에 당시 대통령의 '말씀'은 지상 명령이었다. 대통령이 특정인을 지목하여 낙선을 지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막상 출마를 했지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정부 여당은 마음만 먹으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다. 선거에서 지더라도 부정 투·개표로 간단히 뒤집어 버릴 수도 있었다. 엄청난 위기였다. 그러나 김대중의 각오는 비상했다.

'부정을 저지르면 정권 자체가 위기에 직면하는, 그런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면 당선도 가능할 것이다.'

선거전이 치열해지자 박정희가 목포로 내려갔다. 청중 2만 명을 모아놓고 지원 연설을 했다. 당시 법으로는 대통령과 공무원들이 선거 지원 연설을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법 위에 있었다. 목포 선거구는 김대중과 박정희의 대결장으로 변해 버렸다. 박정희는 김병삼 후보가 당선되면 목포를 적극 개발하겠다고 공약했다. 그것은 최고 통치자의 협박이기도 했다. 거꾸로 뒤집으면 김대중이 당선되면 국물도 없다는 얘기였다.

선거판은 극도로 혼탁했다. 목포 뿐 아니라 전국에서 여당의 부정 선거가 자행되고 있었다. 김대중은 목포에 온 박정희에게 공개적으로 물었다.

"박 대통령 본인이 나서서 부정 선거를 부추기는 것은 3선 개헌에 목적이 있지 않은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리를 하는 것은 개헌 말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 이에 대해 책임 있는 해명을 하라."

박정희는 이튿날 연설에서 반박했다.

"3선 개헌은 절대 안한다. 3선 개헌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3선 개헌한다는 주장은 순전히 정치적인 모략이다."

박정희의 즉각적인 반응은 의외였다. 그것은 3선 개헌을 심중에 두고 있음이었다. 김대중이 마음을 정확히 읽어내자 박정희는 당황했다. 그런 김대중이 점점 더 싫어졌다.

박정희의 노골적인 지원에도 목포 선거는 접전이었다. 박정희는 남쪽에서 올라오는 보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예 목포에서 국무회의를 열었다. 청와대를 유달산 기슭으로 옮긴 셈이었다. 회의 주제는 오직 '목포 발전'이었다.

그런 후에 갑자기 경제기획원 장관 장기영은 목포에 수많은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다른 장관들도 경쟁적으로 개발 계획을 쏟아냈다. 김병삼이 경영하는 <목포일보>는 이를 받아서 보도했다. 신문은 집집마다 뿌려졌다. <목포일보>는 과거 김대중이 경영했던 신문이었다.

목포는 부풀어 올랐다. 인구 17만 명의 도시에서는 날마다 축제가 열렸다. 장밋빛 공약이 쏟아졌다. 대낮부터 술 냄새가 진동했다. 정부 여당은 모든 화력을 쏟아 부었다. 그들은 각하의 자존심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용감했다. 목숨을 내놓았다. 목포 시민들의 자존심에 호소했다.

"나는 지금 박 정권의 독(毒)에 서린 칼날 앞에 서 있습니다. 이 약한 나 하나를 놓고 비수를 들고, 칼을 들고, 도끼를 들고, 낫을 들고 덤비고 있습니다. 나는 권력도 금력도 신문도 방송도 없습니다. 나를 구하는 길은 오직 시민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나는 권력도 돈도 없지만 나에게는 여러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구할 수 있습니다. 유달산에 넋이 있으면, 삼학도에 정신이 있으면, 영산강에 뜻이 있다면 나를 보호해 달라고 목포 시민 여러분과 같이 호소하고 싶습니다."

김대중은 비장하게 외쳤다. 본인이 스스로 전율할 정도였다. 청중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연설이 끝났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악수 한번 하려고 몇 시간씩을 기다렸다. 여학생들은 블라우스에 사인을 받았다. 그걸 그대로 입고 학교에 갔다. 손수건을 내밀고 모자를 벗어 건넸다. 목포역 앞에 있는 선거 사무소로 사람들이 몰려와 김대중을 연호했다. 여당의 선거 운동이 집요할수록 김대중을 향한 열기는 높아만 갔다. 유세장마다 거대한 사람의 꼬리가 김대중을 따라 움직였다.

어느새 선거판을 '목포의 전쟁'이라고 불렀다. 언론들은 취재 기자를 늘렸고, 목포의 접전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외신들이 관심을 보이고, 주한 미 대사관에서도 직원을 상주시켰다.

어느 때부턴가 시민들은 "박 대통령이 왜 김대중을 죽이려 하느냐"며 의아해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수군거렸다.

"대통령감이니 싹을 미리 잘라버려는 수작 아니겠는가."

선거전은 '지역 개발론 대 큰 인물론'으로 펼쳐졌다. 시민들은 김대중을 키우자며 유세장을 찾았다. 김대중 연설에 수만 명이 모였다. 목포는 끓어올랐다. 건드리면 4월 혁명 때의 마산보다 더한 시민들의 궐기가 있을 것 같았다. 민심은 김대중이었다. 하지만 선거에는 이기고 개표에서 질 수도 있었다. 바로 투·개표 부정이었다. 여당 측에서 개표 부정을 획책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선거 운동이 끝났다. 늦은 밤 유달국민학교에서 개표가 시작되었다. 그날 밤 비가 내렸다. 그 빗속을 뚫고 시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만5000명이 개표장을 완전히 둘러쌌다. '마지막 밤'을 지키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다. 김대중은 몰래 인파 속에 묻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시민의 힘을 보았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주먹을 쥐었다.

개표가 시작되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불이 나갔다. 정전이었다. 여기저기서 소리쳤다. 비명처럼 날카로웠다.

"불을 켜라."
"표를 지켜라."

실내에 조명 라이트가 켜졌다. 국내 및 외국 방송사의 카메라 불빛이 실내를 비췄다. 참관인들도 준비한 전등을 켰다. 밖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은 일제히 "우~" 고함을 질렀다. 어둠을 삼킬 듯했다.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민심의 뇌성이었다.

다시 전기가 들어왔다. 그러다 다시 불이 나갔다. 시민들은 다시 고함을 질렀다. 그날 밤 세 차례의 정전 사태가 있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끝까지 흩어지지 않고 표를 지켜냈다.

ⓒ프레시안(손문상)

마침내 개표가 완료되었다. 김대중 2만9279표, 김병삼 2만2738표. 6000표가 넘게 이겼다. 목포의 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다음날 트럭에 올라 시내 구석구석을 돌았다.

"목포 시민 여러분, 여러분의 힘으로 저는 당선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영웅적인 투쟁이 승리했습니다. 여러분은 목포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살렸습니다."

김대중은 죽기로 싸웠다. 그리고 마침내 살아서 호남선에 올랐다.

김대중은 이겼지만 선거는 공화당의 압승이었다.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했다. 이로써 개헌은 언제나 가능해졌다. 김대중의 개헌에 대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하지만 박정희의 우려도 서서히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김대중이 떠오르고 있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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