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호를 처음 만난 것은 1951년 부산에서였다. 이희호는 대한여자청년단의 외교국장이었고, 김대중은 청년 실업가였다. 김대중의 눈에 비친 이희호는 맑은 피부에 이지적인 눈매를 지닌 활달한 여성이었다. 웃는 모습이 티 없이 맑았다.
그녀는 대학생들이 주축인 면우동지회의 회원이었다. 김대중은 그 모임에 준회원으로 가입하여 이희호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부산의 교외인 감천의 오솔길을 함께 걷기도 했다. 서로의 꿈과 미래를 펼쳐보였고, 조국의 암담한 현실을 걱정했다. 그 후 이희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김대중은 정치에 뛰어들었다.
1959년 여름 우연히 이희호를 다시 만났다. 김대중은 인제 재선거에서 떨어져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시절이었다. 잔인한 시간들을 남 몰래 흘려보내고 있을 때였다. 종로 2가 쯤을 걷고 있는데, 저쪽에서 걸어오는 여인이 바로 이희호였다. 처지가 곤궁한지라 일순 숨고 싶었다. 그런데 숨을 곳이 없었다. 그렇게 이희호와 재회를 했다. 근처 다방에서 서로 옛날을 더듬었다. 이희호는 '여인'으로 변모해 있었다. 더욱 지성적이고 세련되어 보였다.
이희호는 다시 해외 연수를 떠났다가 1961년 귀국했다. 이때부터 서로를 찾았다. 김대중은 인제 보궐 선거에서 생애 처음으로 당선되었지만 5·16 쿠데타로 모든 것이 군홧발에 밟혀 버렸다. 집에는 노모와 동생들, 두 아들이 있었다.
정치적 야망보다는 하루의 생존이 더 중요했다. 이희호를 찾아가 그녀가 사주는 밥과 술을 넘겼다. 다시 정치 낭인이 되어 떠돌았다. 세상은 무정했다. 명대변인이란 명성도 당선의 환호도 신기루 같았다. 이희호는 그런 김대중을 조용히 품었다.
1962년 봄날 김대중은 몹시 아팠다. 앓아누워 꼼짝을 하지 못했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이희호를 만나지 못했다. 아프면 서럽다. 그래서 누군가를 간절하게 찾는다. 이희호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사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곧바로 찾아갔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수척한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이희호는 그 말을 듣고 울먹거렸다. 김대중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날 3월의 탑골공원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이희호는 홀아비 김대중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사랑에 조건이 있을 수 없지만 준수한 용모와 내면의 정의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사랑에 겨운 김대중은 말했다.
"나는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목표가 있습니다.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꽃 피우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당신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갑자기 타오르지 않았다. 서서히, 은은하게, 고요히 스며들었다. 그리고 평생 서로를 어려워했다. 이희호가 곁에 있음에 김대중은 흔들리지 않았다. 김대중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악의 유혹에 흔들릴 때, 죽음을 앞에 두고 변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할 때 아내 이희호를 생각했습니다. 평생 정의롭게 내 곁을 지킨 아내를 실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이희호가 김대중을 지킨 셈이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살아가면서 더욱 깊어졌다. 이희호의 주변 사람들이 결혼을 적극 만류했지만 그것은 티끌 같은 것이었다. 신랑은 집권 여당의 대변인을 지낸 38세의 정치인이었고, 신부는 40세의 여성계 지도자였다. 1962년 5월 10일 이희호의 외삼촌댁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넓은 한옥 대청이 식장이었다. 대신동 전셋집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기존 정치인들은 정치 활동을 금지 당했다. 사방을 둘러봐도 총과 칼이 번득일 뿐이었다. 김대중도 숨죽이고 있었다. 그러던 1963년 새해 '고' 씨 성을 가진 중앙정보부 간부가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박정희 정권은 새 정당을 창당하면서 인재들을 모으고 있었다. 나름대로 덕망과 실력을 겸비한 인물을 물색한다고 했다. 그들의 아지트인 반도호텔에서 정보부 간부를 만났다. 짐작은 했지만 신당 참여를 권유했다.
"당신이 실력 있고 유능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이 아니라 그 이상의 재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용하고 우대할 테니 우리와 함께 갑시다. 사람에게는 때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김대중은 망설임 없이 이를 거부했다.
"나는 당신들이 쓰러뜨린 민주당의 대변인을 지낸 사람이오. 당신들은 장면 정권이 부정부패하고 나쁘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나는 장면 정권이 가장 좋은 정권이니까 지지해달라고 말하고 다녔소. 이제 거꾸로 당신네가 제일 좋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면 국민들이 나를 뭘로 보겠습니까."
정보부 간부는 창당 책임자인 김종필을 만나서 얘기라도 한번 나눠보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냥 일어섰다. 정보부 간부가 욕설을 퍼부었다.
"개 같은 자식, 주둥이만 살아서 지랄하고 있네."
옆방에서는 김종필이 면담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보면 이 때 김대중은 참으로 대단한 결심을 했다. 현실은 궁핍했고, 앞날은 극히 불투명했다. 일단 군부가 쿠데타를 성공했기에 당장엔 다른 세력이 이를 뒤엎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김대중은 새 정당에 몸담으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회유를 즉석에서 의연하게 물리쳤다. 정치를 영달의 도구로 활용할 생각이었다면 절대 뿌리칠 수 없는 제의였다. 김대중은 가장 어려운 처지에 내몰렸음에도 자신의 양심대로 행동했다. 서슬 퍼런 군부 세력의 영입 제의를 단호히 배격한 것은 작은 일화가 아니다. 우리는 이때부터 정치인 김대중을 새롭게 봐야 했다.
1963년 2월 정치 활동 규제 대상자에서 풀려났다. 김대중은 옛 동지들과 민주당을 재건했다. 그 해 7월 창당 대회를 열고 박순천 여사를 당수로 선출했다. 김대중은 대변인을 맡았다. 제5대 대통령 선거가 10월 15일 실시되었다. 박정희와 윤보선 후보가 박빙의 접전을 벌였다. 박 후보가 15만여 표 차이로 신승했다. 박 후보는 전라도에서 35만 표를 더 얻었다. 호남이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후 대통령 박정희는 호남을 철저히 소외시켰다. 섬처럼 고립시켜 차별했다.
김대중은 이어서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목포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섰다. 정치인으로 그 명성을 남녘에까지 떨쳤으니, 이름의 무게가 상당했다. 김대중은 이렇게 외쳤다.
"목포의 아들인데도 객지를 떠돌았습니다. 이제야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고향에서 패하면 갈 곳이 없습니다. 저를 키워주십시오."
선거는 혼전이었다. 당시 전라도민은 박정희와 공화당에 우호적이었다. 그래도 김대중은 미래의 정치인이었다. 김대중을 키워야 한다는 지역 정서가 일어났다. 그의 유세는 이때부터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유세장마다 청중들이 열광했다. 초등학교 시절 북교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김대중의 유세를 들은 작가 김양호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연설이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고 붉게 변해갔다. 목울대가 꿈틀거리고 이마에 핏대가 서고 머리에 수건을 질끈 묶은 사람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김대중, 김대중을 연거푸 외치고 있었다. 사이사이 오메, 잘생긴 거, 인물이여, 인물 났네, 잘생긴데다 똑똑하니 한자리하고도 남겄네, 아낙네나 할머니나 처녀나 가릴 것 없이 여자들 입에서 그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를 돌아봤더니 조금이라도 잘 보려고 앞으로 밀려드는 시람들 머리통으로 교문 쪽이 바글바글했다. 까치발을 한 사람, 자전거 위에 올라간 사람, 나무 위에 올라간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늑목이며 미끄럼틀, 철봉 위에도 사람들이 잔뜩 올라가 있었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학교 건물 옥상에서도 사람들 머리가 새카맣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11월 22일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김대중은 나에게 비보를 접하고 슬피 울었다고 말했다. 치열하게 전개되던 선거의 한 복판에서 그를 애도하며 울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사실 김대중은 '한국의 케네디'가 되고 싶어 했다. 당시 케네디는 변화를 외쳐 희망을 안겨준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정치로 세상을 바꿔보려는 김대중의 우상이었다. 그와 동시대에 지구촌에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김대중에게는 희망이었다. 케네디는 보이지 않는 후원자였던 셈이다. 김대중은 목포에서 압승을 거두고 마침내 대망의 의사당에 입성했다.
박정희의 민정 시대, 그것이 제3공화국이었다. 박 정권은 첫 과제로 한일 국교 정상화를 꼽았다. 박 정권은 이미 군정 시대에 대일 청구권에 대해서 일본과 합의를 봤다. 일본이 무상 경협 3억 달러, 정부 차관 2억 달러, 상업 차관 1억 달러를 제공키로 했다.
야당은 적극 반대했다. 야당과 각계 대표 200여 명이 '대일 굴욕 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국교 정상화 관련 '무조건 반대'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국익을 위해서 일본과의 수교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국제 사회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었다. 신민지 국가들이 침략자들과 수교를 하는 것은 침략 행위를 용서해서가 아니라 국익을 위해서였다. 강해져서 다시는 침략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선진 기술은 받아들여야 했다. 당시 일본은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의 성공을 질투하며 그저 바라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야당은 일제히 반대했다. 당시 제1야당인 민정당의 당수 윤보선은 한일 회담을 매국 행위라고 질타했다. 어느 날 보니 김대중 홀로 '조건부 찬성'을 하고 있었다. 모든 비난이 김대중에게 쏟아졌다. 박 정권보다도 더 악질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김대중은 여당 첩자다. 사쿠라(여당에 매수된 야당 정치인) 중에서도 왕사쿠라다."
박 정권으로부터 거액을 받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발행 은행과 수표 번호까지 나돌았다. 그래도 김대중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과 수교는 필요하다. 다만 수교 조건에 불이익이 없도록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김대중의 주장은 강경파들의 선명성 경쟁에 묻혀 버렸다. 아내는 사쿠라 남편을 두었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여성 운동의 동료들로부터는 대놓고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첩자의 아들이라고 따돌림을 당했다.
사쿠라로 낙인이 찍히면 정치 생명이 끝나는 시절이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연일 반대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6월 3일 절정을 맞았고 정부는 서울 일원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6·3 사태'였다. 하의도의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왔다.
"폐일언(蔽一言)하고……. 전도가 바닷길처럼 양양해야 할 아들이 사쿠라라고 불리고 있으니 도대체 어인 일인가? 세상에서 손가락질 당할 일을 왜 하고 있는가?"
김대중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프레시안(손문상) |
그래도 김대중의 선택은 옳았다. 옳은 길이면 김대중은 옳다고 얘기했다. 시류에 타협하거나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조류였다. 박 정권은 무조건 밀어붙이고, 야당은 무조건 반대만 하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히로시마 한국인 피폭자, 한국인 강제 징용, 종군 위안부, 사할린 교포 귀환, 독도 영유권 등 민족사의 예민한 문제들을 놔둔 채 협정을 맺어 버렸다. 수교를 전제로 이런 조건들을 차근차근 따졌다면 한일 두 나라가 훨씬 건강한 관계로 발전했을 것이다. 김대중은 야당이 감정 보다는 '어떻게'라는 명제에 천착했어야 한다며 땅을 쳤다. 반대를 위한 반대, 투쟁을 위한 투쟁을 김대중은 가장 경계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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