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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평생 가슴에 묻은 그 여인은…

[김대중 평전 '새벽'·6] 세 번의 실패 그리고 슬픔

가슴에 묻은 여인

김대중은 정계에 뛰어들었다. 1954년 목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했다. 목포 지구 노동조합이 지지를 약속했기에 기대가 컸다. 하지만 관권이 개입하여 이를 간단히 무력화시켰다. 결과는 10명의 후보 중에서 5등으로 낙선했다. 무소속의 한계를 절감했다. 정당이란 기반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체득했다.

이듬 해 4월 상경했다. 하의도에서 공부를 하러 목포에 갔듯이, 이번에는 순전히 정치를 하러 서울로 갔다. 사업은 순차적으로 접었다. 김대중은 한국노동문제연구소에 출근하며 노동 문제에 관련한 글을 썼다. 아내는 미장원을 차렸다.

1956년 6월 가톨릭의 품에 안겼다. 명동성당 노기남 대주교실에서 김철규 신부가 의식을 집전했다. 세례명은 '토머스 모어'였다. 장면 부통령이 대부(代父)였다. 신부가 말했다.

"토머스 모어는 영국의 사상가요 정치가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 분리해 나온 헨리 8세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순교를 택한 분입니다."

김대중은 섬뜩했다. 훗날 김대중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도 있는데 왜 목이 잘린 사람을 세례명으로 주는지 야속했다고 술회했다. 대법관 토마스 모어는 절대 권력자인 헨리 8세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두 번째 아내의 딸이 왕위 계승자임을 공포하는 법령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왕의 좋은 신하보다는 기꺼이 하느님의 착한 종이 되었다. 반역죄로 재판을 기다리며 런던탑에 갇혔다. 그를 아끼는 지인들이 찾아와 왕과 타협해서 목숨을 건지라고 했지만 이를 거부했다. 죽음을 기다리며 딸에게 편지를 썼다.

"하느님께서 내 잘못이 아니라면 결코 버림받은 자가 되게 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하느님께 내 희망을 걸고 내 전부를 그분께 바치겠다."

토마스 모어는 가장 최근의 성인이며 역사에 시퍼렇게 살아있다. 무슨 암시였을까. 김대중의 생도 험하기만 했다. 어떤 회유에도 양심을 지켰고, 감옥에서 하느님을 찾았으며, 무엇보다 역사 속에 살아있는 정치인이 되고 싶어 했다. 토마스 모어를 뒤지면 놀랍도록 김대중의 삶과 닮아있다.

김대중은 대부 장면을 흠모했다. 언행은 신중했고 모습은 온화했다. 사심이 없었고 양심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해 9월 민주당에 입당, 장면이 속해 있던 신파에 합류했다.

민주당 입당 사흘 만에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이 일어났다. 전당 대회 연설을 마치고 퇴장하는 장면을 향해 괴한이 권총을 쐈다. 범인은 제대 군인이었다. 그 배후는 집권 세력이 분명했다. 김대중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가 고개 숙여 한참을 울었다.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섰다. 민주당 후보로 다시 목포에서 출마하고 싶었지만 현역인 정중섭이 버티고 있었다. 결국 강원도 인제에서 출마하기로 했다. 당시에는 '지역 감정'이라는 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해 볼 만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군인들은 자유당 학정의 직접적인 피해자들이었다. 자유당 정권의 실상을 제대로 알린다면 승산은 충분하다고 여겼다.

출마하려면 후보 등록을 해야 했다. 후보 등록에는 주민 100명 이상의 추천이 있어야 했다. 중복 추천은 허용되지 않았다. 김대중은 넉넉하게 130명의 추천을 받아 인제 군청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을 마쳤다. 거리에 벽보를 부치고 현수막을 내걸었다.

그런데 다음 날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등록이 무효 처리되었다는 통보가 왔다. 김대중과 자유당 후보를 중복 추천한 사람이 무려 70명이나 된다는 것이었다. 공작이었다. 군청 공무원과 경찰이 추천서를 일일이 들춰보고 김대중을 추천한 주민들을 찾아가 자유당 후보도 추천토록 했다.

다시 추천을 받아야 했다. 등록 마감까지는 하루가 남아 있었다. 주민들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고 추천을 부탁했다. 그런데 어느 집이건 추천서에 찍을 인감도장이 없었다. 이장들이 비료 배급에 필요하다며 몽땅 걷어가 버렸다. 할 수 없이 "김대중 후보를 추천한다. 김 후보 측이 도장을 새겨 날인해도 무방하다"는 문서를 만들어 손도장을 찍게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도장을 새길 수가 없었다. 어느 도장방에 들러도 고개를 저었다. 경찰들이 이미 손을 썼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장을 새겨야 했다. 가장 손쉽게 도장을 새길 수 있는 재료를 찾아야 했다. 바로 호박 꼭지였다. 운동원들과 함께 묵은 호박을 구해서 호박에 이름을 새겼다. 바로 한국 선거 운동사에 기록된 '호박 도장'이었다.

후보 등록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다. 선거를 치르려면 서울에서 준비할 것이 많았다. 그런데 다시 등록이 취소됐다는 연락이 왔다. '호박 도장'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곧바로 지프차에 올랐다. 마음이 급하니 길은 더 험하고 멀었다. 차가 두 번이나 뒤집혔다. 차체가 형편없이 구겨졌지만 다행히 엔진은 꺼지지 않았다.

오후 늦게 군청 선거관리위원회에 도착했다. 마침 김대중을 빼고 기호 추첨을 시작할 참이었다. 김대중은 멈추라고 고함을 질렀다. 상처투성이의 젊은이가 포효하니 장내가 일순 조용했다. 그러자 기호 추첨을 하러 나와 있던 자유당 후보가 소리쳤다.

"저 놈을 끌어내라."

경찰들이 달려들어 김대중을 붙잡았다. 김대중은 책상 다리를 붙들고 버텼다. 그걸 놓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끝내 문밖으로 던져진 김대중은 누운 채로 하늘을 보았다. 마냥 서러웠다.

'부정하고 무도한 집단에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꺾여서야 되겠는가. 저 남쪽 끝에서 가장 먼 인제로 올라와 이렇게 버려져야 하는가.'

김대중은 아내가 기다리는 하숙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내에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갑자기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그때서야 차량이 뒤집힐 때 생긴 상처들이 생각났다. 못난 몸을 어둠이 계속 가려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 차용애는 남편의 상처를 일일이 닦아주고, 마음의 상처까지보듬었다.

"옳은 길이면, 당신의 길이면 목숨 걸고 싸우세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자식 둘은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 말고 당당하게 나가세요."

봄밤이 아팠다. 먼 산에서 새가 울었다. 부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첩첩산중에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우리 서러운 밤을 누가 기억해 줄 것인가.'

그날 일은 '후보 등록 방해 사건'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다. 선거가 끝나고 김대중은 자유당 당선자를 고소했다. 이듬해 재판에서 승소했다.

다시 보궐 선거에 나갔다. 그러나 관권 부정 선거는 여전했다. 자유당 후보는 경찰서장 출신이었다. 모든 조직을 동원하여 김대중을 옭아맸다. 전라도 출신의 연설꾼을 동원하여 김대중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또 뜨내기 외지인을 추방하자며 선동했다. 결정적인 것은 군부대 내의 투표 부정이었다. 부대 책임자들이 투표 용지를 일일이 검색했다. 사실상 공개 투표였다. 김대중은 또 질 수 밖에 없었다.

김대중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검하며 희망을 품었지만 당시 접경 지역에서 야당 후보로 당선되기란 불가능했다. 사실상 낙선하러 먼 길을 떠난 것이었다. 김대중은 "해볼 만하다"고 했지만 누구나 바보짓으로 여겼다. 김대중은 자금도 부족했다. 운동원들에게 겨우 설렁탕이나 자장면을 먹였고, 주먹밥을 싸들고 유세를 다녔다. 삼륜차에 마이크를 달고 마을을 찾아 나섰다. 산이 깊어 해가 일찍 지면 달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왔다. 인제의 노인들은 지금도 그때 김대중의 처량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여당 측은 공권력을 동원하여 유세장에 주민들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다. 김대중은 "내 유세를 들어준 민간인은 고작해야 62명"이라고 말했다. 오죽 청중이 모이지 않았으면 이토록 헤아렸을 것인가. 그래도 김대중은 포기하지 않았다. 텅 빈 유세장에서 하늘에 대고 연설을 했다.

그것은 어릴 적 '야생 오리 길들이기'와 같았다. 진심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진심은 알렸는지 몰라도 선거판에서는 질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선거 운동을 도왔던 정치인 김상현은 김대중이 큰 정치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제 선거' 때문이라며 이렇게 평했다.

"사람들은 이기는 것만 하는데 김대중은 지는 싸움을 스스로 선택했거든. 두 번 세 번, 계속 떨어졌지만 국민들은 김대중을 알게 되었어. 전투는 백번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겨야하지. 이것이 전략가야. 그런 면에서 뛰어난 전략가였어."

1954년 목포, 1958년 인제, 1959년 다시 인제. 세 번을 연거푸 떨어졌다. 김대중에게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쌀이 떨어졌지만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다. 사람 만나기가 무서웠다. 사람을 피해 무작정 버스를 탔고, 가다보면 또 마땅히 내릴 곳이 없었다. 청년 사업가로 그간에 쌓인 부와 명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집에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두 아들 뿐이었다.

아내 차용애가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잇단 선거 패배 이후 가슴앓이를 했다. 남편 앞에서 긴 한숨을 한 번도 쉬지 않았기에 속으로 더 아팠을 것이다. 김대중은 아내를 "선량하고 부드러운 외양 속에 바위처럼 단단한 의지를 숨겼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안으로 다졌기에 홀로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른다.

1959년 8월 28일, 가슴앓이 증세가 심해 약을 먹고 그만 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김대중은 병원을 향해 뛰쳐나갔다. 의사와 함께 집에 오자 아내는 숨져 있었다. 그러니 유언과 유서도 있을 수 없었다. 제대로 치료 한 번 못 받고 그렇게 죽음을 맞았다. 김대중은 통곡했다. 아내의 죽음 앞에 엎드려 있으니 함께 저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중 씨가 아니면 죽어버리겠다던 아내, 서울 간 남편을 기다리다 방공호에서 아이를 낳은 아내, 가족 걱정은 하지 말고 장부의 길을 가라던 아내. 돌아보면 부러울 것 없는 부잣집 딸을 데려와 고생만 시켰다. 정치를 하지 않았더라면 아내는 살아있을지도 몰랐다.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너무 많은 것을 받았는데 하나도 갚지 못했다. 김대중은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아들 홍일이가 울면서 말했다.

"아버지, 밥 안 들면 나도 안 먹을 거야."

그녀는 김대중의 말대로 '참 미련스럽게도 어진 영혼'이었다. 두 아들 교육과 생활비 걱정까지 도맡아 하면서도 고단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 여덟 번이나 이사를 했다. 셋집을 전전하다보니 집 있는 사람이 가장 부러웠다. 아내는 미장원을 해서 살림을 도왔다. 가게가 빚으로 넘어가자 집에서 손님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집에서 파마 냄새가 나는 것을 미안해했다.

아내를 포천 천주교 묘지에 묻었다. 비탈길을 내려오며 김대중은 그녀 없이는 영원히 평지가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김대중은 훗날 가장 절망적인 순간을 아내를 잃을 때라고 술회했다. 살면서 그녀를 잊을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나던 날 하얀 원피스에 양산을 쓴 모습, 어렵게 살면서 주머니를 털어 깨엿을 사다주자 풋, 하고 웃던 모습,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전쟁 중에 군고구마 장사를 하던 모습. 한없이 그리웠다. 그리고 그녀는 죽어서도 줄곧 힘이 되었다. 김대중은 차용애를 깊이 사랑했다.

ⓒ프레시안(손문상)

얼마 후에는 여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에 다니다 몸이 아파 휴학을 했는데 병명은 심장판막증이었다. 그녀를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빼어난 미모를 칭찬했다. 책을 많이 읽고 조용하고 겸손했다. 그런데 병원에서 치료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겨우 약이나 사다 먹었다. 가난했기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날마다 조금씩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다. 김대중은 동생의 죽음 앞에서 가슴을 쳤다. 회한이 한없이 밀려왔다. 동생의 이름은 미자였다.

아내와 여동생보다 더 일찍 딸이 저 세상으로 떠났다. 김대중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있었다. 차용애와의 사이에 난 첫 아이였다. 차마 묻지 못하고 있는데 친구가 지프차에 태우고 가서 산에 묻었다. 김대중은 따라오지 못하게 했다. 그 아이 이름은 소희였다. 김대중은 딸과 아내와 여동생을 일찍 떠나보냈다. 그래서 김대중이 그리는 여인상은 눈물에 젖어 있다.

대통령 김대중은 1999년 6월 토지문학관 개관식에 참석하여 치사를 했다. 그 중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그것은 김대중이 바라보는 여인상의 한 상징이다.

"저는 <토지> 주인공 용이의 애인인 월선이가 용이의 무릎 위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 그 아름다운 사랑에 많은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용이가 월선이에게 '니 여한이 없제?'라고 물었더니 월선의 대답이 '야, 없습니더'라는 대목에서 한국 사람의 한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즉 월선에게 현실적으로 임박한 죽음보다는 자기가 사랑하는 애인과의 사랑의 결합이라는 사실이 행복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실제로 김대중은 이 대목을 읽으며 슬피 울었다. 김대중의 여인을 향한 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모든 것을 바치면서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여성, 슬픈 운명을 감내하면서도 사랑만큼은 끝내 움켜쥔 여성'을 김대중은 사랑했다. 순종형의 조선 여인이 아니라, 자신이 택한 최고의 가치에는 타협하지 않는 여인을 사랑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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