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터졌다. 김대중은 서울에 있었다. 출장 중이라 광화문 근처 여관에 머물렀다. 그러나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대통령 이승만은 걸핏하면 '북진 무력 통일'을 꺼냈다. 또 국방장관은 전쟁이 나면 3일 만에 평양을 접수하고 "일주일이면 압록강에 이르러 그 물을 대통령께 진상할 것"이라고 호언했다. 실제로 신문과 방송에서는 잇단 승전보를 전했다. 전쟁 발발 사흘째 되던 날 이승만은 라디오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서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수할 테니 국민들은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날 밤 큰비가 내렸다. 모든 것을 삼킬 듯 쏟아졌다. 날이 밝아 나가보니 인민군 세상이었다. 광화문 일대는 인민군이 깔렸고, 그들이 몰고 온 육중한 탱크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김대중은 경악했다. 담화는 새빨간 거짓이었다. 대통령은 대전으로 피신했고, 정부도 수원으로 옮겨갔다. 국민들만 버려졌다. 인민군이 두렵기도 했지만 지도자들의 행태에 치가 떨렸다. 한강철교가 끊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인근 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인민재판을 목격했다. 무릎을 꿇은 한 남자 앞에서 완장을 찬 사내가 큰소리로 죄상을 열거했다. 사내가 물으니 군중이 답했다.
"이 반동분자를 어떻게 해야겠소."
"죽이시오."
그걸로 끝이었다. 남자는 어디론가 끌려갔다.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갑자기 두고 온 가족들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목포로 가야했다. 처남,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한강을 넘었다. 무작정 남쪽으로 걸었다. 수원, 온양, 장항, 군산, 김제를 거쳐 목포로 향했다.
피난민 행렬은 차마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흰 무명옷은 그을리고 바래서 흙색이었고, 아낙의 등에서는 아이가 울었다. 길마다 피난민이 넘쳐났다. 느닷없이 전투기가 나타나 폭탄을 퍼붓고 아무데서나 총알이 날아들었다. 어느 편이 쐈는지 누가 죽었는지 몰랐다. 죽음이 곁에 있었다.
목포 근처에 다다르자 장터가 나타났다. 마침 장날이어서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런데 갑자기 전투기가 나타나 기총소사를 했다. 사람들이 고꾸라지고 무명옷이 피에 젖었다. 김대중은 정신없이 근처 야산으로 뛰었다. 전투기는 따라오며 총알을 퍼부었다. 한동안 불을 뿜고는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누가 봐도 미군기였다. 슬픔과 분노가 치솟았다. 김대중은 몇 번이고 되뇌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란 말인가.'
김대중의 걸음보다 훨씬 빠르게 인민군이 남하했다. 국군은 보이지 않았다. 목포도 인민군이 장악했음을 알았지만 다시 서울로 갈 수는 없었다. 아니 어디를 가도 인민군 탱크요 깃발이었다.
서울 탈출 20일 만에 목포에 도착했다. 집 앞에 이르자 어머니가 조그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너무 말라서 아이처럼 작아 보였다. 어머니는 또 아이처럼 울었다. 집에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인근에서 가장 큰 집이라서 다짜고짜 역산(逆産) 가옥으로 지목했다. 만삭의 아내 차용애는 할 수 없이 방공호에서 아이를 낳았다. 둘째 아들이었다. 동생 대의는 한국군 군속이라는 이유로 이미 잡혀가고 없었다.
김대중도 이내 끌려갔다. 목포경찰서에서 인민군 정치보위부 장교의 취조를 받았다.
"김대중, 너는 우리 애국자를 몇 명이나 밀고했는가."
"그런 적 없습니다."
돌아오는 것은 매질이었다. 대답해도 맞고 안 해도 맞았다. 김대중은 무수히 맞았다. 그리고 목포형무소에 갇혔다.
굶주림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감방에서는 조그만 보리밥덩어리를 하루에 두 번 주었다. 허기가 지니 헛것이 보였다. 먹을 것이 눈앞에서 어른 거렸다.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체력 소모를 줄여야 했다. 엎드려 숨조차 가만가만 쉬었다. 어머니도 아내도 막 낳은 자식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먹을 것 생각뿐이었다. 흰 쌀밥에 붉은 김치, 항구에서 팔던 국밥, 생선회 등이 어른거렸다. 굶주림은 무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수감자들을 모두 강당으로 끌어냈다. 두 명씩 짝지어 서로의 팔을 철사로 묶거나 쇠고랑을 채웠다. 불려온 순서대로 강당은 차곡차곡 사람으로 채워졌다. 인민군들은 입구에 앉은 사람들부터 차례로 끌고 갔다. 이내 끌려가면 처형당할 것임을 알아차렸다. 사람들은 울부짖었다. 흉한 몰골의 수감자들이 몸부림을 쳤다. 짐승에 다름 아니었다. 남은 사람들도 온 몸을 떨며 비명을 토했다. 더러는 울음을 삼키며 쇠고랑 찬 손을 흔들었다. 20명씩 끌려 나갔다. 20명, 그리고 또 20명…….
김대중은 차례를 기다렸다. 참으로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태어나 이렇게도 죽는 수도 있구나.' 그 때서야 가족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인민군들이 어느 순간 사람을 잡으러 오지 않았다. 긴 시간이 흘렀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은 시체보다 싸늘했다. 베이면 선혈이 쏟아질 것처럼, 침묵은 예리했다.
형무소에 어둠이 슬슬 내리자 묶여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말을 하기 시작했다. 어찌된 일이냐고, 이상하다고. 인민군은 보이지 않고 지방 공산당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강당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다시 감방에 집어넣었다. 남은 자 80명, 끌려간 자 120여 명. 그렇게 생사가 갈렸다. 살아있었으니 감방도 천국이었다.
그날은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 9월 28일이었다. 인민군은 일제히 주둔지에서 철수를 서둘렀다. 목포형무소 인민군들도 수감자 모두를 처형하고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수감자를 실어 나르던 트럭이 길 위에서 고장이 났다. 누구는 운전사가 고의로 고장을 냈다고도 했다. 인민군들은 지체할 수 없었다. 다시 형무소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으로 떠났다.
감방에 갇힌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살아있으니 배가 고플 뿐이었다. 밥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늦은 밤, 밥이 들어왔는데 특식이었다. 죽은 사람 몫까지 나눠주었다. 허겁지겁 밥을 몰아넣었다. 손바닥에 붙은 밥알은 핥아 먹었다. 풍선처럼 배가 불러왔다. 그래도 한없이 들어갔다. 김대중은 "허천나게 퍼먹어서 배가 개구리처럼 튀어나왔다"고 했다. 자신은 아귀(餓鬼)였다고 술회했다.
허기를 면하고 바깥 공기를 살피니 평소와는 완연히 달랐다. 밖을 응시하고 있다가 주먹밥을 들이미는 감방의 구멍으로 손을 내밀어 지나가는 간수의 바지가랑이를 붙들었다.
"여보시오, 우린 죽게 되는 것이오."
"같은 남쪽 사람이 어떻게 남쪽 사람을 죽입니까."
인민군이 도망쳤음을 알았다. 빨리 탈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누군가 지나가며 "임출이, 임출이"하고 불렀다. 김대중은 "어이 나 여기 있네"라고 답했다. 김대중의 기지였다. 사내가 다가오자 임출이란 사람이 아파 누워있으니 빨리 문을 열라고 했다. 사내가 자물통을 부수는 소리가 났다. 안에서도 철문을 발로 찼다. 그렇게 문을 부수고 감방을 빠져 나왔다. 김대중은 소리쳤다.
"다들 도망갔으니 감방 문을 부수고 나오시오."
방마다 밖에서는 쇠뭉치로 자물통을 부수고 안에서는 감방 문을 발로 찼다. 모두가 감방을 탈출했다. 형무소 마당은 달빛이 그득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살찐 달이 떠 있었다. 한가위를 이틀 지났지만 넉넉했다. 참으로 밝고 아름다웠다.
수인복을 입고 나서면 인민군들에게 들킬지 몰랐다. 형무소에 보관된 사복을 찾아 입는데 "이 옷은 내 것이 아닌데……"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생 대의의 목소리였다. 형제가 함께 잡혀 있었는데도 서로가 몰랐다.
ⓒ프레시안(손문상) |
그리고 그렇게 살아서 만났다. 얼굴은 반쪽인데 배만 튀어나온 남편을 껴안았다. 아내가 울고 아이가 울고 김대중도 울었다. 김대중은 50년이 지난 후에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노란 달을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이었다.
전황이 바뀔 때마다 동족을 죽이는 살육전이 되풀이 되었다. 김대중은 그때 전쟁을 보았다. 좋은 전쟁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김대중은 이때부터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목포에 국군 해병대가 나타났다. 김대중은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곧 지프차를 타는 청년 사업가로 돌아왔다. 바로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던 데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었다. 경제 전반의 흐름을 간파했고, 모험을 회피하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종업원들과의 관계가 좋았다. 그해 10월 목포일보사를 인수했다.
전세가 다시 기울었다. 1951년 새해 서울이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 이른바 1·4 후퇴였다. 모든 것들이 다시 부산으로 옮겨갔다. 김대중도 사업 기반을 부산으로 옮겼다. 전쟁으로 육로가 막히자 해운업은 호황이었다. 보유 선박 다섯 척과 빌린 십 수 척을 운용해서 인근 뱃길을 장악했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당시 김대중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있다면 돈 버는 일"이라고 서슴없이 얘기했다. 훗날 곧잘 "사업만 계속했다면 손꼽히는 재벌이 되었을 것"이라 말했다. 아마 이때의 성공이 있었기에 그리 자신 있게 얘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보다 더 절망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터지더니 이어서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났다. 방위군은 중공군이 개입하자 이에 맞서기 위해 17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들을 모집해 허겁지겁 편성한 부대였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이들을 후방으로 집단 이송했다. 이 때 방위군 수뇌부가 보급품들을 멋대로 처분하여 저희끼리 나눠가졌다. 방위군들은 길 위에서 굶어서, 얼어서 죽었다. 사망자가 수만이었다. 그럼에도 방위군 수뇌들은 저마다 차에 돈을 가득 싣고 다녔다. 그걸 요정에, 고급 음식점에 뿌렸다.
이듬해 5월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났다. 독재 정권을 연장하려는 음모였다. 당시 제2대 국회는 무소속 의원이 6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뽑았다. 임기가 1952년 7월에 끝이 나면 이승만은 물러나야 했다. 이에 대통령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려 했다. 이승만 지지 세력은 폭력배를 동원하여 의사당을 포위했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야당의원들을 체포했다.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구금 중인 야당 의원들을 의사당으로 데려와 정족수를 채웠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 직선제 헌법개정안이 통과되었다.
김대중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을 했다. 이미 김대중은 정치가 바르지 못하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사선을 넘으며 가슴에 새겼다. 부산 정치 파동은 이렇듯 잘못된 정치가 빚어 낸 또 다른 비극이었다. 전선에서는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오직 정권만을 탐하는 무리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 무렵 토마스 제퍼슨의 경구가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과오를 개혁하려는 자들에게 순교의 횃불을 들어준다는 점에서, 정치는 종교와 같다.'
한국전쟁이 김대중을 일생 '평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인제 선거에 뛰어들었을 때 그는 이런 연설을 했다.
"하늘과 땅이 들어붙어야 합니다. 그래서 악을 없애야 합니다. 새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김대중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정치판에 뛰어 들었다. 실로 가슴 뛰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고난의 시작이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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