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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를 원망한 DJ "이승만 대신 대통령이 되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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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를 원망한 DJ "이승만 대신 대통령이 되었다면…"

[김대중 평전 '새벽'·4] 언덕 위의 어머니

언덕 위의 어머니

배는 3시간 동안 물살을 갈랐다. 목포항은 소문보다 훨씬 거대했다. 형형색색의 깃발이 나부끼고 크고 작은 뱃고동 소리가 바다 위를 떠다녔다. 먼 바다에는 돛단배들의 돛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온갖 배들이 도시를 끌고 바다로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섬 소년의 눈에 비친 목포는 별천지였다. 옹기종기 모여 살던 하의도 마을과는 너무도 달랐다.

어머니는 항구 근처에 여관 하나를 샀다. 목포시 항동 목포대 1번지에 위치한 영신여관이었다. 나는 김대중의 '학창 시절'을 찾으러 목포에 갔었다. 2006년 가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영신여관이 남아 있었다. 70년의 세월은 겨우 이겨냈지만 거의 폐가였다. 여관이라기보다는 일반 주택에 가까웠다. 섬에서는 제법 실했던 살림을 정리했지만 목포에서는 이렇듯 작은 여관 하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여관은 까마득히 높았다. 수없이 많은 계단이 가파르게 놓여 있었다. 우물이 없어 여관에 물을 길러 날라야 했다. 대중은 2층 다락방에 기거했다. 우리 일행을 안내했던 친구 정진태는 "대중이가 사다리를 타고 다락방을 오르내렸다"고 말했다. 말 속에는 학창 시절에 품었던 당시의 안타까움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다락방에는 작은 창문이 있었다. 대중은 그 창문으로 목포 앞바다를 바라봤다. 각양각색의 배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작은 여관 다락방에서, 그것도 작은 창으로 세상을 봤다. 당시 여관은 손님에게 밥상도 차려줬다. 높고 작은 여관을 찾는 이들은 거의가 거리의 불빛에 쫓겨났거나 도시의 위세에 밀려났을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계단을 올라 하루치의 허름한 시간들을 재웠을 것이다. 영신여관에는 날마다 막다른 사연들이 계단을 타고 올라왔을 것이다. 딱한 이들이 문을 두드리고, 이들이 풀어놓는 이야기는 슬픔이 깃들어 창백하거나 분노가 스며 거칠었을 것이다.

김대중은 그 이야기들 위에서, 다락방에서 글을 읽고 꿈을 꿨다.

ⓒ프레시안(손문상)

대중은 6년제 목포제일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첫 등교 때는 설레면서도 두려웠다. 학교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그보다 대중을 더 기죽게 만든 것은 아이들 모두 손발과 목덜미가 하얗다는 사실이었다. 하의도의 새까만 아이들이 아니었다. 아는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과 섞이지 못하고 혼자 떠돌았다. 아이들은 섬놈이라며 손가락질 하고, 이유 없이 다가와 위아래를 훑어보고, 다짜고짜 때리기도 했다. 놀림을 피해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 옆 공터를 찾았다. 냄새 때문에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대중에게 반전의 기회가 왔다. 전학 온 지 몇 달이 지난 후 목포시 어린이 글짓기 대회가 열렸다. 주제는 '교통질서'였다. 섬 소년은 보란 듯이 입상을 했다. 일본인 교장 사이토는 전교생 앞에서 상장을 전해주며 학교의 자랑이라고 했다. 대중은 일약 학교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대중이 지나가면 여학생들이 소곤거렸다. 이러한 반전은 훗날 운명처럼 수없이 되풀이 되었다.

5학년에 올라가서는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때 1학년에 갓 입학한 권노갑은 대중을 깊이 흠모했다. 조선 학생으로 잘 생기고, 공부 잘하고, 매사에 당당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등교하는 대중을 배웅했다. 문득 대중이 멈춰서 뒤돌아보면 언덕 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런 어머니가 안쓰러웠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미리 차린 밥상을 내왔다. 그러고는 밥상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잘 먹어야 했고 튼튼해야 했다.

대중은 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당대의 명문 목포공립상업학교(목포상업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어머니는 눈물을 뿌렸다. 하의도를 떠나오길 백 번이나 잘했다고 혼잣말을 했다. 여관보다 여관집 아들이 더 유명했다.

목포상고는 조선, 일본 학생을 반반씩 뽑았다. 대중은 취업반 급장을 맡았다. 2학년 때 창씨개명이 있었다. 이로써 이 땅의 백성들이 말과 성을 빼앗겼다. 김대중은 이 때 비로소 일본의 실체를 보았다. 한국인에게 성(姓)은 생명을 대신할 정도로 소중했다. 유교에서 성을 바꾸는 것은 환부역조(換父易祖)로 불효 중의 불효였다. 훗날 일본인들이 김대중에게 창씨개명으로 바뀐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결코 답하지 않았다. 성을 바꾼 일을 가장 큰 치욕으로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3학년 때 진학반으로 옮겼다. 당시 한반도 정세는 극히 암울했다. 야망에 불타는 청년들에게 견디기 힘든 시간들이었다. 대중은 취업 대신 진학을 선택했다. 더 배우고 더 생각하고 싶었다. 진학반 담임은 노구치 진로쿠(野口戡六) 선생이었다. 일본인 교사들은 한국 학생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특히 노구치 선생은 대중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일어와 유도를 가르친 그는 곧잘 인생을 유도에 비유했다.

"원칙을 고수한다고 방법에서 유연하지 못하면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 대중은 큰 감명을 받았다. 원칙을 고수하면서 방법에서는 유연한 삶, 이는 '선비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 감각'을 지닌 삶으로 이어졌다.

1943년 목포상고를 졸업했다. 원래는 이듬해 졸업 예정이었지만 전시 특별 조치로 앞당겼다. 김대중의 정규 교육은 여기서 끝이 났다.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졸업 성적은 39등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대중은 많이 흔들렸다. 야망은 있으나 길이 보이지 않았다. 집은 여전히 가난했고, 목표로 했던 대학 진학은 쉽지 않았다. 만주 건국대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전쟁으로 그 길이 막혀 버렸다. 또 언제 징집당해 전쟁터로 끌려갈지 몰랐다.

김대중은 훗날 당시의 방황을 후회했다. 시국이 암울할수록 더 열심히 공부했어야만 했다. 그래도 졸업하자 곧바로 해운 회사에 취직했다. 전쟁통이라 고급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대중은 열심히 일했다. 대학을 못간 아쉬움은 만질수록 아팠지만 그걸 잊기 위해서라도 일에 매달렸다.

1944년 여름이었다. 회사 앞 거리에서 한 여인을 보았다. 하얀 원피스에 꽃무늬 양산을 쓰고 또박또박 걸어가고 있었다. 햇살이 부셨지만 그녀는 더 눈부셨다. 첫눈에 반해 버렸다. 하얀 피부에 잘 벗어 넘긴 머리, 속으로 세면서 걷는 듯한 걸음걸이, 영롱한 눈. 그녀는 항구의 잿빛 우수를 한 순간에 날려버린 백합이었다.

그녀를 수소문했다. 이름은 차용애, 마침 동급생의 누이동생이었다. 일본에서 여학교에 다니다 전쟁이 터져 아버지가 불러 들였다. 대중은 동급생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녀를 보기 위해서였다. 목포의 수재이면서 외모 또한 준수했던 대중에게 그녀도 마음을 열었다. 사랑이 깊어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을 아버지가 반대했다. 언제라도 일본군으로 끌려갈 판인데, 딸을 생과부로 만들 수는 없다고 했다. 당시 징집 통지서는 사망 통지서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봐둔 신랑감이 따로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김대중을 미더워했다. 사윗감을 두고 의견이 갈리자 그녀의 부모는 대중과 가족 모두를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녀 더러 최후의 결정을 하라고 했다.

"저는 대중 씨한테 시집 못가면 죽어버리겠습니다."

그걸로 끝이었다. 하얀 얼굴에 앙 다문 입술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대중의 품에 안겼다. 반대하던 아버지는 그 후 딸보다 사위를 더 사랑했다. 장인은 큰 인쇄소를 운영하던 재력가였다. 두 사람은 1945년 4월 결혼했다. 그리고 그해 8월 벼락처럼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그러나 해방 공간은 어수선했고 나라는 국민들의 염원대로 세워지지 않았다. 김대중은 사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새로운 조국을 건설한다는 희망과 의욕으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그 후 좌와 우로 갈라지면서 숱한 정당들이 탄생했다.

김대중은 조선신민당에 입당했다. '좌우 합작'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의 독립보다는 소련을 추종하고 나아가 그들에게 충성을 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우리의 조국 소비에트 만세' 또는 '붉은 깃발만이 우리의 진정한 깃발'이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했다. 김대중은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

"어떤 놈들이든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고, 붉은 깃발을 우리 깃발이라고 하는 놈은 때려죽여야 한다."

김대중은 일생동안 이렇게 과격한 언사를 구사한 적이 없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 또한 컸다. 공산주의자들과는 이렇게 결별했다.

1947년 7월 좌우 합작의 중심인물 여운형이 살해당했다. 그리고 1949년 6월 김구가 현역 소위의 흉탄을 맞고 세상을 떴다. 김대중은 김구를 절세의 애국자로 추앙하는데 인색하지 않지만 정치적 행적에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가장 큰 잘못은 '5·10 총선'에 뛰어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구 선생이 5·10 총선에 참여했다면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으면 이 땅에 반공을 빙자한, 친일파에 의한 독재가 일찍이 발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시작이었다."

김대중은 훗날 정치인은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고 거듭거듭 말했다. 그것이 최악의 경우를 막아 결국은 민의를 따르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김대중은 사업 기반을 넓혀 나갔다. 항구 근처에 제법 큰 집도 장만했다. 어느덧 돌아보니 목포의 유지였다. 청년 실업가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불길했다. 양민들이 학살을 당했다는 소식이 날아들고, 온갖 사건으로 해방 공간이 피로 물들었다. 불온한 조짐들, 그것들이 전쟁을 부르고 있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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