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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김대중, 일본 군함을 보고 던진 첫마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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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김대중, 일본 군함을 보고 던진 첫마디는?

[김대중 평전 '새벽'·3] 연꽃섬 그리고 겁쟁이 울보

연꽃섬 그리고 겁쟁이 울보

김대중은 1924년 1월 6일 전남 신안군 하의도 후광리에서 태어났다. 그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김구는 48세였고,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은 49세, 마오쩌둥(毛澤東)은 31세, 마하트마 간디는 55세, 김일성은 12세, 박정희와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는 7세였다.

하의도는 농지 탈환 항쟁을 줄기차게 벌여온 눈물의 섬이었다. 1623년 인조는 정명공주를 홍 씨 집안으로 출가시킬 때 4대손까지 세미(稅米)를 받도록 윤허했다. 그러나 정명공주의 4대손이 사망했어도 하의도 주민에게 땅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농지 탈환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땅 주인이 9번이나 바뀌었다. 주인은 부(富)를, 소작농민들은 한(恨)을 대물림했다. 그렇게 300년이 넘도록 싸웠다. 마침내 하의도는 탐욕이 지배했던 더러운 시간을 빠져나와 이름처럼 연꽃섬(荷衣島)이 되었다. 그리고 연꽃섬은 정치인 김대중을 키웠다. 또 김대중은 연꽃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정치란 심산유곡에 핀 순결한 백합화가 아니다. 흙탕물 속에 피어나는 연꽃이어야 한다."

김대중은 서자였다. 어머니 장수금은 둘째 부인이었다. 아버지 김운식은 첫째 부인과 1남 3녀를, 둘째 부인과는 3남 1녀를 두었다. 그러니까 김대중은 어머니가 낳은 첫째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차남이었다. 아버지 집은 본 마을에 있었고, 어머니 집은 간척지인 후광리에 있었다.

김대중은 큰집과 어머니 집을 오가며 자랐다. 어머니는 큰집에 들어가지 않고 따로 살았다. 후광(後廣)리는 간척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 그리 불렸다. 간척지 위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후광'을 아호로 삼았다. 고단한 인생길은 이때 이미 예고되었는지도 모른다. 간척지 지명이 곧 아호였으니, 그 삶이 바다를 메워서 길을 내듯 험했다.

김대중의 생가를 둘러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곳은 배산임수의 명당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2006년 가을 생가를 둘러봤다. 김대중은 보고 온 소감을 물었다. 함께 답사를 다녀온 김대중도서관장 유상영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결국 생가 주변의 평범함과 한가로움을 약간 비틀어 얘기했다.

"대통령께서는 혼자만의 힘으로, 혼신의 노력으로 오늘에 이른 것 같습니다."

김대중은 고요하게 웃었다. 맞다, 그는 그렇게 혼자서 바다를 메워서 자신의 길을 냈다.

ⓒ프레시안(손문상)

후광리 앞은 너른 염전이 있어 사람들이 북적였다. 어머니는 이들을 상대로 국밥집을 차렸다. 손님들에게 국밥을 말아주고, 논밭 일도 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일했다. 작은댁으로 살아야했기에 매우 고단했다.

김대중은 출생과 관련 평생 악성 소문과 루머에 시달렸지만 침묵했다. 그것은 어머니에 대한 배려였다. 어머니에게 차마 작은댁이라는 멍에를 씌워줄 수 없었다. 서거 후에 발간된 <김대중 자서전>에서 비로소 서자란 사실을 밝혔다. 그러면서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이 세상에서 맺었던 모든 인연과 화해하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정에 약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하는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소리와 춤에도 능했다. 아버지의 한량춤과 선비춤은 구성졌고, 특히 판소리 <쑥대머리>는 절창이었다. 대중은 선착장 길을 걸어 나오며 아버지가 뽑던 가락이 평생 귓전을 맴돌았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에 찬 자리여…….' 김대중은 곧잘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가 대처에 살면서 소리공부를 제대로 했다면 명창이 되고도 남았다."

훗날 이 땅의 예인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아버지의 춤과 소리에서 싹이 텄다.

대중은 아홉 살에 서당을 다녔다. 훈장 초암 김연(金鍊)은 학문이 깊어 인근에 명성이 높았다. 훈장은 대중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대중이 없는 자리에서 학동들에게 말했다.

"김대중은 크게 될 인물이다."

그해 가을 서당에서 장원을 했다. '장원'이라고 쓴 상장을 가져가자 어머니가 와락 끌어안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상장이었다. 그걸 바람벽에 붙여놓았다. 이웃들과 손님들이 보고는 덕담을 건넸다. 어머니는 서당에 장원턱을 냈다. 떡과 고기, 부침개, 장난감 등을 마련하여 학동들에게 일일이 나눠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대중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열 살 때 하의도에 새로 생긴 4년제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서당에 다닌 학력을 인정받아 곧바로 2학년에 편입되었다. 대중은 공부를 잘했다. 역사가 특히 재미있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3킬로미터를 걸어 다녔어도 힘 드는 줄 몰랐다.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벙거지를 둘러쓰고 내달렸다. 김대중은 그 때 다져진 체력이 일생을 받쳐주었다고 술회했다. 시험을 치르면 늘 최고의 성적을 받아 쥐었다. 그날은 어머니 집 국밥이 유난히 푸짐했다. 신식 학교에서 날아온 시험지와 통신표는 신기했다. 이를 돌려보며 손님들이 더 침을 튀겼다. 어머니는 별이 쏟아지는 밤에 아들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열심히 공부하거라. 어떤 일이 있어도 너만큼은 공부를 시키겠다."

대중은 아이들과 뛰놀며 구김 없이 자랐다. 특히 바다만 보면 그렇게 좋았다. 바다 건너에는 무슨 세상이 펼쳐져 있을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이들과 바닷가에서 낙지를 잡아먹고, 콩서리를 하다 들켜 내빼기도 했다. 언덕에서 노을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고, 소를 따라가다가 뒷발에 채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이야기 중에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훗날 김대중을 예고하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우선 대중은 마음이 여리고 겁이 많았는데도 큰일에는 담대했다. 대중은 형제 중에서도 가장 겁이 많았다. 밤에는 옛날이야기 속의 도깨비가 튀어나올까봐 마음을 졸였다. 바람이 불면 마당 구석에 있는 측간을 가지 못할 정도였다. 혼자 있으면 귀신이 나올까봐 이불을 뒤집어썼고, 또 어머니가 돌아가실까봐 홀로 울었다. 그런데도 틈만 나면 혼자서 뭍으로 가겠다고 떼를 썼다. 신문 배달을 해서라도 독학을 하겠다고 부모를 졸랐다. '바람이 두렵고, 어둠이 무서웠지만 새벽에 길을 나서고야 말았던' 김대중의 삶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또 갈대밭에서 야생 오리를 잡아와 집에서 키우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먹이를 잡아다 주며 온갖 정성을 들였지만 이내 도망가 버렸다. 야속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대중은 다시 야생 오리를 잡아와 어떻게든 길러보려고 했다. 그것도 하나의 상징이었다. 대중은 가능해 보이지 않은 일이라도 끝까지 노력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의 삶은 '야생 오리를 잡아 집에서 기르기'의 연속이었다.

김대중은 또 엉뚱하게 나중에 임금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의도에는 김해 김 씨 선산이 명당이라서 그 후손 중에 큰 인물이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품었는지 모른다. 대중은 이웃 마을에 아기가 태어났는데 점쟁이가 "장차 임금이 될 것"이라 말했다는 소문을 듣고 화가 돋았다. 저 남쪽 끝 조그만 섬마을 아이가 임금을 꿈꾸었음은 예사롭지 않았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또 있다. 하의도 앞바다엔 간혹 일본 군함이 나타났다. 어린 김대중은 그 크기와 규모에 압도당했다. '일본은 저리도 힘이 세구나.' 외경심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김대중은 부러움과 슬픔이 교차했다. '어째서 우리에겐 저런 군함이 없을까.' 그러고는 나무를 깎아서 장난감 군함을 만들었다. 이를 두고 고 전인권은 이런 분석을 내놓았다.

"위용을 자랑하는 일본 군함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볼 때 권력을 상징한다. 그런데 겁이 많은 김대중은 권력을 두려워하면서도 그 군함을 가지려 했다. 여기서 김대중의 정치와 권력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눈치 채야 한다."

김대중은 또 일찍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보통학교에 들어간 후 신문을 탐독했다. 아버지가 구장직을 맡고 있어서 <매일신보>가 들어왔다. 외딴 섬마을에 며칠이나 묵은 소식이었지만 섬에는 없는 여러 가지가 들어 있었다. 서당에서 익힌 한자 실력으로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중에서도 정치면을 유심히 봤다. 일본 내각이 개편되면 그 명단을 베껴서 가지고 다녔다.

대중의 바람대로 가족이 뭍으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는 억척스럽게 일군 살림살이를 정리했다. 순전히 자식들 잘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대단한 결단이었다. 김대중은 그런 어머니가 한없이 존경스러웠다. 훗날 고마움을 이렇게 말했다.

"그런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섬에서 그저 그렇게 늙어갔을 것이다."

1936년 가을, 어머니와 자식들이 배에 올랐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경향닷컴 사장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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