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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병 DJ 장남,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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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킨슨병 DJ 장남,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김대중 평전 '새벽'·2]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들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들

감히 달이 해를 삼켰다. 2009년 7월 22일 서울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달은 높게 뜬 태양을 정확히 공격했다. 대낮 하늘에서 어둠이 내려왔다. 100년래 최장의 일식(日蝕)이었다.

그 무렵 하의도 앞 대섬(竹島)의 '큰바위얼굴'이 일그러졌다. 느닷없이 돌이 부스러져 이마 부분이 패었다. 큰바위얼굴은 석 달 전, 그러니까 지난 4월 마지막 고향 방문 때 찾아가서 봤다. 그 때 김대중과 큰바위얼굴은 마주보고 웃었다.

김대중의 생명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불길했다. 검은 해를 보면서 죽음을 떠올렸다. 여름 한 복판인데도 한기가 느껴졌다. 김대중은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입원한 지 열흘째였다.

그날은 오랜만에 의식이 또렷했다. 새벽 중환자실을 찾은 아내 이희호에게 말했다.

"이곳에 흰 옷 입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이오."

그리고 곁에 있던 공보비서관 최경환에게 물었다.

"국회 상황이 어떠한가."
"미디어법 때문에 대치중입니다."
"전망은?"
"여당이 직권 상정해서 강행 처리할 것 같습니다."
"민심은?"

병상에서도 민심을 물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김대중은 중환자실이 싫었다. 어느 것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식이 있었던 그날 의료진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이, 삼 일을 살아도 집에 있고 싶소. 병보다 환경이 견디기 힘드오."

의료진은 고심 끝에 일반 병실로 옮겼다. 그날 밤 김대중은 생선이 먹고 싶다고 했다. 비서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김대중은 입으로 음식을 넘길 수 없었다. 며칠째 '코줄 식사'만을 하고 있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는 국회부의장 이윤성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날치기로 미디어법안을 통과시켰다.

김대중은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상태가 급속히 나빠졌다. 의료진은 다음 날 다시 중환자실로 옮겼다. 그런데 갑자기 심장이 멎었다. 의사들이 달려와 심폐소생술을 시도하고 강심제를 투여했다. 겨우 숨이 돌아왔다. 다시 인공호흡기를 부착해야 했다. 의료진은 비서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하늘에서 어둠이 내려오듯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2011호 병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내 이희호는 이를 단호하게 뿌리쳤다.

"저는 확신이 있어요. 다섯 번 죽을 고비에서도 살아오셨어요. 이번에도 회복하실 거예요."

아내의 바람대로 김대중은 깨어났다. 의료진은 기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날 이후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못했다. 겨우 눈으로, 손으로만 얘기했다. 병실 주변에는 '심장 마비' '의식 불명'이라는 말들이 은밀하게 유통되었다. 사진기자들이 9층 중환자실 입구를 지켰다.

비서관 최경환은 세브란스 병원 주변을 살폈다. 연세대 노천극장도 둘러봤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최후'를 준비해야 했다. 몸이 떨렸다. 그는 마지막 비서관이었다. 그는 저명인사의 부고를 접할 때마다 나이부터 봤다. 김대중 85세, 언젠가는 보내드려야 했지만 위인의 죽음은 너무 무거웠다. 지상의 마지막 집은 어디다 마련할 것인가. 남은 사람들과 작별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병원 뜰에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야속했다.

그해 여름은 볕이 무척 뜨거웠다. 태풍은 한 번도 한반도에 상륙하지 않았다. 그래서 과일은 바람을 탓하지 않았다. 나무마다 살 오른 열매들로 가지가 휘어졌다. 동교동 집 뜰에서도 감이 익어가고 있었다.

7월 13일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의사들도 입원을 권하며 가벼운 폐렴 증상이 있다고 가볍게 말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비서관회의를 주재했다. 중국 국가부주석 시진핑과 전 국무위원 탕자쉬엔에게 보내는 서신에 '金大中'이라고 서명했다.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전직 대통령 김대중은 떠오르는 권력 시진핑에게 남북 화해와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중국의 적극적인 역할을 당부했다. 시진핑은 김대중을 존경하고 있었다. 깊이 경청하고 예의를 갖춰 답했다. 김대중은 만족했다. 돌아와 환대에 감사하는 서신 내용을 구술했고, 입원 직전에 서명했다.

김대중의 병세는 가볍지 않았다. 입원 사흘 만인 7월 15일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음날 호흡 곤란으로 인공호흡기를 부착했다. 폐렴에 급성호흡곤란 증후군이란 병명이 추가됐다. 인공호흡기 부착은 큰 고통이었다. 기계와의 호흡이 일치하지 않았다. '김대중 위독'이라는 기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7월 18일 병세가 호전되자 간호사에게 '권리'와 '생수'라고 적어서 보여줬다. 목이 타는데 물 한 모금도 주지 않느냐는 항의였다. 다음 날 인공호흡기를 제거했다. 언론들은 다시 "호흡기 제거, 병세 호전"을 보도했다. 외신들도 이를 긴급 타전했다. 문병 온 둘째 며느리에게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을 얘기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투병했다."

다시 병세가 심상치 않았다. 7월 26일 '영원한 비서' 권노갑이 미국에서 귀국했다. 동교동 사람들이 병실 주변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김대중에게 8월은 특별한 달이었다. 1973년 8월 8일 도쿄에서 납치되었다가 닷새 만에 살아왔다. 하지만 8월 1일 새벽 다시 고비를 맞았다. 의료진과 비서들은 그것을 '쓰나미'라고 했다. 입원 후 2차 쓰나미였다. 이희호는 말라붙은 입술을 보며 울었다.

"물 한 모금만 넣어드리면 안 될까요. 위가 다 말라버리셨을 것 아닙니까."

의료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치의 장석일이 눈물을 보였다. 2011호병실에서 대기하던 장옥추 국장, 이승현 김선기 김진호 비서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날 민주화 동지인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이 세상을 떴다.

8월 4일 세브란스병원 예배실에서는 쾌유 기원 기도회가 열렸다. 오충일 목사가 설교했다.

"대통령님의 다섯 번 죽을 고비에서 어디 우리 교회가 살린 적 있습니까. 늘 하느님과 국제 사회가 살렸습니다. 우리가 살린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우리가 한 마음으로 기도해서 대통령을 살려 냅시다."

8월 7일 혈압이 다시 떨어졌다. 3차 쓰나미였다. 몸이 붓고 다기관장애가 발생했다. 이희호는 정신없이 양말을 뜨개질했다. 새벽에 만져보니 남편의 발이 너무도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그걸 남편의 발에 신기고 발을 감싸 쥐었다.

이날 이후 각계에서 문병객들이 줄을 이었다. 이름 있는 이들은 거의 다녀갔다. 국내외 인사들의 '쾌유 기원' 메시지들이 날아들었다. 김대중사이버기념관(대표 한승주)을 비롯한 팬클럽 회원, 그리고 시민들이 찾아와 쾌유를 빌었다. 병원 앞에서도 젊은이들이 촛불을 들었다.

비서들은 살아서 돌아온 8월 13일을 기다렸다. 36년 전의 기적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며 서로를 다독였다. 비서관 김선흥은 얼굴이 "유독 밝아 보인다"며 애써 웃음을 물었다. 새벽 당직을 섰던 비서 박한수는 "근래에 가장 편한 모습"이라고 했다. 그러나 '13일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2009년 8월 18일 새벽 이희호는 여느 때처럼 중환자실로 내려가 남편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의료진은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날 아침 의료진의 통보는 차가웠다.

"오늘이 고비다. 심장이 펌프질하기조차 힘들다."

운명의 날이었다. 가족과 동교동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11시 10분 마지막 인사가 있었다. 차남 김홍업, 비서관 윤철구, 비서실장 박지원이 차례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책임을 지고 가정을 잘 이끌어 화목한 가정을 만들겠습니다."
"행복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여사님 끝까지 잘 모시겠습니다."

ⓒ프레시안(손문상)

정오가 거의 될 무렵 휠체어를 타고 장남 김홍일이 도착했다. 돌아보면 공군장교 출신 홍일은 건장하고 영민했다. 그러나 고문을 당한 후로는 병마에 시달렸다. 쿠데타군 고문 기술자들은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임을 불라'며 자식을 짓이겼다. 홍일은 죽기로 했다. 감옥에 있을 아버지에게 절을 올린 후 감방 벽에 머리를 박았다. 찧고 찧었다. 피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죽지 못했다. 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에 걸렸다. 갈수록 병이 깊어졌고, 끝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저몄다. 입원하기 며칠 전에도 찾아가 아들 손을 잡았다. 흐르는 침을 닦아 주었다. 홍일은 아버지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해야 했다. 모두 숨을 죽였다.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아·버·지"

모두 귀를 의심했지만, 그 소리는 모인 사람들 가슴에 박혔다. 슬프면서도 아팠다.

권노갑, 한화갑, 한광옥, 김옥두, 박지원 등 동교동 사람들이 함께 외쳤다.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아내 이희호가 작별의 말을 했다.

"정 그렇게 가시려거든 여기는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가세요."

대통령 김대중, 그가 눈물을 흘렸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눈물, 그것은 또 마지막 대답이었다. 윤철구가 그 눈물을 닦았다. 곧바로 계기판에서 "뚜뚜" 소리가 울렸다. 오후 1시 43분이었다. 임종은 평화로웠다. 하늘에서는 햇살이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파도가 노래를 멈췄고, 하의도 앞바다는 고요했다.

김택근은 시인이며 언론인이다. <경향신문> 종합편집장, 문화부장, 경향닷컴 사장,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김대중 자서전>(삼인 펴냄)을 6년 동안 대표 집필했다. 예리함과 따스함이 동시에 스며있는 산문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의 팬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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